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1차 전도 여행에서 배우는 교훈 (김홍전 박사)

김홍전 박사의 사도행전 강해 제 6권 제 1강에서는 바울의 1차 여행에서 얻는 교훈을 정리하고 있다:

  • 첫째, ‘어떤 방법으로 선교를 해 나갔는가?’
  • 둘째, ‘어떠한 능력이 그들의 뒤를 따랐는가?’
  • 셋째, ‘그 사람들의 경험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 넷째, ‘그들을 협박하고 위협했던 큰 위험이 무엇인가?’

일단은 유대교의 열혈분자들의 위협과 협박이 있었지만, 가장 큰 위험과 위협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김홍전 박사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지적하고 있다.

  • 끝으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태도 가운데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 내용이 매우 귀해서 여기에 다 옮겨 적어서 나누고 싶지만 그러면 저작권을 침해할 수 있으니 가능하면 요약을 하고 일부분만 인용을 한다. 정통과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전체에 흐르는 요지와 원칙들은 진보과 개혁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겠다. 우리 시대의 역사적 성격과 그 속에 처한 교회의 사명과 관해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아래 요약 가운데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모두 김홍전 박사의 사도행전 강해 제 6권 <이 믿음에 거하라> 제 1강: “복음을 바르고 깊이 있고 담대하게 선포함” (19–30쪽) 가운데서 발췌하였다. 나머지는 졸인의 요약으로서, 그 가운데 오류가 있다면 요약하는 사람의 잘못이리라.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위험

바울의 여행 가운데 먼저는 유대교의 열혈분자들의 위협과 협박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위험과 위협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것이었다. 숭배를 받는 나머지 하나님께 속한 영광이 사람에게 돌아간다면 그것은 무서운 일이 된다.

만일 사람들이 자기를 예배하는 것과 숭배하는 것과 신과 같이 여기는 것과 자기를 의지하는 것을 수락한다면 권세도 얻고 유명해지고 핍박이나 돌로 맞는 일이 있을 까닭이 없지만, 그런 것이 예언자에게는 가장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루가오니아에서 이 위협을 받았던 바울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통분히 여기고 옷을 찢었다. 그 사람들이야 무지와 몽매 가운데 그랬다고 하나, 무지와 몽매 가운데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한 사실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암매 가운데 행했다 할지라도 훼방한 것은 훼방이다. 바울은 그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의 교사들은 가운데 군중들이 자기를 우상화 하는 것을 단순한 존경이라고 여기는 잘못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도 하나님의 것을 찬탈하는 것에 동조하는 격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교회를 자기가 지키고 보존한다는 착각을 하기 쉽상이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지고 보전하셔서 진리가 수호해야할 교회인데도 자기가 일어나서 진리를 수호하는 것같이 생각하고 떠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지만, 진리는 그 자체가 진리인 것을 증명하고 진리가 우리를 보존하는 것이지, 우리가 진리를 보존하려고 나서는 것온 무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나 가르치는 것을 누가 박해하려 하고 그것을 훼파하려고 이론적으로 올 때 ‘그것을 이론적으로 막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단순히 ‘이론적으로 막겠다’ 하는 그 정도를 떠나서 ‘내가 신성한 진리를 수호한다’ 는 말을 거기에 붙이기 시작할 때에 무서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지킬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진리가 우리를 지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유 3)이라고 한 그 진리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의식과 태도는 꼭 필요하다. 진리를 교묘히 흐리는 것을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서 나를, 우리를, 교회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권세로만 가능한 것이다,

유혹이 교묘하게 와서 ‘그렇게 해도 훌륭한 교회이고, 이렇게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하고 마귀가 속삭일 때 그것을 따라 가지 않고 명확하게 자기를 지키는 태도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서서 ‘이 교회의 진리를 내가 지킨다’ 하고 떠들 때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히신 권위와 권세를 제 손으로 잡아 누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의 종들 가운데 ‘네가 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과 부패와 배교를 막아내거라’ 하신 일이 어디 있었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예언자가 있다면 그가 먼저 타락 가운데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 부패 하고 쓰러져 가는 교회를 누가 막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일어나서 다 시 일으켜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하고 용기를 북돋는 소리를 합니다. 애국론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은 의정 단상에서 ‘국가의 패퇴(敗頹) 앞에서 오늘날 누가 일어나서 감연(敢然)히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올바로 세우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서 용약 매진(勇躍邁進)하겠느냐’ 하는 소리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는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는 깃인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교회가 튼튼한 성곽과 같이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국 주님의 거룩하신 몸인 동시에 주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주님께서 그 총화(總和)가 되시는 까닭에 ‘내 주는 강한 성(城)이고 방패와 병기이시다. 내가 그 안에 튼튼히 지키심을 받는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지, ‘내가 이교회를 지켜서 교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고 폐퇴하지 않도록 하겠다’ 하는 것은 어림없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교회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가

교회로 서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너희가 한국 교회의 부패를 막거라’ 그런 명령을 받은 일이 없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감히 할 수도 없다.

