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Prayer,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26 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25 문답은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의 문제에 관한 문답이다. (아래는 독립개신교회 번역본이다.)

126문: 다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사 우리의 모든 죄과(罪過)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아래는 이에 대한 김헌수 목사님의 강설 중 일부분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4, 228–229 쪽). 굵은 글씨 강조는 졸인이 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고 구하는 것은, ‘내가 남을 용서했으니까 주님도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뜻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126문은 참으로 뛰어난 해설입니다.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이라고 하여서, 자기가 용서한 행위를 ‘근거’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증거’로 내어놓고서 자비를 구합니다. 자기가 용서하였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 용서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용서한다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편 사람도 그 사람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계속 평행선을 그립니다. 문제를 풀려고 하지만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문제를 풀려고 하다가 더 큰 오해를 낳기도 합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영원한 평행선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하고 용서했다고 생각하면서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더 가까이하면 상처를 받을 것 같으니까 그 정도의 간격을 항상 유지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형편에 있는 우리로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결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결심하였다 해도 열매를 맺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결심도 하고 그 열매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은혜의 열매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점점 자기의 죄가 용서된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다른 사람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은혜의 증거가 내 안에 있으니, 이 은혜를 인하여 나를 용서하시고 또한 더욱 죄 용서의 사실을 이 땅에서 경험하게 하여 주십시오.’ 자기가 행한 것을 내어놓으면서 ‘내가 이만큼 용서하였으니까 내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 한다면 자기가 행한 것을 용서의 ‘근거’로 내놓는 것이지만, 126문에서는 ‘근거’가 아니라 ‘증거’로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은혜의 증거를 가지고 주님께 다시 구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누군가와 용서의 문제를 놓고 온라인에서 몇마디 주고받은 일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에서 “것같이”라는 말은 인과 관계를 반드시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기도문의 시작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이 기도는 하나님의 자식들이 (교회로서) 함께 올리는 기도이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는 하나님의 자식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열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중에 좀더 이에 대해 블로그에 적고 싶은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사죄를 받는 것의 근거는 결코 우리의 회개나 용서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하나님 앞에서 대신 치뤄주셨다는 사실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