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장

(알림: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한 로마서 공부의 짤막한 기록입니다.)

4절: “The meaning of the word [end] depends on what is connected with it. The end of evils, or of life, is their termination; the end of a promise is its fulfillment; the end of a command, its performance or obedience; the end of faith is salvation. In such instances, the general idea is the result, or the effect, or the consequence. Now the law may be viewed as an economy, comprising the whole Jewish law, not perfect, but introductory; in this view Christ may be said to be its end — its perfection or “its landing place.” But we may also regard the law in its moral character, as the rule and condition of life; then the end of the law is its fulfillment, the performance of what it requires to attain life: and Christ in this respect is its end, having rendered to it perfect obedience. This last meaning is most consistent with the words which follow, and with the Apostle’s argument. The first view is taken by Chrysostom, Beza, Turrettin, as well as Calvin; the second, by Mede, Stuart, and Chalmers. There is really not much difference in the two views; only the sequel of the verse, “for righteousness to every one who believes,” and the opposite sentiment in the next verse, “the man who doeth these shall live in (or through) them,” seem to favor the latter view.” —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5-8 절: 모세는 율법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였다 (5절).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전한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킴을 통해서 얻는 의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했다고 사도는 6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된 말씀은 신명기 30장 11–14절을 빌려 온 것이다. 거기를 보면 모세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라고 말한다. ‘이 명령’이란 무엇인가? 결국 율법이 전체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 율법 곳곳에 산재해 있는 복음의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것을 최종적으로 요구한다. 당장 같은 신명기 30장 6절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즉, 생명을 얻게 하는 마음의 할례는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모세는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우리의 의가 누더기 옷과 같다는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더하여 볼 때, 여기서 모세가 말하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일 수 밖에 없다고 사도는 증거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단으로 결코 주신 것이 아니다. 의를 사랑하며, 동시에 의에 다다르지 못한 자신을 보며 그리스도께 피하도록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으라는 것이며,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속하실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은 곧 복음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는 모세가 “바다”라고 표현한 것을 “무저갱”이라고 바꾸어 말했는데, 그는 모세가 말하고자 한 의도를 파악한 것이며, 이는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나오는 “바다”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재료를 준다.)

“Christ’s ascension into heaven ought indeed fully to confirm our faith as to eternal life; for he in a manner removes Christ himself from the possession of heaven, who doubts whether the inheritance of heaven is prepared for the faithful, in whose name, and on whose account he has entered thither. Since in like manner he underwent the horrors of hell to deliver us from them, to doubt whether the faithful are still exposed to this misery, is to render void, and, as it were, to deny his death.” (Calvin, Commentary on Romans)

8절에서 사도는 다시 한 번 모세가 말한 ‘말씀’은 믿음의 말씀임을 재언급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전파한다고 말함으로써 모세가 전한 말씀이 복음의 말씀임을 강조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의 주어는 6절에서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다. 복음의 말씀은 이렇게 가깝게 우리를 초청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에게 구원의 분명한 길을 보여 줌과 동시에 말씀 밖에서 무엇을 찾아서는 안 됨을 보여주고 있다.

9-10절: 9절에서 말한 바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은, 바로 전 절에서 인용한 모세의 말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에서 나타난 순서를 적용한 것이다. 이처럼 표면적인 것을 먼저 언급하고 더 깊이 감추어진 것을 나중에 이야기 하는 것은 성경에서 종종 나타나는 서술법이다. 물론 논리적인 순서는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그 논리적인 순서를 10절에서 적용하고 있다. 10절에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구원의 완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데에 이른다는 것이지, 구원의 시작일 수는 없다; 왜냐면 구원의 시작에 해당하는 칭의는 마음으로 믿을 때라고 이미 적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총쳬적인 것으로서, 마음에서 시작에 입으로 시인하는 열매까지 맺게 하신다.

“But let them see what answer they can give to Paul, who at this day proudly boast of some sort of imaginary faith, which, being content with the secrecy of the heart, neglect the confession of the mouth, as a matter superfluous and vain; for it is extremely puerile to say, that there is fire, when there is neither flame nor heat.”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1-13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요엘 2장 32절 말씀을 인용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바울은, 요엘서의 말씀을 온 인류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적용 시키고 있다.

14-15절: 그러므로 이방인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요, 믿은 것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요, 들은 것은 전파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물론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반적인 방법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 역시 하나님 나라에 초청을 받았으며, 또한 바울의 이방인을 향한 소명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라는 증거를 바울은 역설(力設)하는 것이다.

“This passage is taken from Isaiah 52:7. This is a striking instance that the Apostle quotes not from the Septuagint, when that version materially departs from the Hebrew, as is the case here. Though it appears to be a version of his own, he yet gives not the original literally, but accommodates it to his own purpose: he leaves out “on the mountains,” and adopts the plural number instead of the singular, both as to the participle “announcing” or evangelizing, and as to the word “good.” The words peace, good, and salvation, in Hebrew, seem to refer to the same thing, according to the usual style of the Prophets.
The words of Paul, as rendered by Calvin, coincide more with the Hebrew, than as they are rendered in our common version. The verb εὐαγγελίζω, is often used simply in the sense of announcing, publishing, declaring or preaching, as in Luke 3:18; 4:43; Acts 5:42, etc.; and in this sense it exactly corresponds with בשר, which means the same, though the other idea of the Greek verb, that of evangelizing, has been wrongly given to it; for it is applied to the announcing of bad as well as of good news.”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16절: 그러나 역으로 말씀을 들은 것이 곧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님을 바울은 상기시키고 있다. 이사야서 53장 1절의 인용이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는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고 묻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역사해야 믿음이 생김을 이사야 선지자도 증거하고 있다.

17절: 17절 이후는 14-16절의 부연으로 볼 수 있다. 확실한 증거를 위해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작으로서 17절은 14-16절의 요약이자 요점이다; 즉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택하심이 임한 증거이다.

18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는 것은 바울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그들”은 이방인을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지 아니하였잖은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인용한 말씀은 시편 19편 4절이다. 이 시편 말씀은 실상 일반 계시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상 바울 만이 이방인으로 가야할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필요를 깨달은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19절: 이번에는 바울이 묻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스라엘이”, 즉 구약의 교회가, “알지 못하였는가?” 아니다! 모세가 친히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향해 손을 펴실 것임을 전했다. 인용된 말씀은 신명기 32장 21절이다.

20절: 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더 강하게 얘기하였다. 이사야 65장 1절 말씀이다.

21절: 이사야 65장 2절의 인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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