옛날 이스라앨 백성들이 다 패퇴해 나갈때 ‘네가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신실한 남은 자들이 끝까지 남아 있어서 남은 그루터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다시 새싹이 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실한 ‘남은 자’로 사는 것, 남아서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남아있는 자답게 신실하게 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일어나서 감연히 교회의 부패와 타락과 쓰러지는 것을 올바로 건져 보겠다’ 할 때 그것이 자칫하면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상 어떤 사람이 부패한 교회률 세우거나 건졌습니까? 사가(史家)가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올 쓰셔서 교회를 올바로 세우셨다’ 하면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들을 세우셔서 결과적으로 교회의 부패를 방지하게도 하시고 교회를 타락하는 데에서 건져 내셔서 새롭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그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 자신이 ‘내가 하겠다’ 하고 나선 것은 아닙니다. ‘나는 신실히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나가겠다’ 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히 의지하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어디에 쓰시 든지 쓰시는 대로 나는 쓰임을 받을 뿐인 것입니다.

시대의 정신 혹은 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바닷물이 밀물 처럼 밀려 들어오는 것과 같다. 나 개인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군중이 맞서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과람(過濫)한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막아 내시는 것이고, 그랬을 때 거기에 사용 되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의 역할을 하고 가는 사람들이 허다히 많을 것이다.

