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 Worship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배할 권리

독일에 온지 4주가 되었다. 여기 와서 처음에 해야 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주일에 예배하기 위한 교회를 찾는 것이었다. 고려할 것이 몇 가지 있겠지만 (전에 이와 관련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오늘 적고 싶은 것은 예배 방식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 방식에 관심이 있으시다. 십계명에 보면 (구체적으로는 출애굽기 20:4-5)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관련된 사건으로 유명한 것이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다 —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한참을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은 금을 모아 아론을 시켜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한 것은 자기네들을 위한 새로운 신(神)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자기네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 하나님으로 여기기 위한 것이었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쓰려고 만든 것이었다 (출애굽기 32:4-5).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신 것이 출애굽기 32장에 마저 기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법도를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예배하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여긴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한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의무가 되겠지만 한 편으로는 권리도 된다. 그래서 바른 교회로 서 나가겠다는 교회는 교회의 예배 형식을 조심히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 첫째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배할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함이다.

졸인이 회원으로 있는 북미개혁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분명하게 표방하고 있다. 이 교회는 종교개혁의 역사적인 문헌 가운데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체택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1장 초반을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 the acceptable way of worshipping the true God is instituted by Himself, and so limited by His own revealed will, that He may not be worshipped according to the imaginations and devices of men, or the suggestions of Satan, under any visible representation, or any other way not prescribed in the holy Scripture.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배하려는 이 교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한 예를 들자면, 교회 예배 때 부르는 찬송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연구하고 보고할 위원회를 만들어 그 결과를 공식적 입장으로 받아들이고 또 편찬하였다. 이들의 결론은 교회의 예배 때는 시편으로 찬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회가 그 회원들에게 시편 외에 다른 찬송가로 예배하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교회의 분명한 입장이다.

사실 찬송가공회에서 간행한 통일 찬송가를 부르며 자란 나에게 시편으로 찬송하며 예배하는 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받은 느낌은 어색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게 예배한지 어언 10여년 가까이 된 지금, 이제는 시편이 아닌 다른 노래를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 도리어 낯설어졌다. 즐거울 때, 슬플 때, 회개할 때, 감사할 때, 가르침을 받고 싶을 때, 시편 보다 더 적절한 것을 찾기가 어렵다고 하면 과장으로 들릴까?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의 영광을 높이고 싶을 때, 시편은 너무도 훌륭하다. 특히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느끼셨을 여러가지 감정들은 4복음서 보다 오히려 시편 가운데 더 잘 나타나 있다. 시편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찬송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회당에 가셔서 예배 시간에 부르신 찬송이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그래서, 독일에 처음 와서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개혁교회’를 표방한 교회에 (Evangelisch-Reformierte Gemeinde) 갔을 때, 거기에 있던 찬송가집의 처음 1/3이 시편 1편 부터 150편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하지만 예배 시간에 그 중 한 편도 부르지 않아 실망하였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독일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그 회중이 시편으로 찬송했다면 무슨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지 내가 잘 알았을테고 내 마음을 함께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찬송곡들을 부렀기 때문에, 간혹 익숙한 곡조가 나와서 흥얼 거릴 수는 있었지만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내용인지 나로서 알 수는 없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그 교회가 ‘개혁교회’를 표방하기는 하나 실상 자유주의적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고 보면 시편이 버젓이 앞에 있음에도 부르지 않는 것이 이해가 간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한 교회를 찾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예배 때의 찬송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시편 이야기까지 하고 나니 혹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들이 있을까 찾아 봤다. 졸인이 출석하던 교회에서 찬송하는 모습과 분위기가 비슷한 것 몇몇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달 전만 하더라도 늘 주일마다 저렇게 찬송할 수 있었다. 주께서 부르라고 그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을 입술에 담아 함께 찬송하는 자리가 얼마나 복된 것이었는지, 그곳을 떠나온 지금 더 간절히 느끼게 된다.

위는 RPCNA 총회 때 녹화한 것이다. (가만히 보니 졸인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도 보인다.) 저 가운데 많은 분들이 어려서부터 시편을 부르며 자란 분들이다. 그래서 시편을 거의 다 외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편을 외운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농축해서 간직하는 것과 같다.

위는 시편 119편의 일부분이다. RPCNA 사람들이라면 119X 하면 바로 알 것이다. 영상 속의 교회는 RP 교회는 아니다. RP는 악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교회가 RP 교회와 비슷하다면, 이것은 성가대의 모습이 아니라 찬송을 위해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교회 회중일 것이며, 원하는 사람이 능력이 닿는대로 다양한 성부를 맡아 부르고 있을 것이다.

위는 시편 98편. 이것도 졸인이 있던 교회에서 즐겨 부르던 것 중 하나다. 영상 초반에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시편 찬송을 배우게 된다. (졸인이 아는한 개혁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어른 예배, 어린이 예배를 따로 나누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