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Pneumati Peripateite (성령으로 행하라)

“ei zwmen pneumati, pneumati kai stoicwmen” — PROS GALATAS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 갈라디아서 5:25

아래는 김홍전 “신령한 생활” 중:

위의 말씀과 더불어 볼 것은 갈라디아 5:16 말씀으로“lego de pneumati peripateite kai epiqumian sarkoV ou mh teleshte”, 개역성경에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번역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로 번역된 pneumati peripateite는 말 그대로 하면 갈라디아 5:25 말씀처럼 ‘성신으로 행하라’라 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성신으로 행하려고 한다면 먼저 자기(自己)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끝나야 합니다. 그것 없이, 자기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성신님을 좇아서 행한다던지 성신으로 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위에서 육체의 ‘욕심’이라고 번역된 epithumia 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원한다” 할 때에도 쓴 것으로, 나쁜 욕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악하고를 떠나서 “욕망”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심이라고 할 때 ‘육체’라는 뜻의 sarkos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성령을 좇아 사는 자와 대별해서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듭나기 전의 옛 사람을 그대로 입고 행하는 성도들을 지칭할 때 쓴 말로서, 육체의 욕심이라고 한 epithumian sarkos 라는 말은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죄된 욕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하는 등 모든 선과 악과 미와 추가 다 섞여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22). 그리고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은 옛 사람이 못 박힌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 6:6).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이라고 하는 것은 옛 사람의 소욕이고, 그것은 죄된 욕구 뿐만이 아니라 자기(自己)라는 것으로 대표되는 그 아상(我相)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을 이미 거듭난 성도를 향해 하신 것이지 (엡 4:21-24),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은 옛 사람을 벗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갈라디아서 말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는 것은 사람의 죄된 욕망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힘으로 선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보겠다는 것 까지 포함한 – 즉, 자기(自己)라고 하는 것이 살아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우리가 그렇게 행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신님을 의지하고 성신으로 행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신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아예 성신님으로 행해야만이 비로소 성신의 열매 곧 하나님 나라적인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를 증시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 희락, 화평, 절제, 온유 등등의 덕목을 놓고 자기가 열심히 각고면려해서 새 사람을 입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그리스도의 모습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 이러한 분이다’ 정해 놓고 그 모습을 향해 자기가 달려간다고 해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또한 적당히 자기의 노력과 성령님의 도움을 합쳐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런 것에 대해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눅 5:36). 즉, 옛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선한 것은 놔두고 나쁜 것만 떼어 낸 뒤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깁는 식으로 성신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있어서 그것은 그대로 둔 채 성령님의 사역과 합작하겠다는 생각을 애초부터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성령님의 열매만을 받으신다’. 거듭나는 것도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였듯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 5:25).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 15:50) 그러나 시작은 언제나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끝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고 그것 없이는 안됩니다. 자기가 옛 사람을 벗으려 해가지고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벗어집니다. ‘언제 큰 감격을 받아 크게 회개하면 되겠지’ 생각하나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많은 성경 읽기가 나를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의 방도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我]라고 하는 그 옛 사람을 이미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으셨다는 성령님의 증거를 믿는 데서 비로소 우리는 옛 사람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pneumati peripateite” “성신으로 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