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

(알림: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한 로마서 공부의 짤막한 기록입니다.)

개요

6장에서 이야기한 것을 한 번 더, 하지만 더 심도 있게, 7장에서 논의한다. 6장의 주제문이라고 할 수 있는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는 내용을 더 세부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결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율법을 상전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님) 성신을 의지해서 사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런 면에서 7장의 주제문은 6절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7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실정법(positive law)으로서 효력이 없다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실정법(實政法)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연법(natural law) 또는 영원법(eternal law)은 하나님께서 내신 도리들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놓고 정부가 현실에 맞게 정한 것—“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법조문—이 ‘실정법’ (positive law)이다.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것은 율법이 실정법으로서 우리 위에 군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반영하고 있는 영원법이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율법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이유중 하나는 공부하는 것은 그 영원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

실정법(positive law)의 특징 중 하나는, 그 실정법을 적용할 대상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형법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이 처럼, 율법 또한 실정법으로써 그 적용대상이 있는데, 7장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율법의 적용 대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 뿐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논의는 우리의 실천적 생활에 관한 것을 향하고 있다: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4절)

1–6절: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기는 해도 따르게 할 능력은 주지 못함

1-3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have jurisdiction) 알지 못하느냐” 죽음으로 율법의 실정법적 기능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율법이 죽은 사람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지는데, 이로써 죽은 사람은 기존과 다른 위치에 들어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율법이 실정법으로서 적용되는 그 대상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이다. (병역의 의무를 회피해서 징역을 살고 나면, 병역의 의무 조항이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The main design of the illustration then was, to show that there is no freedom from a law but by death; so that there is no necessity of a correspondence in the other parts. As in the case of man and wife, death destroys the bond of marriage; so in the case of man and the law, that is, the law as the condition of life, there must be a death; else there is no freedom. But there is one thing more in the illustration, which the Apostle adopts, the liberty to marry another, when death has given a release: The bond of connection being broken, a union with another is legitimate. So far only is the example adduced to be applied — death puts an end to the right and authority of law; and then the party released may justly form another connection.”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John Calvin)

4절: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시집) 가서” 전에 메어 있던 율법에서 죽음으로 자유하여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 되었다. 그의 영생을 나누어 받았으니, 이 연합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The law was, as it were our husband, under whose yoke we were kept until it became dead to us; After the death of the law Christ received us, that is, he joined us, when loosed from the law, to himself; Then being united to Christ risen from the dead, we ought to cleave to him alone; And as the life of Christ after the resurrection is eternal, so hereafter there shall be no divorce.”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5절: “육신에 있던 때”(ἐν σάρξ, in the flesh)는 하나님의 성신과 상관 없는 상태이다. (이는 당연히 거듭나기 전의 상태를 포함한다.) 성신의 역사 없는 마른 율법이 우리 안에 소리를 지르면 죄의 정욕의 반발이 거세진다. 그리고 결코 죄의 사욕을 이길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율법에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율법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죄 있는 자는 죽음에 해당한다’는 것 뿐이다.

““Emotions of sins” is an Hebraism for “sinful emotions” — “The members” are those of the “old man,” and not those of the material body, though it is commonly thought that they are the latter, and mentioned, because they are employed as the instruments of sin: but there are many sins, and those of the worst kind, which are confined to the mind and heart. It is therefore more consistent to regard them as the members of “the body of sin,””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6절: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되, 율법을 상전으로 모시고 내 힘으로 무엇을 해 보려는 것이 아니라, 4절에서 약속하신 것 처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음으로 오직 성령님 만을 의지 해야 한다. 율법에 대하여는 우리가 이미 죽었으므로, 율법이 상전 노릇을 하던 것은 옛날 일, 묵은 일이다.

  • 그것을 그대로 잘 지켜서 의를 얻으려 해서는 안 되듯이, 그것을 그대로 잘 지켜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으려 해서는 안 된다.
  • 거기에 포함된 양상은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해 보겠다고 행하던 우리의 옛 모습 또한 “옛 사람”이다.

