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제네바에서의 폭정(?)

만나교회의 김병삼 목사가 말하길: “칼빈은 종교국을 통해서 신정정치를 구현했다. 그의 신정정치는 엄격했고 가혹했다. 처음 5년 동안 13명이 교수대에서 죽었고, 10명이 목이 잘렸고, 35명이 화형당했고, 76명이 추방당했다. 오죽하면 감방마다 죄수로 가득차서 간수장이 시당국에 단 한 명의 죄수도 더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할 정도였다.”

헛소문을 사실인지 확인도 안하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칼빈(칼뱅)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구현하고 폭정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돌아다니기는 하나,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저질 정보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출처를 제시하라고 하면 열이면 열 세바스챤 카스텔리오 혹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지목한다. 카스텔리오의 글은 자신의 이름을 숨기면서 쓴 글로서 자기 선전물로서는 기교가 넘치는 글이지만 역사적 사건들을 신빙성 있게 기록한 사료로서는 가치가 떨어지는 글이다. 츠바이크는 소설가이자 가톨릭 신자로서, 그의 글은 칼빈을 나치의 히틀러에 가깝게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카스텔리오의 글을 바탕으로 쓴 창작 소설에 불과하다. 칼빈의 폭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기를 걸어 ‘근거 없는 헛소문이다’는 것에 돈을 걸수만 있다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본 블로그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지만, 칼빈은 제네바에 피난을 간 프랑스 사람으로서 제네바 시민권이 없었다. (죽기 5년 전, 50세가 되어서야 시민권을 받았다.) 그래서 투표권도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거기서 목회를 하였다. 그것도 교회의 간섭을 싫어하는 자유당 사람들이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쫓겨났다가 (본래 학구적이었던 칼빈은 이를 호기로 여겼다), 나중에 꼭 머물러 있어 달라고 해서 머물게 되었다. 그 유명한 세르베투스에 대한 재판도 칼빈은 끼지도 못하는 시의회 주관이었다. (제네바에 오기 전 세르베투스는 이미 가톨릭 교회로부터 “산채로, 천천히, 그의 몸이 숯으로 변할 때 까지 불사른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도망쳤다가 자기 발로 제네바를 찾았다. 왜 제네바로 왔는지는 아래에서 설명할 제네바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가 간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칼빈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다. 교회와 정부의 영역을 구분하는 사상은 벌써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다. 칼빈이 없었다면 지금의 유럽은 생각할 수 없고, 현대 문명도 우리가 지금 아는 것과 다를 것이다. 칼빈이 죽자 로마의 교황 비오 4세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 이단자의 장점은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 수하에 만일 그런 부하가 있었다면 내 세력은 이 바다에서 저 바다 끝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비오 4세

칼빈이 제네바에서 “폭정”을 휘둘렀다는 것은 칼빈에 대한 인신공격이기도 하지만 제네바에 대한 모독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펼쳤다는 소리를 들으면 무덤 속에 있던 제네바 시민들이 관을 박차고 나오지 않을까 모르겠다. 당시 제네바의 정치적 상황을 그리기 위해 오래된 신문 빠트리오트(Le Patriote)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네바는 유럽에서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영웅적인 도시다. 거기서 일어날 역사를 미리 알려줬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제네바는 사보이 공작과 교황 뿐만 아니라 황제인 카를 5세에게도 항거했으며 그에 맞먹는 프랑수아 1세에게도 대항했다. 그들에게 맞서 먼저는 정치적인 자유를 그다음으로는 종교적인 자유를 쟁취했는데 이는 자신만이 아닌 북유럽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 여러차례 그곳은 개신교와 자유를 위한 ‘테르모필레’가 되었고 페르시아에 맞선 레오니다스의 300명 보다 많다 할 수 없는 적은 영웅적 무리에 의해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자들로부터 용감히 지켜졌다.1

그래서일까, 루드비히 호이서는 “세계사의 일부분이 제네바에서 상연되었다”고 하였다.

A little bit of the world’s history was enacted in Geneva,
Ludwig Häusser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칼빈과 제네바로부터 흘러나오는 유익을 입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칼빈을 우상화하면 안된다”는 반응이 꼭 등장한다. 사실 칼빈 자신도 그랬지만 칼빈주의자들 만큼 사람을 높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없기에 카스텔리오나 츠바이크의 허무맹랑한 글들이 돌아다녀도 그에 대한 대응이 거의 없다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칼빈이 역사에 끼친 지대한 공헌은 단순히 칼빈주의자들의 의견이 아니다. 칼빈의 막대한 영향에 대한 언급은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다:

칼빈을 빼고 서구 발전의 원동력을 논한다는 것은 역사를 외눈박이로 읽는 것이다.2
존 몰리 

분명한 사료적 근거 없이 칼빈을 폄훼하는 것을 반박하고 오히려 현대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의 역사적 공헌을 정당하게 알리는 것을 칼빈에 대한 우상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철없는 생각이다. 오히려 십계명 제 6계명과 제 9계명을 통해서 배우는 바 형제의 명예를 지켜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기본적으로는 시중에 저질 정보가 많이 돌아다니니 간단한 사실 확인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을 바르고 분명하게 다음 세대에 전해 주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 추천할만한 도서로 “이 사람, 존 칼빈“이 있다.)


  1. Genève est une des plus petites et des plus héroiques cités de l’Europe. Si l’on avait voulu prédire à l’avance son histoire, elle eût paru incroyable. Genéve a défié non-seulement le duc de Savoie et le pape, mais l’empereur Charles-Quint, et il a bravé son rival non moins puissant, François Ier. Malgré tous, cette ville a conquis premièrement ses libertés politiques, puis ses libertés religieuses, et cela non-seulement pour elle-même, mais pour tout le nord de l’Europe. Plus d’une fois Genève a été les Thermopyles du protestantisme et de la liberté, courageusement défendues par une petite troupe de héros, qui n’était guère plus nombreuse, si on la oompare à ceux qui voulaient la détruire, que ne l’étaient, en présence des Perses, les trois cents hommes de Léonidas.  

  2. To omit Calvin from the forces of western evolution is to read history with one eye shut. — John Mor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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