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을 통해 앞의 3장 20절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는 명제를 설명, 증명한다.

1절: “육신으로…”는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을 수식하거나 “무엇으로 얻었다 하리요”를 수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절: “믿으매…” 창세기 15:6의 인용이다. 그 약속의 내용은

  1.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2. 창세기 12장에서 이미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의 후손에 (메시아) 대한 것임을 밝히셨고 그것을 15장 언약에서 재확인 하신다. (요한복음 8:56 참조)

첫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에 대한 칭의의 약속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칭의와 구속은 불가분이며, 과연 두 번째 약속은 씨앗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속으로 칭의를 선언하시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지, 두 가지 약속 중 하나 만,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는 특정 약속 만을 하나 만을 믿은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과 칭의의 선언을 받아들임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를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Jehovah] counted/imputed it to him righteousness” 바울은 라틴어역(Septuagint)을 인용해서 “의로…” “eis dikaiosounen” 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eis는 for 또는 unto의 뜻. counted/Imputed/credited는 “그렇게 봐서는 아니되는 데 그렇게 봐 주었다”는 뜻이다. 고로, 이는 세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1. 마치 그 믿음이 아브라함에게서 난 것 처럼 여기사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심 (imputed의 뜻을 강조);
  2.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이 믿고 의지하고 있는 그 내용, 곧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헤아리사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심 (counted의 뜻을 강조);
  3.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이 그에게 있는 것으로 여겨주시사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심 (counted, imputed의 뜻 모두 함축).

세 번째가 가장 정확한 의미라고 보여진다. “그를 의롭다 여기시겠다는 약속의 내용이 그에게 있는 것으로 여겨주셨다, 곧 의를 입혀주신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위 세 가지는 상충 되지 않으며 오히려 복합적이라고 보아도 문제가 없고 성경의 가르침과도 조화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칭의를 내리시는 수단에 불과하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Some have stumbled at this sentence, — “his faith is counted for righteousness,” and have misapplied it, as though faith were in itself the cause of righteousness, and hence a meritorious act, and not the way and means of attaining righteousness. Condensed sentences will not submit to the rules of logic, but must be interpreted according to the context and explanations elsewhere found. “His faith” means, no doubt, his faith in the Promise, or in God who promises, or in him who, as is said in this verse, “justifies the ungodly:” hence what is believed, or the object of faith, is what is counted for righteousness. This accords with the declarations, — that “man is justified by faith,” Romans 3:28, and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by faith,” Romans 3:22. If by faith, then faith itself is not that righteousness.

“Beware,” says Chalmers, “of having any such view of faith as will lead you to annex to it the kind of merit, or of claim, or of glorying under the gospel, which are annexed to works under the law. This, in fact, were just animating with a legal spirit the whole phraseology and doctrine of the gospel. It is God who justifies. He drew up the title-deed, and he bestowed the title-deed. It is ours simply to lay hold of it…Any other view of faith than that which excludes boasting must be altogether unscriptural.”

—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John Calvin

5절: “의로 여기신다” 우리 믿음에, 더 정확하게는 믿는자가 하는 그 어떤 행위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님을 수동태를 통해 분명히 보여준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값 없이 은혜로 내리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가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6–8절: 우리의 그 무엇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칭의의 두 번째 근거로 다윗을 인용한다. 시편 31:1-2 말씀이다. 시편 31:2 전반부의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는 고의적으로 인용되지 않았다; 왜냐면 지금 논의의 대상은 ‘칭의’의 문제이지 성화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죄가 처음부터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칭의란 사람의 공로가 일체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 한다.


9절: 믿음의 법에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분이 없음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11절: 아브라함이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예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은 자들의 조상인데, 그가 무할례시 믿음으로 칭의를 받게하신 이유는 무할례자들 중에서도 믿는자들에게 칭의를 입히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12절: 개역성경의 번역은 모호하다. “단지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땨르는 자들”로 읽어야 한다. 영어로는 “he father of the circumcised who are not merely circumcised but who also walk in the footsteps of the faith that our father Abraham had before he was circumcised.” 고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믿음의 자손임을 분명히 한다.

특히 언약의 표인 할례와 관련해서 칼빈은 의롭다 하심이 인간의 공로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유아들도 언약의 표를 받게 하셨다고 본다; 이는 유아 세례의 근거 중 하나가 된다.

