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앞서 9장에서 보았듯이, 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장 16절)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로마서 9장 6–8절)

우리 주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3장 9절)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는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을 바울이 언급할 경우엔 문맥상 과거의 이스라엘 국가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약을 넘어 신약까지 포괄 되는 내용에 대하여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는 유대 민족이 아닌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뜻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절: 그렇다고 구약 교회의 주된 구성원이었던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버림을 받은 것이냐; 그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깨지지 않음을 위해서도 중요한 사실이다.

2–5절: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는 있다.

2절에서 “미리 아신”이란 것은 “미리 보신”이 아니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면 5-6절에서 그 선택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8-10절: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찾아가 문맥을 보면,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한 구절들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과 연관 짓고 있다. 이것은 논리적인 오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받는 심판의 근접적인 이유는 그들의 범죄이지만, 그런 상태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8절은 이사야 29장 6절, 6장 9절, 그리고 신명기 29장 4절을 종합한 것이다. 이 말씀들이 기술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까지” 계속 되고 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뿐만 아니라 부활 이후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11절: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유대인 개개인이 아닌 구약 교회 곧 이스라엘 국가를 집합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즉, 사도의 질문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 구원 받을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넘어졌는가?”이다. 이에 대해 사도는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13–14절: 이 부분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을 앞부분에 연결시켜 읽는다면 13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이방인이 사도니까,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그러지 않고 뒷부분과 연결시켜 읽는다면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14절,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역한 결과 유대인 중 몇몇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 역시 나(바울)의 사명에 큰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15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을 최후의 부활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문맥과 너무 떨어진 해석이다. 유대인들의 부흥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온 것과 같은 큰 기쁨이라는 것을 여기서는 말할 뿐이다.


16–19절: 11장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어떻게 해서 이방인들이 언약의 백성 곧 교회 가운데 들어오게 되고 본래 다수를 차지하던 유대인들이 교회 가운데서 소수가 되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우리가 이미 봤듯이 사도는 개인의 구원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라는 거시적 단위를 논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로서 언약 공동체가 거룩하다는 것은 그 도덕적 성격이 거룩하다기 보다는 구별 되었다는 의미가 강하다. 예컨데 16절의 곡식 가루와 떡덩이가 거룩하다는 것도 그 떡덩이 자체의 성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용도에서 구별 되어 제사를 위해 따로 떼어 놨다는 의미이다.

마찬 가지로 여기서 나무가 거룩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이지, 우리가 실제로 아무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11장 전체에 걸쳐 사도는 교회, 곧 언약의 공동체라는 거시적 단위를 논하고 있지, 개인의 구원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24절에 원가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만일 이것을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려 한다면, 유대인들은 날 때 부터 예수님과 연합되었고, 이방인은 그 반대라는 주장 밖에 더 되겠는가? 이는 로마서 1-2장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내용과 어긋난다.

이상의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17-19절의 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고 개인의 구원 문제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해이다.

오히려 여기서의 나무는 교회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family-tree”의 개념을 빌리자면, 아브라함의 집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뿌리”는 아브라함, 아니면 차라리 “구약의 교회”라고 이해함이 마땅하다. 이는 우리가 9–11장의 주된 논지와도 부합한다. 그 논지가 무엇인지는 9장 초반에 공부한 바 있다.

20–21절: 혹 이 부분을 읽고 개인에게 잘못 적용한 나머지 의롭다하심을 얻고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은 지금 까지 로마서 1-8에서 사도가 철두철미하게 논증한 것을 다시 상고할 필요가 있다; 예컨데 한 번 칭의를 얻으면 버림은 커녕 오히려 더욱 구원의 은혜를 맛본다는 5장 9-10절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11장에 대한 잘못된 이론들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위에서 공부한 것을 강조하지만, 여기서 나무를 통해 비유하고자 함은 눈에 보이는 교회에 대한 것이며, 20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표방하는 믿음”을 의미한다. 표방하는 믿음과 마음으로 믿음의 차이, 그리고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차이에 대해 John Owen은 Calvin의 로마서 주석에 다음과 같은 꼬리말을 달았다:

He speaks not of individuals, but of the Gentile world, not of living faith but of professed faith, not the inward change, but of outward privileges, not of the union of the soul to Christ, but of union with his Church. The two things are wholly different; and to draw an argument from the one to the other is altogether illegitimate; that is to say, that as professed faith may be lost, therefore living faith may be lost. —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이방인들 자체에 무슨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지 못하는 상태를 생각하면 두려운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로 인해 더욱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20절에서 “두려워하라”고 하였다.

22절: 보이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논의는 계속 되고 있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고 했는데, 이는 명문 그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는 사람들의 자태가 어떠한지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지, 그러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둘은 논리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비슷한 예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구원의 신앙을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은혜를 입은 자들이 믿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구원의 시작 부터 마침 까지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바울은 이미 로마서 3–8장을 통해 논증했다.

어쨌든 여기서 “찍힌다”는 것도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거시적 단위에서, 특히 그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의 집합을 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이지, 신자들 개개인의 구원의 사실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구약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개개인의 구원을 이야기 함이 아니다.

