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적 진화론과 창조과학회의 충돌

근래에 뉴스엔조이에서 연소(年少)지구론연로(年老)지구론에 대한 기획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창조과학회’와 ‘유신론적 진화론’ 사이의 갈등을 다룬 기사이다.

여기서 창조과학회로 대변되는 의견은, 창세기 1장이 묘사하는 창조가 우리가 알고 있는 6일이라는 시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며, 지구의 (우주의) 역사도 길어야 1만 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은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각각 138억년 그리고 45억년 정도 되었다는 과학계의 정설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다윈주의적(neo-Darwinian)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인류 발생의 역사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방법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두 진영 사이의 대립이 겉으로는 과학에 대한 논쟁처럼 보이나, 실상 신학적인 논쟁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유신론적 진화론 쪽에서는 과학계의 정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기반해서 성경을 바라다 보고 있다. 창조과학회 쪽에서도 자신들이 하는 주장의 근거가 (뉴스엔조이에 실린 글에서 보면)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창조과학회와 유신론적 진화론 사이의 갈등은 그 핵심에서 신학적이다.

그랬을 때 분명히 할 것은 양쪽 다 상당히 극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진영 모두 자신들의 주장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는듯 이야기 하지만, 사실 문제가 많이 있다.

창조과학회는 마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자신들의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는 대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창세기 1장의 ‘날'(יום)이 24시간이 아닌 훨씬 긴 기간일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을 언급하겠다: 핫지(C. Hodge), 워필드(B.B. Warfield), 그리고 메이천(J.G. Machen)이다. 쉐퍼(F. Schaeffer)도 그러한 생각을 했던 신학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에 비해 유신론적 진화론은 어떤가. 뉴스엔조이에 글을 쓴 우종학의 시각은 유신론적 진화론 가운데서도 전투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우종학은 자연계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물리법칙에 따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알아서 운행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종종 추천하는 책 <Origins>를1 쓴 하아스마(D. Haarsma) 교수는 그렇게 까지 말하지 않고 자연계의 운행이 하나님의 신적인 통치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2 자연계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속성에 의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이신론의 자연관으로서, 이러한 시각은 결코 역사적인 유대-기독교 신관과 자연관이 아니다. 게다가 빅뱅 이후 지금까지의 온 우주의 역사가 곧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이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창조를 하고 계시다는 우종학의 주장은 ‘창조’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신다윈주의의 무신론적 성격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런 유신론은 역사적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신론도 아니다.

창조과학회와 유신론적 진화론의 대립은 결국 한쪽은 신학적 신념을 가지고 과학적 사실들을 부인하려고 하고, 다른 쪽은 과학적 신념으로 신학적 사실들을 부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진영 다 왜곡된 신학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는 배 다른 형제들 같다. 서로 기독교의 맏아들로 인정 받고 싶어서 반목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 졸인은 좀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 양쪽 다 왜 그토록 성경과 과학을 접목시키겠다고 “애를 쓰는” 것일까. 독자들께서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어떤 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혹은 과학과 종교도 끝에 가서 만난다는 식의 허공에 뜬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리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 아닌가?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은 벌써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징후 아닌가? 신학 혹은 과학이 “쉽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신학이든 과학이든 이론이 억지스러워서는 안 된다.

차라리 만일 성경의 가장 평명한 증언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성경은 틀렸고 기독교는 거짓의 종교라는 단호하면서 호방한 태도를 보고 싶다. (죽은 자가 다시 육체를 입고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기독교인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바울의 태도처럼.3 ) 과학의 여러가지 합리적인 이론들 앞에서, 굳이 그것들을 외면하면서 성경을 자기식대로 붙들고 있는 것이나, 반대로 그 과학의 이론들에 맞춰보려고 굳이 성경을 신화네 뭐네 하면서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나, 자기가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누린 정신적 혹은 사회적 비익을 잃어버리는 것을 상상하기가 두려운 심정에 어떡해서든 기독교인의 지위를 유지해보겠다는 비겁한 태도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유명했던 무신론자인 힛친스(C. Hitchens)의 부고를 예전에 접했을 때, 그가 기독교를 많이 공격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호기(豪氣)를 추억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기독교인들이 제법 있었다. 힛친스와 그런 태도는 차라리 솔직한 면이라도 있다.

