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장기 계획
유학생들을 만나보면 자기 인생을 어떻게 개척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상과 각오가 각별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실은 유학생 뿐 아니라 어느 젊은이가 안 그러겠는가. 또한 그것은 세상의 윤리 도덕이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도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해석해 나가는 것이 옳겠는가. 바울 선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고 없다고 가르쳤는데, 성경을 이용하여 인생의 장기 계획을 세우려는 기풍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내가 지금 까지 이룬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표기하고 그 위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주님은 헌 옷 위에 새 것을 깁지 않는다고 하셨다 — 즉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라고 하는 것이 도무지 없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무의식 속에 거룩한 것을 가지고 자기를 복스럽게 하려는 심정을 품기가 쉽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기” 곧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제 사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접붙힘 받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 — 곧 교회의 거룩한 행보에 요구되는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꾸 하나님과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얼마나 값지게 살다 갔는가에 집중하여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성경의 큰 주제, 큰 가르침에 맞지 않다. 한 예로 삼손이 어찌하여 믿음의 용사로 칭찬 받고 있는지는 구약 교회의 사명과 그 속에서 맡은 삼손의 역할을 이해하지 아니하고서는 바로 파악할 수 없다.
개인의 가치를 무시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개인의 인격 완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덧글: 마라톤맨 님의 블로그에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오늘을 위하여 살라“는 설교 일부가 올라와 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약 4:1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