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알림: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한 로마서 공부의 짤막한 기록입니다.)

7장 마지막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왜냐면 “그런즉, 곧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육신에는 죄의 법을 따라가려는 성향이 남아 있지만)”. 이는 다시 말해 “그런즉, 우리의 상태를 정리하자면,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이다.”라는 말이다. 8장은 이어서 “그러므로…”라고 시작한다.

1–4절: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은 성신으로 행하는 삶

1-2절: “그러므로…”라고 번역된 αρα는 “그렇다면…”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도 사실이다’는 뜻으로 쓰인다). 1-2절을 달리 표현해보자면 바로 전 장(7장) 마지막에서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고, 그것은 또한 (αρα) 네가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임을 알아라“는 말씀이다. “성신의 법”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언으로서 “죄와 사망의 법” 곧 “죄의 권세” 아래 있던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한다는 법이다. 은혜의 언약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이다.

칼빈은 “성신의 법”을 “성신” 자체를 가리킴과 다름 아니라고 보고 있는데, 큰 의미의 차이는 없다. Pareus, Ambrose, Haldane 등은 “죄와 사망의 법”을 ‘율법’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의 이 말을 율법으로 읽는 것은 7장에서 “죄의 법”이 지칭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7장에서 그러했듯이, 여기서 ‘죄와 사망의 법’은 우리의 육신, 곧 옛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칼빈을 비롯한 어떤 사람들은 (Beza, Grotius, Vitringa, Doddridge, Scott, Chalmers) ‘죄와 사망의 법’을 “죄책감”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물론 이는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자에게 해당 되는 말이다. 그래서 굳이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8장 전체의 맥락은 성화에 대한 것이지, 칭의와 죄책감이 주제는 아니다.

KJV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뒤에 붙였는데, MSS 문서로 보았을 때 이는 4절에 붙어야 할 것이 잘못 붙은 것으로 보인다.

3절: 본 절 역시 “γαρ” (왜냐하면) 로 시작한다. 그 해방이 어디서 나왔는가?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이루셨다”. 그런데 대속에는 두 가지 현실적 의미가 있다; 첫째,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둘째, 죄의 권세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첫번째 불능 (칭의의 불능), 이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이루셨는가?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에게 우리 죄책을 씌우셨다. 그런데, 이렇게 하신 것은 율법의 두번째 불능 (성화의 불능) 또한 이루시고자 함이라는 것이 4절의 내용이다. 즉, 정죄에서의 해방과 죄의 권세에서의 해방은 함께 간다. 돌려 말하자면, 칭의는 성신의 능력과 함께 온다! 칭의를 받았는데 죄의 권세 아래 계속 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죄로 말미암아…” 이는 “죄 때문에”라고 읽을 수 있다. 그리스어로는 και περι αμαρτια 라고 하였다. 강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God sent his own Son in the likeness of the flesh of sin and on account of sin,” 라고 보았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서의 육신은 물론 우리의 육신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왔다고 한 것이다. ‘정했다’는 것은 ‘condemn’이다; 멸망에 처할 것으로 선언한다는 것이다.

4절: 대속의 큰 목적이 여기서 나온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런데 대속의 은혜를 입히시는 것이 성신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성신을 좇아서 행함으로 (육신은 항상 죄를 향하여 가기 때문에) 의의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다.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것을 완벽한 행위의 가능성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앞서 바울이 7장에서 말했듯이, 선이 있는 곳에 악이 함께 있다. 이 땅에 있는한, 우리의 어떤 행위가, 아무리 짧은 시간 동안 만이라도, 완전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율법이 제시하는 표준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fullfill) 것은 미래에 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루어져 가는” 사람들인데, 그 이루어져 가는 것이 성신을 좇아 행함으로 되어진다.