예를 들어, 뉴스엔조이에 올라온 우종학의 글을 보면 그의 다른 글들에서도 단골처럼 등장하는 이야기 — ‘하나님의 창조는 창세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졸인이 예전에 우종학 교수에게도 말한 적이 있는데)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사건들을 언급하는 경우 외에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 품으신 물리의 법칙에 따라 자연계를 운행하시는 일들을 놓고 ‘창조’라는 표현을 쓰는 용례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별이 물리법칙에 의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도 “창조”라고 굳이 창조의 뜻을 (은밀히) 재정의하면서까지 성경을 붙드는 것은 억지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위한 봉사가 되기는 커녕 배반이다. 물론 뉴스엔조이에 올라온 창조과학회의 글에서도 억지를 찾을 수 있다.

양쪽 모두 성경과 과학의 조화를 꾀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마땅하다. 참으로 기독교적 사상을 포회한다면 복음과 지성의 조화를 꾀한다는 생각이 벌써 괴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과 지성의 조화를 위한 노력이 참으로 필요하다면, 자기 생각 가운데 버려야 할 것이 없는지 돌이켜 보거나, 없다면 기독교를 버리면 된다. 옛 연인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낌새를 챘으면 가능한 빨리 헤어져야지, 질질 끄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1. 이 책의 부제는 ‘창조, 설계, 진화에 대한 개혁주의적 시각’인데, 사실 그 내용은 정확히 개혁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2.  “[W]e affirm natural processes as divinely governed.” 출처: http://biologos.org/blog/reviewing-darwins-doubt-conclusion  

  3.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 고전 15:19  

5 thoughts on “유신론적 진화론과 창조과학회의 충돌

  1. 생명공학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인입니다. 성경과 과학의 조화를 꾀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마땅하다고 하셨는데, 그 의미를 명확하게 듣고 싶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읽고 들을 때, 과학적 진리를 대입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과학적 사실과 상충되는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휘튼칼리지의 존 왈튼의 경우, 창세기에 사용된 “창조하다”라는 의미는 고대의 개념으로 보면, 만들어 낸다는 의미가 아닌, 기능을 부여한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분 세미나에 갔었는데, 창조하다라는 고대 용례를 분석한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담을 진흙(빚어 만들 수 있는 개념)이 아닌 먼지로 만들었다는 것은 더더욱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성경과 과학의 조화를 꾀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마땅하다고 하셨는데, 그 의미를 명확하게 듣고 싶습니다.

      “조화를 꾀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마땅하다”의 상세한 의미는 본문 8-9 문단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편의상 우리가 과학적 진리 혹은 종교적인 진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하나, 진리는 진리일 뿐이지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기독교회는 명확하게 부활과 승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부활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일어났기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과학적 진리의 영역과 종교적 진리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과학적 역사와 종교적 역사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이 말은 진리에 모순이 없음을 내포합니다. 즉 변증법(dialectics)에서 말하듯 진리는 모순적으로 나타난다는 궤변을 늘어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일상적으로 우주를 운행하시는 일반법 (즉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물리법칙) 상위의 특별법을 두고 일으키신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일개 인간 사회에서도 한시적으로 특별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기도 하는데, 특별법이 일반법 아래서 행하지 못하던 기능을 발휘한다고 하여 두 법이 서로 상충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통치에 본질적인 상충 혹은 모순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과학을 바르게 이해하였다면 애초에 조화를 꾀하여야겠다는 문제가 존재하지를 않는다는 것이 “성경과 과학의 조화를 꾀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마땅하다”고 한 제 말의 의미입니다.

      사족을 달자면 저는 과학의 발달이 역사적인 신앙고백에 참된 도전을 보인 일이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다윈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이론을 수정/보완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럴 때마다 조금씩 성경의 기록에 가까워졌지 더 멀어진 일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실상 자신들을 증명하기 위해 분주했던 것은 다윈주의자들이었지, 역사적인 기독교회는 늘 느긋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데도 마치 역사적인 신앙고백이 과학에 의해 진정한 도전을 받고 있는듯 표현하는 것이 어떤 부류들의 특징이지요.

      > 성경의 진리를 읽고 들을 때, 과학적 진리를 대입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과학적 사실과 상충되는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고민이 안 생길 수는 없겠지요. 다만,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 사이에 상충 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 사이에 진정한 모순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학 혹은 종교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결핍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결핍의 요소들을 찾으려 고민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할만한 일이지요.

      다만, 그 고민의 과정에서 억지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억지를 부리는 대표적인 예가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과학과 종교 사이에 모순이 없음을 보이려 한 결과 (특히 과학기술 문명의 세력에 굴복하여) 부활, 동정녀 탄생 등과 같은 개념들을 역사적인 신앙고백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재정의합니다. (역사적인 고백을 역사적인 의미와 분리시키니까 억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우종학 씨가 말하는 “창조”도 그렇고요.

