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신학 | Theology

둘이 한 몸을 이룰지라

그러면 ‘독처’라는 문제에 대해서 이미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서 세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 곧 부부의 합일에서 비로소 구현됩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 및 복수성은 아담이라는 한 개체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까닭에, 반드시 하나 이상, 그러나 동시에 그게 하나가 될 수 있는 다른 개체를 요구했습니다.

둘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움직이심의 여러 양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사람의 정신 생활, 혹은 영혼의 여러 기능의 움직임 가운데 만일 한 인격만 있었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그 양태를 모방도 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대상이 있고서야 비로소 발생하는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사랑받고 사랑하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고 하는 이런 상태 이것은 사랑의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충절(忠節)하고 순전한 사랑이어야지, 부분적인 사랑이면 안 됩니다. 충절한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서로를 위하여 노심초사하면서 봉사해 주는 사랑도 되어야 하고, 또한 혈통의 연결로 말미암는 사랑도 되어야 하고, 또한 이성에 대한 사랑도 되어야 하는 바, 이러한 사랑이 다 같이 충전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그러한 사랑을 다같이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그 대상은 그냥 동질의 사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친한 친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식 혹은 부모라는 혈족으로만 있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 대상이 자기의 에로스의 대상인 동시에 혈속이 될 수 있고, 동지가 될 수 있고 동시에 봉사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담에게는 하와가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한 두번째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셋째로는, 독처해서 개인의 인격 향상을 기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개인의 복합체적인 발전, 즉 새로운 더 큰 대아(大我)로, 마침내 그리스도의 신령하고 거룩한 몸의 부분부분이 연합해 가지고 하나의 새로운 인격을 이루는 일은 혼자로서는 안 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야 할 뿐더러, 그것은 동일한 성격과 동일한 생명의 연결로만 비로소 되는 것인 까닭에, 독처해서는 그런 것이 발생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담이 하와와 합하여서 더 큰 대아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런 식으로 신령한 한 몸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담 개인만으로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생육할 길이 없는 것은 물론 향상하고 발전하고 확대할 길도 없었습니다. 이래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상의 사실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첫째, 혼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제도와 축복하에서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둘인 동시에 하나로서 생활을 해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부부가 서로에 대해서 가지는 사랑은 참될 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연인의 사랑도 있어야 하고, 동지적인 사랑도 있어야 하고, 존경으로 바치는 사랑도 있어야 하고, 진정한 동정심으로 베푸는 봉사의 사랑도 있어야 하는 것이고, 혈족애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것이 혼인을 한 다음부터 체득해 나가야 하는 상태 혹은 당위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신령한 몸을 향하여 부부가 함께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드러내되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과 둘이 합해서 하나가 됐다는 그런 정적(靜的)인 면으로만 드러낼 것이 아니라, 끝없이 창조하고 생육하고 발전해 나간다는 동적(動的)인 면에서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을 이루는 중요한 이유도 되고, 마땅히 가정에서 나타내야 할 의무도 됩니다.

물론 이 진리는 에베소서 5:22-23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보면, 그리스도의 그 신령한 몸이 원형이고 그 원형을 방불케 하는 것이 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은 마치 집을 벽돌로 자꾸 쌓아 올려가는 것같이 매일 완성을 향해서 장성해 나갑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점점 완성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같이, 가정도 그러해야 합니다.

부부가 처음에 만났을 때는 명의상 이인일체(二人一體)라는 데에서 출발을 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하나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연애를 오래 하고서 혼인을 한 부부라 할지라도 하나같이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둘이 같이 살다 보면 다른 점이 많이 생기는데, 그 다른 것을 차차 조정해 가는 습성이 생겨야 합니다. 자꾸 살아가면서 훈련을 해야 합니다. 훈련 않고 처음부터 저절로 제꺽제꺽 들어맞게 묘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서로 과거의 경험도 다르고 지내 온 길도 다르고 교육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사람끼리 만난 까닭에, 무슨 일에든 둘이 똑같은 것만을 생각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않는다’고 나갈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자기가 옳다 하고서는 툭탁거릴는지는 몰라도, 자꾸 살아가면서 각각 자기 생각의 모자라는 것, 필요한 것을 서로 보충해 가면서 하나의 생각을 만들어 나갑니다. 혼자 있었더면 생각조차 못했을 일들을 둘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을 해나갑니다. 이렇게 해서 둘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처음에 혼례식 할 때 명의상으로만 “이제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선포된 말씀을 그 다음부터 살아가면서 실증해 나가는 것입니다. 부부는 마땅히 이런 방향을 향해서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으로서(엡 4:13), 이것이 교회뿐 아니라 가정도 가지고 있는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신령한 장성의 충만한 분량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충만히 현시 되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로서는 그것을 한마디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에 비추어 그 영광의 상태에 우리가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알면 안 만큼 그 방향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부부의 생활에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충만한, 그 장성의 분량을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하루에 다 아는 것은 아니고, 일생 동안 깨달아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는 이만한 분이시더니 오늘 생각해보니 그 정도가 아니고 더 크신 분이시구나!’ 이렇게 매일매일 그리스도께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빛을 매일매일 더 밝히 깨달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밝히 반조(返照), 반사해 나가는 데에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 부부 생활의 참된 의의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아직 미숙한 상태에서 출발을 해서 차츰차츰 좀더 익숙한 상태, 좀더 능숙한 상태로 자꾸 들어가야만 합니다.

—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