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상을 메고 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쉬울까? […]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아라. 너희는 내가 사죄하는 말을 했다고 한 분 하나님 이외에 사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따지는데, 이 두 말이 다 어려우면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실증을 받을 수 있는 물리적인 결과를 내는 말을 겸해서 해버리면 먼저 말도 효과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물리적인 아무런 실증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그것을 말했다면 그 다음 말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 말도 진실이라고 확증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속은 볼 수 없으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밖에 보여 줄 수 없지 않느냐? 보이는 것으로써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려 줄 것이니 자, 보아라. 그리고 환자를 향하여 일어나서 상을 메고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환자가 두말 할 것 없이 벌떡 일어나 가지고 상을 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마 예수님 앞에 절을 한 번 했을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가라는 대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너무나 압도되어서 ‘놀랐다’고 했습니다. 또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아, 이것 큰 일이구나. 이런 무서운 분 앞에 우리가 있구나.’ 요컨대 신위(神威),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능력의 발휘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인간들은 자연히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알아보려고 왔던 서기관들도 다 압도당해서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나갔습니다. 거기에 다시 두말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이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말이 진실이고 권위가 있다면 둘째의 말도 그러하다. 둘 다 어려운 말인데 그 어려운 말을 마음대로 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인가 너희가 다시 생각해 보아라. 궁극적으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생각에 하나님 이외에 사죄하는 이가 없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죄하는 권위를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셨다면, 곧 그것이 하나님의 독담(獨擔)의, 전담의 대권[prerogative]이라 할 것 같으면, 여기서 그렇게 사죄를 하는 이가 누구이겠느냐? 이에 따라 그들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이다 , 아니면 적어도 예수께는 신성이 있다 하는 것을 승인하는 데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사고가 깊고 신중한 사람들은 돌아가서 그렇게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 그분에게 신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사실상 예수님은 당신에게 신성이 있다는 것을 결국 제3년에 가서 알려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이제부터 훈련을 받아서 결국 그런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 가지고 있던 메시야는 사람이다 하는 완고한 사상과 거기서 나온 그릇된 메시아관을 깨우쳐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릇된 메시아관의 미망 가운데 방황하더라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아요, 동시에 신이시다” 하는 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주시요,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을 믿어야 이 다음에 십자가도 그것이 공효 있는 것임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그 사람들의 메시야 사상을 뒤집어서 고쳐 놓기 위해서 주께서는 때때로 필요한 일들을 하셨고 또 그뿐 아니라 거기서 점진적으로 주께서 신(神)이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김홍전, “예수님의 행적 2”, 167-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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