      진리는 억지스러워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렇게 역사적인 신앙고백의 의미를 재정의하면서까지 억지로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꾀할 바에는 역사적인 기독교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고 봅니다. 아니–오히려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정신을 따르면–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틀렸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가 상충한다면, 그런 상충을 어떻게 해소해보려는 것은 기독교를 위한 것도 진리를 위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기독교를 부인함으로써 자기가 지금까지 누려온 기독종교인으로서의 비익을 잃는 두려움 가운데 행하는 비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 휘튼칼리지의 존 왈튼의 경우, 창세기에 사용된 “창조하다”라는 의미는 고대의 개념으로 보면, 만들어 낸다는 의미가 아닌, 기능을 부여한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분 세미나에 갔었는데, 창조하다라는 고대 용례를 분석한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담을 진흙(빚어 만들 수 있는 개념)이 아닌 먼지로 만들었다는 것은 더더욱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딱히 좋은 의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때 블로그에 적던지 하겠습니다.

      방문해주시고 의견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짧게 말하자면, 성경에 과학법칙에 맞지 않아 보이는 기록을 하나님의 기적/특별한 운영으로 믿고 대신 과학법칙이 틀렸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신 것 같습니다. 반면, 창조과학 쪽 입장은 하나님의 기적을 과학법칙에 끼어 맞추려는 시도이고, 유신론적 진화론은 과학법칙을 하나님의 기적에 끼어 맞추려는 식의 시도라는 입장으로 이해했습니다.
        저는 과학이란 자연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위해, 체계성을 갖춘 지배 이론/가설을 성립해 가는 인간 활동이라 이해합니다. 이와는 달리, 저의 신앙(또는 신학?)은 나의 정체성과 본질(더 나아가 모든 것)의 이해를 위한 것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그 답을 얻어가는 인간 활동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영역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쓰신 글을 읽으니 제가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장하석 교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소위 truth라는 말을 할 때, 진리, 진실, 진상의 세 의미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진리란 그야 말로 어떤 절대적 진리, 그리고, 진실은 보통 경험자의 증언, 그리고, 진상은 실제 일어난/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경은 진실을 통해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이 진상을 담고 있느냐에 대해 입장차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제가 이해력이 부족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쓰신 글을 통해 사고 훈련을 더 해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 남기신 의견 잘 보았습니다. 제 생각을 조금 나누자면 이렇습니다:

          > 저는 과학이란 자연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위해, 체계성을 갖춘 지배 이론/가설을 성립해 가는 인간 활동이라 이해합니다. 이와는 달리, 저의 신앙(또는 신학?)은 나의 정체성과 본질(더 나아가 모든 것)의 이해를 위한 것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그 답을 얻어가는 인간 활동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학과 신학은 서로 다른 영역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쓰신 글을 읽으니 제가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다른 “영역”이라는 말 보다는 “일차적 목표”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일차적 목표를 넘어서 궁극적 목표는 과학이든 신학이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차적으로 과학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신학은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지만, 물리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는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세계의 일부분이고, 두 세계는 분리 되어 있지 않고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 분 하나님의 품에서 나오는 일관성이 자리하고 있지 상충되는 진실 혹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적인 기독교 세계관, 신관, 및 자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울러, 장하석 교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소위 truth라는 말을 할 때, 진리, 진실, 진상의 세 의미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진리란 그야 말로 어떤 절대적 진리, 그리고, 진실은 보통 경험자의 증언, 그리고, 진상은 실제 일어난/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경은 진실을 통해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이 진상을 담고 있느냐에 대해 입장차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역사적인 신앙고백은 성경에 기록된 증언들이 진상을 담고 있다고 믿지요. 하지만 소위 기독교 신학자라는 사람들 가운데 성경 기록의 바탕이 되는 증언들이 꼭 진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윗 왕조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까지 말하지요. 그런데 고고학의 발견들은 늘 성경의 기록들을 더 뒷받침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지,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 올린 댓글에서 다윈주의자들에게 대하여 쓴 것과 비슷하게, 성경의 사실성이 심각하게 도전 받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길 좋아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실상은 역사적인 기독교회가 느긋한 반면 성경의 사실성을 의문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타당함을 증명하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시간 내서 의견 남겨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생각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고 더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들도 있습니다. 쓰신 글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많이 써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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