중간 결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혹 이제와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칭의와 우리의 칭의에 차이를 두려는 시도를 파쇄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자손들에게 세상을 주리라고 하신 약속에 대하여 살피면서 우리와 아브라함의 연합됨을 확인한다; 특히그 약속이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터 위에 있는 것임을 다시 밝힌다.

13절: 창세기 15:6의 칭의 선언 이후에 오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세상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창세기 15:7)에 대해 언급한다. “말미암은…”이란 “come through”라는 뜻이다. 이 약속의 확정은 우리의 그 무엇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칭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 칭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곧 믿음의 법에 근거해서였음을 우리는 앞서 분명히 보았다.

14절: 가정법이다. “율법에 속한 자”라 함은 “율법의 행위로 의를 추구하는 자”란 뜻이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다시 말해 행위의 법으로 칭의를 얻는다면, 믿음은 필요 없는 것이고 (믿음의 법과 행위의 법은 교집합이 없다), 약속도 실상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데… 그 이유는 15절에 나온다. 분명히 할 것은 믿음의 법과 행위의 법은 교집합이 없다는 것이다.

15절: 14절의 가정이 없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으로 자신을 주장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의 법, 또는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를 의지 하지 않고 믿음의 법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지 않으시지만; 반대로 율법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오면 율법에 근거에서 정죄를 받을 뿐이고, 진노를 부른다.

16절: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공허하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의 법으로 칭의를 받는 것은 여러 모로 분명하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믿음의 후손들에게 주시는 그 분의 약속을 분명한 것으로 만드시려는 것이다.

17절: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믿음의 법의 적용 대상에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브하람의 자손이란 믿음의 자손, 영적인 자손이지, 육체적 의미가 아님을 확인한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한 분의 신실하심 외에는 도저히 믿을 근거가 없는 약속을 믿었다. 이는 다시 한 번 그의 칭의가 하나님께로 부터 난 것이지 그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믿음으로 그는 약속의 확정을 받았고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19–21절: 우리의 성화의 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20절)

“From what he adds, giving glory to God, it must be observed, that no greater honor can be given to God, than by faith to seal his truth; as, on the other hand, no greater dishonor can be done to him, than to refuse his offered favor, or to discredit his word. It is hence the chief thing in honoring God, obediently to embrace his promises: and true religion begins with faith.” — Calvin, Commentary on Romans

22절: 여기서 “그것”이란 그런 분명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킨다.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는 것은 위에서도 설명되었지만 “counted/imputed unto righteousness”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믿는 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에 의롭게 여겨 주셨다는 뜻이다.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칭의를 마련해 주신 것이 아니라, 믿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로이 칭의의 약속을 하셨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을 내용을 입혀 주셨다.

23–25절: 결론이다;

  1.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은 그 안에서 우리도 받은 언약이다.
  2.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터 위에서이다.
  3. 고로 우리 역시 그 약속을 받으려면 칭의를 받아야 하고,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의 법에 의하여 받는다.

믿음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 처럼, 우리에게는 의롭다하심을 받을 아무 근거가 없지만, 약속된 자손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를 믿음으로 (이는 그것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겠다는 하나님을 믿음과 다름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모든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자각하게 된다.

24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도리를 본다: 성경이 기록된 것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위한 것이지, 특정 시대, 특정 인물을 위해서가 아니다.

25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의가 충분하고 완벽함을 보여준다.

“However much of the import of this may have escaped the notice of an ordinary reader, it is pregnant with meaning of the weightiest importance. You know that when the prison door is opened to a criminal, and that by the very authority which lodged him there, it envinces that the debt of his transgression has been rendered, and that he stands aquitted of all it’s penalties. It was not for his own, but for our offenses that Jesus was delivered unto the death, and that his body was consigned to the imprisonment of the grave. And when an angel descended from heaven, and rolled back the great stone from the door of the sepulchre, this speaks to us, that the justice of God is satisfied, that the ransom of our iniquity has been paid, that Christ has rendered a full discharge of all the debt for which he undertook as the great surety between God and the sinners who believe in him.” (Chalmers)

3 Comments

  • Barceloven

    칭의의 근거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막연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칭의를 내리시는 수단에 불과하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구절을 보니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되는 ‘믿음’과 ‘칭의’가 다른 것 같지만,(구약은 언약을, 신약은 언약의 결과인 예수를) 다르지 않고
    그 믿음의 ‘결과’와 ‘수단’의 합을 모두 취하는 것이 의롭다 여겨주시는 ‘칭의’가 아닌지 묵상을 해보게 됩니다.

    깊이 있는 묵상에 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말씀과 질서안에서 묵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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