이제는 성신께서 우리 마음에 친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께 기꺼이 우리 자신을 드리게 하신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다; 그러므로 그 자유를 죄를 짓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7–13절: 율법이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율법의 잘못이 아닌 사람의 죄로 인한 타락 때문임

7절: “율법이 죄냐?” 그럼 율법이 죄를 짓게 한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앞서 5절과 관련된 오해를 막기 위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율법으로 인해 ‘내 안에’ 죄와 부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Ambrose 말하길 “Lex index peccati est, non genitrix” (“the law is the discoverer, not the begetter of sin.”) 이것은 율법이 오기 전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내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세상에는 도덕법 또는 실정법이 있어서, 악행이 무엇이고 선행이 무엇인지를 말하지만, 행동으로 실행하지 않은 마음 속의 동기를 그다지 탓하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제 10 계명 “탐심을 품지 말라”를 인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계명은 십계명 전체의 결미로서, 하나님의 율법이 미치는 경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심장이라는 것이다. ‘탐심’으로 표현된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나의 그 무엇을 추구하는 심정이다; 즉 부패한 심정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패한 심정 또는 동기 조차 우리에게서 없어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이처럼 율법의 명확한 선언으로 나의 비참한 상태를 더욱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8절: “죄가 기회를 타서…”, 즉 죄가 율법을 기회로 삼아 어기려는 탐심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은 없던 것이 생겼다고 볼 수 도 있지만, 가리웠던 죄가 드러났다고 해석해도 된다. 후자의 해석이 전절의 내용과 이너 나오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는 문구의 뜻과 더 어울린다고 본다.

이 다음에 나오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는 오히려 9절과 붙는 것이 내용상 맞다. 아래 9절 부분에서 더 자세히 보겠지만, 지금 바울이 “율법이 없다”고 표현하는 내용은 “율법의 참 의미를 모른다”는 뜻이다. (“The law is known and not known still.”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John Calvin) 율법의 진의를 몰랐을 때는 내 안에 있는 죄가 흙에 묻힌 것 처럼 가려져 있었다. 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9절에서 이어진다.

9절: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바울은 태어날 때 부터 율법 사회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여기서 “율법을 깨닫지 못했다”고 번역되었고 8절에서 “율법이 없을 때”라고 번역된 ‘choris nomou’는 ‘율법을 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랬을 때 “내가 살았더니”, 즉 내게 영생이 있는 줄 알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참 계명을 깨달으니 나의 죄는 드러나고 내게 죽음 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면 내게 죄가 없어야 내가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죄의 죽음은 나의 살아남이다. 반대로 죄의 살아남은 나의 죽음이다.

“So now, on the other hand, he sets forth the law as coming when it began to be really understood. It then raised sin as it were from be dead; for it discovered to Paul how great depravity abounded in the recesses of his heart, and at the same time it slew him.”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0절: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즉 율법을 다 지키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게 대하여”, 즉 나의 악함 때문에,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배웠다. 그러나 율법이 의로운 자의 삶을 가르친다는 것은 또한 참이다.

11절: 10절의 반복 부연이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내 안의 죄가 그것을 기회로 삼아 “나를 속이고” 또는 “나를 정도에서 이탈케 하여” 죽게 만들었다.

“In Romans 7:8, sin, as a person, is said to take advantage of the commandment to work every kind of sinful desires: but it is said here to take this advantage to deceive by promising life, and then to destroy, to expose, and subject him to death and misery.”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13절: 그럼, 선한 것이 내게는 죽음을 주는 것이 되었단 말인가? 아니다; 율법은 선하나, 죄가 우리를 죽게 만들었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라” 즉, 죄가 의로운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죽게 만들었으니, 죄의 비참함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14–17절: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갈등: 성신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의 부딪힘

로마서 7장 14절에서부터 25절까지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가장 많은 논란을 가져온 부분인데,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14–25절 사이에 존재하는 내용상 대응 구조를 참고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대응을 이루는 구절들을 묶어보면 (14,25), (15,18,21), (16,19,22–23), (17,20,24)이다. 아래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17절18–20절21–24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잠시 6장에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떠올리자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고” 또 “죄에서 해방 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상 2, 11, 18 절), 그러면서도 우리 “육신의 연약함”이 있다고 하였다. 그 연약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7장 전반부에서 찾을 수 있다 — 즉 하나님의 법을 통해 무엇이 우리가 좇아가야 할 길인지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순종하려는 하나의 경향이 사라지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바로 14절이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4절: “육신에 속하였다”는 표현 때문에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기 전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표현을 영어로 하자면 “of the flesh”로서 말 그대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지니고 나온 몸을 벗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스어로는 사르키코스(σαρκικός)로 표현하였다. 물론 앞서 5절에서 사륵스(σάρξ)라는 단어를 가지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표현하기는 하는데, 엄밀히 말해 거기서는 “ἐν σαρκὶ” 즉 “in the flesh”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In the flesh”와 “of the flesh”는 뜻이 다르다. 지금 7장 14절에서 쓰인 “of the flesh”라는 의미의 사르키코스(σαρκικός)는 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 곧, 자연인(natural man)을 지칭하기 위해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라는 표현을 쓴다. 다음 표를 참고하자:

고전 2:14고전 3:14
육에 속한 자 (ψυχικός)육신에 속한 자 (σαρκικός)
성령의 일을 받지 않음그리스도 안의 유아
자연인 (natural man)중생인 (regenerated man)
in the flesh (Rom 7:5)of the flesh (Rom 7:14)

그 다음,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이 제시하는 그 완벽한 상태가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간성의 표준이라는 뜻이다; 신령한 나라를 그리는 것이다. 그것과 대비해서 우리는 육에 속한 상태에 있다; 곧 하나님의 표준에서 떨어진 인간성,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갖고 나온 인간성인 것이다. 육은 신령한 것과 도저히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 인간성은 ‘죄 아래 팔린 것’으로서, 죄의 지배아래 있는 죄의 종이다. 억지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즐거이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 전의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도는 15절에서 이것을 현재의 자신의 경험, 우리 모두의 경험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15절: “알지 못하겠노라” 혹은 “이해하지 못하겠다”(cannot understand)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불순종하려는 육신의 경향은 도저히 정당하다고 설명 혹은 해명 될 수 없다는 뜻이다.

“We hence conclude, that the doctrine of the law is so consentaneous to right judgment, that the faithful repudiate the transgression of it as a thing wholly unreasonable.”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4절도 그랬지만, 15절 역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 되는 표현이다. 거듭나지 않았더라면 (장로들의 유전이 아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리가 없다. 거듭나고 보니 우리의 본성이 죄 아래 팔렸음을 분명히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though the will of a faithful man is led to good by the Spirit of God, yet in him the corruption of nature appears conspicuously; for it obstinately resists and leads to what is contrary. […] we must observe, that this conflict, of which the Apostle speaks, does not exist in man before he is renewed by the Spirit of God. […] For regeneration only begins in this life; the relics of the flesh which remain, always follow their own corrupt propensities, and thus carry on a contest against the Spirit.” (Calvin, Commentary on Romans)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원함의 주체는 누구인가? 우리 자신일 수가 없다; 왜냐면 우리 안에는 죄의 욕구 또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원함의 주체는 성신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원하는 아무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주신는 바 우리가 가장 원하는 최고의 소원이다.

“But the expressions to will and not to will must be applied to the Spirit, which ought to hold the first place in all the faithful. The flesh indeed has also its own will, but Paul calls that the will which is the chief desire of the heart; and that which militates with it he represents as being contrary to his will.”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6절: 결론이다; 그러므로 내가 율법이 가르치는 바를 행하기를 원하나 내가 그것을 어긴다면,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이다. 내가 율법을 기뻐한다는 것 또한 율법의 선한 것을 인정함이다.

17절: 죄를 짓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라고 함은 나의 전(全) 존재가 즉 내 모든 것을 다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일부의 문제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 역시 14, 15절 처럼 그리스도인에게 해당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연인은 도무지 죄로 오염 되지 않은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인에게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이야 말로 자기의 “전부”가 죄를 위하여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17절은, 나는 죄의 종은 아니지만 (죄의 전적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속에 죄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을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이다. 14, 15, 17절 하나 하나가 믿지 않는 자의 심리가 아니라, 믿는 자가 겪는 갈등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여기서 죄가 자기 안에 ‘거한다’ 표현한 것은 의미 심장하다. 죄는 잠시 거할 뿐이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 아니다.

“sin only dwelt in some part of his soul,while with an earnest feeling of heart he strove for and aspired after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clearly proved that he had the law of God engraven within him.”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8–20절: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음 (15–17절과 대응)

18, 19, 20절은 각각 15, 16, 17절과 쌍을 이루고 있음을 유의하자.