그들은 가는 줄 모르게 갔고 하는 줄 모르게 실행을 했지만, 그럴지라도 그 사람들의 상(賞)은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다 인정하시지, 세상 사람이 지목하고 떠드는 사람만 인정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큰 계획과 경륜하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람 어느 누가 ‘내가 계획하고 내가 큰 이상을 세우고 내가 목표를 세운 다음에 나아가면 교회는 어떻게 된다’ 하는 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문제가 더 큰 문제이니까 우리 자신이 먼저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운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운동 자체가 사람의 것이 될뿐더러 자칫하면 큰 위험 가운데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대권에 속한 큰일을 내가 하는 것같이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타협을 용인하지 않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바울은 가는 곳 마다 검(劍)을 던져서 분열과 쟁론, 질시와 기쁨을 일으켰다. 이는 ‘내가 땅에 검을 던지러 왔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다 (마 10:34, 눅 12:51 참조). 이는 언제나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으로 들어가는 곳에 반드시 ‘예, 아니오’의 반응을 일으킨다.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복음에 접촉하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똑똑히 그 의미를 새겨 들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것을 받아들이던지 반대하던지 둘 중 하나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성신이 복음과 함께 늘 역사하는 큰 사실이 나타납니다. 복음에는 항상 소란을 일으키는 요소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복음은 타협지 않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모든 할 짓을 다해 가면서,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고 유리한 길을 다 취해 가면서 복음을 확호히 쥐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쥔 다음에는 […] 빛과 어두움을 합하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뒤섞어서 활동하지 않는 것이지, 세상에 붙은 욕심도 이루고 또한 일방 하나님 나라의 일도 한다고 하면서 나아가는 것은 가장 열악한 일이고 안 믿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랍은 믿음이 왔을 때 순수하게 나아가는 기능이나 있지만. 이미 믿음이 와서 고귀한 것이 들어갔는데도 반응이 전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움직이고 있다면 아무런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새 것에 새로 뿌리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문제가 있을 때 타협하고 나기는 것 같이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마귀가 가장 원하는 바이고 유혹하는 바입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서 광명한 천사인 체하면서 유혹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을 때 무슨 무슨 이유를 불여서 죄 가운데, 혹은 세속적인 것 가운데, 이 세상의 거대한 사실 가운데, 그것도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움직이는 혼탁한 바빌론적인 요소 가운데 그냥 따라 들어가는 이런 괴상한 짓을 하는데 그런 것이 참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짓은 복음의 무타협성을 참으로 받아들인 사람다운 생활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당신의 그릇이요 시대의 선지자로 세우시지도 아니할뿐더러, 언젠가는 자기가 이렇게 타협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패역스러운 일이 되는가 하는 중요한 교훈을 배우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교훈도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사람에게 내리시는 것이지, 그렇지도 못한 사람은 그 몽매(豪味) 가운데 내던져 두셔서 자기의 상실한 마음 가운데 방황하다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춰 우리가 이미 지나왔고 또 지나가고 있는 역사 시기의 성격을 보자. ‘그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다'(살후 2:3)고 하신 말씀에서 언급하는 배도 혹은 배교(apostasy)는 그것이 시대의 표적이 될 만큼 현저한 역사적 현상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해 왔고 또 목도하고 있는 바 세계의 교회가 진리와 비진리의 혼탁 가운데로 바다의 조류에 휩쓸리듯 들어가듯 형국은 2000년 가까이 되는 기독교회의 역사 가운데 보지 못한 현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일 처럼 생각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너회가 천기(天氣)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表蹟)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고 명료하게 말씀하셨는데도 왜 이 시대적인 증상에 대해서는 전연 맹목이 되어 버리고 ‘나는 어립니다. 나는 모릅니다’ 하고 덮어 놓아두고서는 그대로 주저않자 있는 것입니까? 그러고서는 교회를 지도하겠다고 나설 때 무서운 악영향을 교도(敎徒)들에게 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시대적 증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일까? 복음이란 언제든지 타협이 없다는 것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다. 진리의 문제를 놓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태도가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사실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약 4:4 참조). 하지만 시험은 무엇이 정확하고 바른 것인지 흐리는 형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랬을 때 바르지 못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대세를 좇아간다든가 혹은 자신이 뜻하는 바에 유리하다든가 하는 공리적(功利的)인 동기들이 자기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이리 가더라도 구원의 도리는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이론을 빈약하게나마 붙인다. ‘무엇이 진리냐?’를 파지 않고 ‘무엇이 유리하냐?’를 따지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로 교회에 분란이 있을 때에 서로 정통이요 보수라고 대립하는 사람들의 동기가 그러면 순수하냐 하면 많은 경우 거기에도 불순이 섞여 있음을 본다. 독단과 독선, 그리고 자기의 약점을 간과하는 허점 뿐만 아니라, 권력에 대한 욕망(lust)이 또 한 편에서 작용한다. 그 와중에 또 한 편에서는 ‘그러는 너희들을 보니 잘 믿는다고 할 것 없다. 이렇게 해도 너희들 보다 못 믿는 것 아니다’ 하면서 당면한 문제 가운데 있는 마귀의 궤계와 미혹을 자세히 분해하여 간파하지 않고 그냥 도매금으로 넘기려는 태도를 취하는 무리도 나타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이리로 간다고 해서 구원이 없겠느냐?’ 하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주의할 것은 독선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옳다, 자기는 모든 것을 선하게 한다 하는 것은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고 공리적인 동기하에서 이 세상의 대세를 따라 가면서도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여기도 구원이 있다’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입니다. 그것은 더 무서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세상적이라는 성격이 있는데도 세상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를 맺자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길을 추호(秋毫)라도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될 길을 취하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무슨 표를 붙인 것이 아닙니다. 거기도 큰 이름을 가지고 구원을 말하고 신앙을 말하고 정통을 말하고 보수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내부에 있는 혼탁성이 하 나님과 원수가 되게 만들어 나가는 큰 작용을 늘 하는 것입니다 호리지차(毫釐之差)가 나중에는 천리지차(千里之差)로 변하는 것을 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에는 그러한 일이 과거의 역사상에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비슷한 것 같지만 나중에 갈라진 후에 보면 호리지차가 천리지차가 되고, 처음에 가지거나 대표하고 있던 성격을 나중에 분명히 드러내고 맙니다. 불가부득(不可不得)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시대가 가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성격을 드러내고 맙니다. 역사는 늘 그것올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그런 타협을 하도록 교육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라. 이것이 진리이다’ 해서 그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은 일이 있다면 박해를 받든지 진리를 포기하든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사람들이 진리도 받고 과거에 가지고 있던 전통 가운데에서도 그냥 사는 그 두 가지를 다 하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죄에 대하여 조금도 부드려울 수가 없고 관용할 수가 없고 철두철미하게 냉철하게 늘 비판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생활 가운데 마귀의 요소가 있고 마귀의 시험의 유혹이 들어올 때에는 그것을 철두철미하게 축출하려는 것이 복음의 진정한 태도입니다. 만일 그렇게 축출하려는 것을 조금이라도 반대하고 유혹을 그냥 용인할 때는 벌써 복음이 복음으로서의 특성을 잃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thoughts on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에서 배우는 교훈 (김홍전 박사)

  1. 현재 한국의 비대 불감증,
    부패상이 우리가 이단이라 칭하는 소수의 무리가 영향을 준것은 미미할 정도라고 사료됩니다
    가장큰 요인은 대다수 교역자분들의 무지와 책임 소홀로서 교단이 책임을 비켜갈 수가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크리스챤들의 세상 계혁 부분을 논하시는 관점에 대하여는 바울 당대에 거의 모든사람이 그리스도인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당대 그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대로 신사적으로 받아 욕심을 버리고 이 세상에 있는것과 이세상을 버리고(욕심 돈 지위 명예) 순종의 길을 택한 결과의 산물이었으며

    만약 지금이라도 전세계의 그리스찬들 10/1 아니 100/1 들만이라도 자신들이 아는 말씀을 지켜 순종하려 치심한다면 소돔과 노아의 때와 같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사료 되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제가 본 인류 신학의 역사는 현재 성경의 답을 제시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Leave a Reply (남기신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다만 신원이 불명확한 의견은 게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