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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가 가르치는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김세윤 교수가 언약적 율법주의(covenental nomism)에 가깝다는 낌새를 과거에 느낄 때가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있었던 강연이 CGNTV에 올라왔기에 관심을 갖고 강의 몇몇을 시청해보니 김세윤 교수가 언약적 율법주의를 열성을 가지고 전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살펴 보니, 김세윤 교수의 저서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 또한 언약적 율법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언약적 율법주의는 복음이 아니다.)

언약적 율법주의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구원의 언약에 “은혜로 들어오고, 순종으로 머무르라”(get in by grace, stay in by obedience)이다. 후자의 ‘순종’이라는 말 대신 ‘행위'(works) 혹은 ‘신실함'(faithfulness)으로 머무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음은 김세윤 교수 강연 중 <제 4강: 칭의론의 법정적 의미와 관계론적 의미 Ⅱ>에서 가져온 것이다:

[15:35-16:22]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구원을 지금 우리가 받음은 그 구원의 ‘첫 열매’ 곧 의인이라 지레 인정됨에 해당하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의 행위대로의 심판을 거쳐 그 구원의 ‘온전한 수확'(의인으로 확인됨/흠없는 자로 판정됨)[…]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 김세윤 교수는 ‘첫 열매’ 곧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안에 진입하는 것은 은혜로 된 것이지만, 그 언약 안에 계속 머무는 것은 우리의 행위도 기여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27:43-30:48] 그러기에 바울도 은혜로 주어진 칭의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 곧 올바른 관계에 ‘진입한’ 신자들에게, 종말의 완성 때까지 그 관계에 계속 ‘서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서 있지’ 않는 자들은 ‘헛되이 믿는’ 자들로서,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인들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의 관계에, 곧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짓는 그 관계에 서 있지 않아,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멸망당한 사실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경고의 예표’라고 한다 […] 그것은 그들이 그 언약의 관계의 자신들 쪽의 의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요 그의 언약의 관계에 ‘서 있음’ 또는 ‘머무름’을 하지 아니한 것이다 […]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사는 그 관계에 신실히 서 있기를 지속하지 않으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내쳐지게 될 것이다.

[34:09-34:26] 그들이 계속 믿음으로 그 관게 속에 서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하면, 그리스도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에서 그들의 칭의는 완성되어 의인으로 확인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을 얻게 된다.

[43:54-44:58] 칭의론을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바울의 복음 선포[…]와 이어지는 […] 윤리적 요구, 의로운 삶에 대한 요구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의 윤리적 요구는 의인된 자들, 곧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그와의 올바른 관계, 즉 그의 나라 또는 그의 통치 아래로 회복된 자들은 계속 그 관계에 하나님 나라 속에 서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 의로운 삶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게 들릴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좀 쉬운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복음을 듣고 믿어 죄 용서를 받은 것은 마치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그려진 나의 도화지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효로 싹 지워주셔서 깨끗한 도화지를 주신 것과 같다 (언약으로의 진입); 이제 앞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 도화지에 하나님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잘 그려나가면 (언약 안에 머무름), 마지막 심판 때에 그 그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 알고 구원을 완성시켜 주신다’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사실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고 신학계에서는 벌써 20여년 전에 나오기 시작한 이야기이다. 북미 지역의 개혁교회들 가운데서는 Federal Vision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닌지 벌써 10여년 되었다 (물론 NAPARC 소속의 많은 교회들은 이 가르침이 역사적인 신앙고백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배척했다). 이렇게 해서 소위 개신교회가 “back to Rome” 하게 되는 것인가 싶다. 졸인의 지인분들 중에는 김세윤 교수에게 많은 감명을 받은 분들이 계시는데, 이 부분은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름난 사람들이 넘어지고 또 그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휩쓸려 갈 것을 생각할 때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또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라는 계시록의 말씀들이 생각난다 (계 6:13, 12:15).

물론 종교개혁을 통해 서 나온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의 공효 때문이라고 고백하였다. 돌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공효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게 만드는데,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문: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64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감사의 열매, 곧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이뤄지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문: 우리의 선행은 왜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라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62문)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고백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김세윤 교수의 강연 전반에는 개혁파 신앙고백에 대한 이해에 결핍이 발견된다.

언약적 율법주의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추천하고 싶은 글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클락 (R. Scott Clark) 교수의 블로그이다. 다음 페이지 참고: http://rscottclark.org/category/fvnpp/

올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사경회 주제는 “성화의 은혜”이다. “성화의 은혜”를 주제로 삼게 된 데에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문제가 배경에 있다는 것이 졸인의 생각이다. 사경회 생방송을 다음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wscal.edu/news-and-events/annual-conference/

이상의 연결고리는 다 영어로 되어 있다. 국어로는, 부끄럽지만, 졸인이 쓴 글 가운데 개혁주의 언약신학과 언약적 율법주의 차이를 설명한 글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의 순종처럼 여기시고 의롭다 하심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이 있다. 또 “율법과 복음“이라는 연재물이 있는데, 여기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과 우리의 칭의 및 성화 그리고 믿음의 성격을 잘 반영하려고 신경을 썼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구속사 가운데서 시내산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있는데 (물론 이것이 쉬운 주제는 아니다) 여기에 관해서도 졸인이 쓴 글이 있다: 모세 언약(시내산 언약)은 은혜의 언약인가 행위의 언약인가?

4 Comments

  • 김홍균

    하이델베르그 문답62 의 선행에 대하여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선한 성령의 열매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성령의 열매까지 죄에 오염되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믿는 자의 삶에 없겠지요

    • Hun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실만하다는 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입니다. 바로 그런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번이 기록되었다고 문답의 주저자인 우르시누스는 해설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조: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lated by G.W. Williard, Elm Street Pringing Co., Cincinnati, 1888, p. 333). 그는 “우리의 선행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다”고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생에서 우리의 최고의 선행도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른 개혁파 신앙고백들도 이부분에서 일관성을 보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6장 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의 선행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성신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인데, 우리를 통해 나오는 그것은 오염이 되었고 너무나 많은 결핍과 결함이 섞여 있어서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자의 선행을 받으시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거나 혹은 오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공효로 씻어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네덜란드 (벨직) 신앙고백 24조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에 대해 상을 베푸신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당신이 주신 선물에 영예를 입혀주시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더욱이, 비록 우리가 선을 행해도, 우리는 우리 구원의 근거를 거기서 찾지 않는다 — 왜냐하면 우리의 행실 가운데 육신의 사욕으로 오염 되지 않고 죄책이 없는 것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는 것 가운데 그리스도의 거룩한 공효로 씻겨지지 않고 받아들여질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17은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고운

        바리새인들이 언약적 율법주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것인지요?
        마태복음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예수님이 이렇게 언급하는 것도 그들이 언약적 율법주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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