18절: 성신께서 내 안에 선한 것,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창조하여주시지 않으면, 내 자연인의 본성 속에서는 결코 선한 것을 찾을 수 없다. (Total Depravity, 전적타락)

여기서 ‘육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거듭나기 전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때 부터 지닌 자연적인 본성, 곧 ‘자연인’, ‘옛 사람’을 가리킨다.

“Under the term flesh, he ever includes all that human nature is, everything in man, except the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In the same manner, by the term spirit, which is commonly opposed to the flesh, he means that part of the soul which the Spirit of God has so re-formed, and purified from corruption, that God’s image shines forth in it. Then both terms, flesh as well as spirit, belong to the soul; but the latter to that part which is renewed, and the former to that which still retains its natural character.” (Calvin, Commentary on Romans)

The Apostle here is his own interpreter; he explains who the I is that does what the other I disapproved, and who the I is that hates what the other I does. He tells us here that it is not the same I, though announced at first as though it were the same. The one I, he informs us here, was his flesh, his innate sin or corruption, and the other I, he tells us in Romans 7:22, was “the inner man,” his new nature. The “inner man,” as Calvin will tell us presently, is not the soul as distinguished from the body, but the renewed man as distinguished from the flesh. It is the same as the “new man” as distinguished from “old man.” See Ephesians 4:22,24, Romans 6:6, 2 Corinthians 5:17. But “the inward man,” and “the outward man,” in 2 Corinthians 4:16, are the soul and the body; and “the inner man,” in Ephesians 3:16, [although] the same expression as in Romans 7:22, means the soul, as it is evident from the context. The same is meant by “the hidden man of the heart,” in 1 Peter 3:4.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Calvin)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For I have the desire to do what is right, but not the ability to carry it out.” 이는 소원하는 바를 향해 전혀 나가지 못했다기 보다는 소원한 그대로 가지 못해고 불완전하게 진행했다는 뜻이다.

“To will is present, etc. He does not mean that he had nothing but an ineffectual desire, but his meaning is, that the work really done did not correspond to his will; for the flesh hindered him from doing perfectly what he did. So also understand what follows, The evil I desire not, that I do: for the flesh not only impedes the faithful, so that they can not run swiftly, but it sets also before them many obstacles at which they stumble. Hence they do not, because they accomplish not, what they would, with the alacrity that is meet. This, to will, then, which he mentions, is the readiness of faith, when the Holy Spirit so prepares the godly that they are ready and strive to render obedience to God; but as their ability is not equal to what they wish, Paul says, that he found not what he desired, even the accomplishment of the good he aimed at.”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9절: 18절과 같은 시각으로 읽어야 한다.

“[He] did not the good which he desired, but, on the contrary, the evil which he desired not: for the faithful, however rightly they may be influenced, are yet so conscious of their own infirmity, that they can deem no work proceeding from them as blameless. For as Paul does not here treat of some of the faults of the godly, but delineates in general the whole course of their life, we conclude that their best works are always stained with some blots of sin, so that no reward can be hoped, unless God pardons them.” (Calvin, Commentary on Romans)

20절: 17절의 반복이다.

21–24절: 부활의 육체를 입기 전에는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갈등

칼빈은 여기서 네 가지의 법이 언급 되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법: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법
죄의 법: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는 지침들. 반신국적인 법들
마음의 법:
하나님의 법에 알맞게 작동하는 새 사람의 작동 방식, 작용, 운동력. (곧 바로 순종하려는 성향의 발휘 등)
한 다른 법:
마음의 법과는 다른 '육신의 법'. 죄가 지배하는 옛 사람의 성향, 작동 방식. 죄의 법을 따르고자 함.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갈등, 그리고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의 갈등 구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과 마음의 법, 그리고 죄의 법과 한 다른 법을 같은 것으로 묶어서 봐도 문제는 없겠다.

21절: 즉 죄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22절: “속사람”(ἔσω ἄνθρωπος)을 “영혼”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영혼은 사람의 일부분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 처럼 육체와 영혼의 구분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속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6장 6절의 “옛사람”(παλαιός ἄνθρωπος)와 대비되는,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으사 내게서 나타나도록 하신 하나의 인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옛사람과 속사람의 대비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옛사람과 새사람(καινός ἄνθρωπος)으로 표현하였다. 새사람을 여기서 “속”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성신 안에 있는 한 내 존재의 근본은 성신께서 만드어내시는 새사람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9절 참조). 내게서 나타나는 새사람(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한다.

