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의 생활, 성화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한다; 즉 복음과 칭의의 현실적 효과를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았고, 또한 그와 함께 산다는 것이 핵심이다.

본 장을 이해하는 데 주의할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던지 하나님께 대하여 종이 되었다는 것은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서 죄의 영향이 완전히 소멸되었음 꼭 뜻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9절에서 적고 있듯이 이는 ‘주장하는 권세’ 곧 주권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주권을 논하는 테두리, 영역은, 17절에서 ‘마음’이라고 적은 바 우리 영혼의 심장이다. 그랬을 때, 불신자는 죄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절대적 대권 아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위치에 두셨냐는 것 뿐이다. 불신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셨지만, 신자는 그리스도 안의 은혜가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신 것이다.

1–5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는 죄에 계속하여 거하는 것이 불가능함

2절: 여기서 “죄”는 우리의 부패를 나타낸다; “죄성”이라고 해도 된다 (12절 설명 참조).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나중에 9–11절에서 보겠지만,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 죄의 영향이 소멸되었다고 꼭 볼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더 상세히 적고 있다); 하지만, 19절에서 적고 있듯이, 그 영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영생이 자리잡고 있다; 반대로 불신자는 죄로 인한 사망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불신자는 계속해서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데,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악순환에서 또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을 주장한다.

3절: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주권에 대하여 죽었는데, 이것은 우리와 예수님이 하나로 연합 되었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다. 여기서 “합하여”는 into이다.

4절: 예수 믿기 전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고, 오히려 부분적으로나마 남아있던 하나님의 형상의 영향을 간혹 받기도 한 상태였는데, 반대로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요, 죄는 영향을 끼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다. 속죄는 영화를 위한 수단이다;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되신 ‘목적’은 우리를 그와 함께 그 처럼 살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속죄를 최종 목적 처럼 생각하기 쉬운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목적을 이루는데에 부족하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 그 은혜 아래 들어간 자는 죄에 계속 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4절을 통해 사도는 우리에게 성화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만세 전에 예정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그 안에서 택하신 이유는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울의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는 ‘구원 받은 것이 감사하니 이제라도 힘을 내서 열심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자’는 식의 반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밀고 가시는 영광의 길에 대해 ‘아멘’으로, ‘예, 과연 그것이 제가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저를 주장하소서’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행보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5–11절: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음을 알아야 함

5절: 죄의 주권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동시에 새 생명의 주권 아래 들어간 것은 물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에도 참예하기 때문이다.

9–11절: 죄에 대해서 죽었다던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9절에서 언급하듯이 ‘주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신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고,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신다. 이는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통치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절대적 대권 아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위치에 두셨냐는 것이다. 불신자는 죄로 인한 죽음이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셨지만,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이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신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장 8절)

그러므로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고 (the vigor of sin is destroyed), 이제는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실체를 분명히 알고 확신하라. 이는 마치 본디 죄의 왕국에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로 옮기워진 것과 같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로새서 1장 13절)

죄의 왕국과 접전 중이라 그 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있어도 다시는 죄의 주권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특히, 다시는 죄가 우리를 옭아 메는 족쇄인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9절 참조)! 죄의 영향력 까지 없애는 것이 성화의 길이고, 이를 성경은 “땅의 지체를 죽이는” (Mortification of the Flesh; 로마서 8장 13절) 것으로 표현했다.

“for though the mortifying of the flesh is only begun in us, yet the life of sin is destroyed, so that afterwards spiritual newness, which is divine, continues perpetually.”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1절의 ‘여길지어다’라고 번역된 번역된 λογίζομαι는 ‘그런 줄로 대충 여기고 살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분명히 알고 거기에 의거해 모든 것을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죄값을 치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듯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또한 나를 죄의 주권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향해 걷게하신다는 것을 또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나를 죄책에서 면제해 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또한 해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행보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 주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고 그 자각 위에서 모든 것을 행해야 할 것이다.

12–14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행함

12–13절: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다시는 죄의 주권 아래 있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갈 일이 아니다. 여기서 “몸”이라고 한 것은 6절의 옛 사람과 통한다. “죽을”이란 헬라어로 mortali (영어로 mortal) 곧, 죽기로 작정된, 죽음에 이르도록 저주 받음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죽었다”(dead)고 말할 수 있다.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죄가 죽을 몸으로 “너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Let not sin therefore reign “you” in your mortal body); 이는 그 사욕을 좇지 않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Still further, he gives the name of sin to the original depravity which dwells in our hearts, and which leads us to sin, and from which indeed all evil deeds and abominations stream forth. In the middle, between sin and us, he places lusts, as the former has the office of a king, while lusts are its edicts and command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어떻게 하면 사욕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나의 의지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 (13절). 나를 거룩의 길로 하나님께서 밀고 가고시겠다고 알리셨기에 (6절) 나의 지체를 그 분의 뜻에 따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장 8절)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활용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사도행전 13:43)

의의 도구 정도가 아니라 의의 “병기”(arma, 헬라)로서 죄를 대적하는 병기로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죄의 사욕을 좇으면 그것은 마치 죄에게 우리 수족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죄에게 종 노릇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의 명령에 손발을 놀릴 일이다!