25–27절: 이렇게 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까지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유대인들이 오히려 소수가 되고, 이방인들이 대다수를 형성하게 된 것, 이것은 “신비” 곧,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유대인들과 이방인을 동시에 부흥시키지 아니하시고 ‘유대인들의 어두어짐’이라는 경로를 통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셨는지, 왜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분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지 인간의 눈으로는 참으로 이해가 불가능하다.

26절 문두의 “그리하여”를 “그런 뒤에”라고 바꾸어 읽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영어로는 “And so”라고 번역 되었는데, 이를 “And then”이라고 바꾸면 안 된다는 것이다. 원문의 “καὶ οὕτως”는 “And in this manner”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25절과 연결해서 읽으면 다음과 같이 풀어서 말할 수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똑똑해서 믿었다’는 식의 교만한 마음을, 우쭐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 때문에 된 일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가득히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게 하시는 역사를 펼치시면서 유대인들의 일부를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런 방식을 택하셨는지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선지자가 옛적에 야곱의 집에 베푸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말한 것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이사야 59장 20절을 인용하고 있다. 물론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에 기록된 야곱 곧 이스라엘은 영적인 의미로 읽어야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장 16절)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로마서 9장 6–8절) 물론 예수님께서도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3장 9절). 과연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자 구원의 언약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에 대해 베드로는 말하길,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며 (사도행전 2:38–39)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방인들도 이 언약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26절에 말하려는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참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그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실 것이라는 은혜의 언약을 언급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신비로운 방식을 통하여 유대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이방인들까지, 야곱의 장막 아래 있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와는 달리 26절의 “그리하여”를 “그런 뒤에”라고 잘못 읽고 ‘온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국가 전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특히 세대주의자들 가운데서 — 마치 주의 재림이 가까이 올 때 유대인들 전부가 복음을 믿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엄연히 잘못된 해석이다. ‘이스라엘 국가 전부’라는 개념은 모호한 개념이다; 그럼 그 때 이스라엘 국적을 갖고 있고 유전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포함 되는가? 유전적으로 순수한 유대인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오늘날엔 확인할 방법도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인가? 그러나 혈통적으로 유대 민족과 연결 되었다는 것을 중시하는 것을 성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6–8)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9)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롬 9:27).

방금 언급한 로마서 9장 27절의 말씀 때문에 ‘온 이스라엘’을 ‘유대인 중 남은 자 전부’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를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참된 이스라엘 전부’라고 해석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더 조화롭다고 생각한다.

26절에 인용된 이사야 말씀은 영어 번역이나 한글개역본과 조금 다른데, 이에 대해 칼빈 주석 영어 번역본의 편집자인 John Owen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고 있다:

There is more discrepancy in this reference than any we have met with. The Apostle follows not literally either the Hebrew or the Septuagint, though the latter more than the former. In the Hebrew, it is, “to Sion,” לציון, and in the Septuagint, “for the sake of Sion,” ἕνεκεν Σιών. Then the following clause is given verbatim from the Septuagint, and differs materially from the Hebrew, at least as translated in our version. The Syriac and Chaldee give the verb a causative meaning, so as to make the sense the same as here. But it may be regarded as an infinitive with a pargogic י, and in a transitive sense, which it sometimes has. See 1 Kings 2:16; Psalm 132:10. If so, the verse will agree with the Apostle’s words, and may be thus rendered, —

  • Come to Sion shall a deliverer,
  • And to turn away the ungodliness that is in Jacob.

He shall come to Sion, and shall come “to turn away,” etc.; or the ו may be rendered even, “Even to turn away,” etc. This rendering corresponds more than that of our version with the substance of the verse which follows.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바울이 27절 끝에 첨언한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는 예레미아 31장 33절의 인용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8장 10절에도 인용 되었다.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부분을 이사야 27장 9절의 인용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히브리 사본을 보면 형태가 다르다. 따라서 27절을 예레미아 31:33절의 축약/인용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28–29절: 29절에서 사도가 언급하는 “부르심”은 ‘구원의 예정’이 아니라 옛적에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부르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11장 전체가 개인의 구원이 아닌 종족들을 단위로 한 하나님의 은혜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이것을 28절과 연계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비록 유대인들이 하나의 집합으로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애초에 아브라함의 장막을 택하신 그 은혜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고 유대인 중에도 남은 자들(로마서 9:27; 11:7)이 있음을 상기시키려 함이다.

33절: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 주신 것 외에는 우리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34절: 하나님은 (그 분이 조금이라도 당신에 대한 것을 알리지 않으시는 한)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그런 하나님을 사람이 논한다는 것이 외람된 일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로서는 그 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배우고 공부하는 것 외에 없다.

35절: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 도대체 누가 하나님께 받지 않고 무엇을 드린단 말인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고린도전서 4:7)

2 Comments

  • Sueya Frost

    please let me know if you have the remaining chapters for Romans.
    Thanks for the information.

    In Christ,
    Sueya Frost

    • hun

      I am glad if these notes were helpful to you. I have been postponing this project for a while. But, Lord willing, I will come back and finish it; resuming from Ch 12. Pe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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