23절: 여기 “마음의 법”은 22절의 “속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법”은 6장 6절의 “옛사람”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거듭났다는 것은 죄가 주권을 갖고 있던 상태에서 성신께서 주권을 행사하시는 상태로 옮겨졌다는 것이지 (로마서 8장 9절 참조) 우리 안에 옛사람의 성향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 옛사람은 부패하지 아니한 부분이 없는 것이고 (전적 타락, 18절 참조), 그런 옛사람의 모습이 내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날 때면 마치 죄의 독재 아래 있는 것과 다름 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죄의 법과 한 다른 법을 구분해서 읽는) 칼빈의 시각이다.

“While the faithful strive after what is good, they find in themselves a certain law which exercises a tyrannical power; for a vicious propensity, adverse to and resisting the law of God, is implanted in their very marrow and bone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다른 한 편으로, 만일 죄의 법과 한 다른 법(육신의 법)을 같은 것으로 본다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자기 자신’으로 읽을 수 있다 — 즉 23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내 지체 속에 죄성이 내 하나님의 법과 싸워 죄성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The latter part of Romans 7:23 is in character with the Hebraistic style, when the noun is stated instead of the pronoun; see Genesis 9:16; Psalm 50:23; and it is also agreeable to the same style to add the same sentiment with something more specific appended to it. This part then might be rendered thus, — “and making me captive to itself, even to the law of sin, which is he my members.””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Calvin)

즉 나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나, 죄성의 방해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만큼 내가 소원하는 그 하나님의 법의 참된 모습만큼 나는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한다.

24절: 우리의 부족을 회개하는 것은 참된 신자의 정당한 태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읽고 로마서 7장의 내용이 사도 바울이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할 때를 그리고 있다고 말하나,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더 눈을 뜰 수록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통탄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잘의 내용은 단지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 한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하나님의 성신이 없는 사람은 육체만 남은 것과 다름 아니다. “No more shall my Spirit contend with man, for he is even flesh,” (Genesis 6:3)

25절: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함

25절: 그러나 자기 자신이 처한 상태 보다는, 이미 받은 은혜와 구원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정당한 심정이요 위로다.

“And further, lest they should indulge their torpor, Paul, by his own example, stimulates them to anxious groanings, and bids them, as long as they sojourn on earth, to desire death, as the only true remedy to their evils; and this is the right object in desiring death. Despair does indeed drive the profane often to such a wish; but they strangely desire death, because they are weary of the present life, and not because they loathe their iniquity. But it must be added, that though the faithful level at the true mark, they are not yet carried away by an unbridled desire in wishing for death, but submit themselves to the will of God, to whom it behoves us both to live and to die: hence they clamor not with displeasure against God, but humbly deposit their anxieties in his bosom; for they do not so dwell on the thoughts of their misery, but that being mindful of grace received, they blend their grief with joy, as we find in what follow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런즉… 우리의 상태를 다시 정리하자면….”이라고 읽고 8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우리 육신에 남아 있는 구습이, 그로 인한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갈등이, 이 땅에 있는 동안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며, 오히려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 속에서 성화(聖化)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봐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것은 8장에서 다룬다. 

25절의 ‘마음’은 철학자들 마냥 우리 인격의 지적인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23절의 ‘마음의 법’이란 표현처럼, 우리 속에 성신께서 조성하시는 생각 곧, 성신의 작용으로 발휘되는 지적이고 정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자면, 22절의 표현 처럼, 속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22절을 공부할 때 언급한 것이지만, 속사람과 옛사람의 구분은, 혹은 마음과 육신의 구분은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 같은 정신과 육체의 구분이 아니다.

2 thoughts on “로마서 7장

  1. 로마서7 장 을넘어서야 우리는 크리스챤이라할수있을것같습니다.

    • 그렇게 보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즉 로마서 7장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상태로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로마서 7장이 중생한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보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같은 사람들이 나중에 해당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퍼거슨 (Sinclair Ferguson) 박사 역시 로마서 7장이 중생한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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