“As the soldier has ever his arms ready, that he may use them whenever he is ordered by his general, and as he never uses them but at his command; so Christians ought to regard all their faculties to be the weapons of the spiritual warfare: if then they employ any of their members in the indulgence of depravity, they are in the service of sin. But they have made the oath of soldiers to God and to Christ, and by this they are held bound: it hence behoves them to be far away from any intercourse with the camps of si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4절: 죄가 죄인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에 근거해서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주권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율법의 정죄를 피했기 때문이다. 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이 우리에게 선언할 수 있는 모든 정죄와 형벌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는 자이며, 그에게는 죄가 다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Vobis non dominabitur,’ ὀυ κυριεύσει — shall not be a lord over you, shall not have power or authority or control over you; or, it may mean, shall not domineer over you, so as to retain you, as it were by force, under its power: and the reason given favors this idea; for he says,’Y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Law is the strength of sin; and by law it binds its subjects under its service.”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John Calvin)

첨언하자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다시는 율법을 상전으로 모시고 그것을 통해 의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15–19절: 율법이 아닌 은혜이기에 더더욱 죄를 짓는 것이 불가함

14절에서 사도는 또한 특이한 말을 하는데 바로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더 이상 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이 7장에서 이어진다. 여기서는 당분간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더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죄를 짓겠는가를 논박한다.

15절: 그렇게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죄를 범하겠는가? 율법의 정죄 기능에서 자유하다는 것이지 교육적 기능까지 없어진 것은 아님을 배울 수 있다.

16–18절: (16절) 원인과 결과를 헛갈리지 말자; 종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는 누구에게 순종하는지 보면 누구의 종인지 안다는 단순한 진리를 언급할 뿐이다.

16, 17, 18절에서 의인화한 “죄”를 19절에서는 “부정과 불법”이라고 표현했다. 죄인에게 있는 모든 부패의 총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대비해 16절의 “순종”이라던지 18, 19절의 “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 심령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죄의 종이라면 그 주인으로 부터 사망을 물려받을 것이요, 순종의 종이 되면 그 주인으로 부터 의(righteousness)를 물려받는다 (16절). 의에 이른다는 것은 칭의(justification)에 이른다는 뜻이 아니다. 의와 칭의는 구별되는데, 이렇게 비슷한 단어로 우리말 번역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6절에 ‘순종의 종‘이라 표현한 것을 18절에서는 순종의 열매를 따라 ‘의의 종‘이라고, 19절에서는 순종의 대상을 따라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이 모든 말은, 앞서 9–11절에서 논한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죄의 종이라던지 순종의 종이라던지를 논하는 테두리 곧, 죄 혹 은혜의 주권이 역사하는 장소는, 우리 심령의 가장 깊은 곳이라는 점이다 — 이를 17절에서 우리 말로는 ‘마음’이라고, 영어로는 heart라고 번역 하였다. 이것을 보고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 죄의 영향이 소멸되었다고 꼭 볼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더 상세히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영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영생이 자리잡고 있지만, 불신자는 죄로 인한 사망이 자리잡고 있다.

결국 16절에서 사도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앞서 (14절) 율법에서 자유케 됨으로 죄가 우리에게 주권을 부리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은혜의 주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는데, 주권이 바뀐 이상 죄를 더 멀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종의 종으로 만드신 것이고, 그로써 죽음을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이룬 것은 —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 하나님이시다 (17절). 17절에 교훈의 “본”이라고 번역된 것은 manner, fashion, pattern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실패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16절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16절에서 ‘순종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을 18절에서는 ‘의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열매로 원인을 기술한 것이다. 16절의 논리를 따르자면 18절은 17절의 결과가 아닌 원인이다. 영어 번역(ESV)은 이를 조금 더 명확히 했다.

그러므로 17–18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케 하셨고, 또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게 하셨다.”

“If the Son shall free you, you shall be free indeed.” (John 8:36.)

사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순종케 하셨는지 언급함으로써, 외부에서 규율하는 율법과 비교하여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 얼마나 더 우월한지 보이고 있다.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면 죄를 더 짓기는 커녕 근원적인 데서 부터 죄를 미워하게 된다.

19절: “육신이 연약하므로” — 즉 우리의 연약 때문에 — ‘전에 죄에게 내어준 것 처럼 의에게 내 주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지만, 실상 죄에게 내어준 것 보다 훨씬 더 열심으로 의에게 내주어야 한다고 사도는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영혼의 심장에 자리 잡은 새 생명이 우리의 행실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지체를 의에게 ‘내주라‘고 하였는데, 이는 13절의 ‘드리라‘와 원문에는 같은 단어이다; 우리의 힘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이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한 바 성신님을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장 16–18절)

20–23절: 은혜 아래서 비로소 성화와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

20절: 대조법, 즉 우리가 이제는 죄에 대해 자유하고 의의 종이 되었다. 전에는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 특히 의가 우리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고, 죄의 전적인 주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안에서 다시는 죄가 우리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의가 우리를 주장한다.

21절: “그 때”란 예수님 믿기 전. “부끄러워 하나니”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은 신자의 특징 중 하나다.

22절: “마지막”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최종 도착지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의 대가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영어 번역은 이를 조금 더 잘 표현했다.

23절: “죄의 삯”과 대비하여 ‘의의 삯’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 (free gift)”라고 표현한 것을 주의하라. 또한 “영생”을 주어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주의하라; 다시 말해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을 가져온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22절과 연계해서 내리는 결론은 칭의와 성화, 영화 —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It may however be hence inferred with certainty, that our salvation is altogether through the grace and mere beneficence of God. He might indeed have used other words — that the wages of righteousness is eternal life; and then the two clauses would correspond: but he knew that it is through God’s gift we obtain it, and not through our own merits; and that it is not one or a single gift; for being clothed with the righteousness of the Son, we are reconciled to God, and we are by the power of the Spirit renewed unto holiness. And he adds, in Christ Jesus, and for this reason, that he might call us away from every conceit respecting our own worthiness.”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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