“율법의 요구”라는 것은 원문상 δικαίωμα τοῦ νόμου 인데, 이는 말 그대로 ‘율법의 의’로서, 율법이 의롭다고 보는 행위 또는 율법이 기술하는 의의 실내용을 뜻하지, 율법을 ‘통한’ 의 곧 율법을 다 지켜서 얻는 의를 뜻하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은 “justification of the law”라고 번역했고, ESV는 righteous requirment of the law 라고 번역했다. 4절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바 성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그것은, 3절에서 언급한 율법의 불능(impotence)과 연결되어 있고, 이는 결국 2절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4절의 의미는 2절과 더불어 통일성 있게 해석 되어야 옳을 것이다.

여기까지 봤을 때, 4절의 놀라운 선언은 7장 말미에서 언급된 갈등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큰 교훈을 준다. 하나님의 자식으로 사는 것은 ‘내가 한 번 해 봐야지’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과 관련해서 정하신 법칙이 무엇인지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곧 성신의 법,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효를 입혀 주시는 성신의 능력 만을 의지하는 상태에 우리가 거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 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내가 계율을 좇아 가려는 옛 사람의 성향이다. 늘 성신님 만을 의지하는 상태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성신께서 역사하시는 방식(mode)은 우리로 죄와 싸우게 하시는 것이다; 저절로 이긴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을 13절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인격과 힘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난 것은 아니다. 마치 믿음도 우리가 “믿어야”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듯이, 성화 또한 우리가 죄와 싸우는 고군분투가 있지만 그것을 위한 힘과 의지력이 내게서 났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되고 오직 내주 하시는 성신님 만을 의지하는 믿음 위에서 서 있을 때 참된 성화의 열매가 맺힐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신자의 생활은 참으로 믿음의 생활이다; 우리의 칭의가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속죄와 의를 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왔듯이, 그렇게 의롭다하심을 입혀주신 것은 또한 우리에게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서 있기 때문임을 ‘아멘’으로 믿는데서 성화 역시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신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게 하시는 데는 성공해도 성화를 이루게 하시는 데는 실패하실 수도 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겠는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사람은 또한 성화를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로마서 6장 11, 14절)


5–8절: 성신과 상관 없는 자들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전적 무능력

4절은 우리가 성신님을 좇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히 가르쳤다. 이제 5–8절에서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성신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변하려 한다. 그러니 어찌 한 시라도 성신을 의지 하지 아니하랴?

5절: “육신을 따른다”는 것은 곧 “육신의 조종을 받는다”는 뜻이다.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묘사한다. 칼빈은 “육신으로 난 자”와 “육신을 따르는 자”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육신이 도모하는 것을 가슴에 품기 마련인데, 여기서 “생각한다”고 번역된 φρονοῦσιν은 주로 감정과 의지를 뜻한다. “The verb φρονέω as Leigh justly says, includes the action of the mind, will, and affections, but mostly in Scripture it expresses the action of the will and affections.”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그러나 성신을 따르는 자, 곧 성신의 내주하심 때문에 성신의 은혜와 감화 가운데 있는 사람은 성신이 도모하는 것을 사모한다.

6절: 그런데, 육신의 소욕은 그 자체가 죽음이다. 성신의 소욕은 그 자체가 생명이요 평안이다.

“But the phrase is no doubt Hebraistic, the adjective is put as a noun in the genitive case, so that its right version is, “The carnal mind;” and “mind” is to be taken in the wide sense of the verb, as including the whole soul, understanding, will, and affections. […] The mind of the flesh is its thoughts, desires, likings, and delight. This carnal mind is death, i.e., spiritual death now, leading to that which is eternal; or death, as being under condemnation, and producing wretchedness and misery; it is also enmity towards God, including in its very spirit hatred and antipathy to God. On the other hand, “the spiritual mind” is “life,” i.e., a divine life, a living principle of holiness, accompanied with “peace,” which is true happiness; or life by justification, and “peace” with God as the fruit of it.” (John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This passage deserves special notice; for we hence learn, that we, while following the course of nature, rush headlong into death; for we, of ourselves, contrive nothing but what ends in ruin. But he immediately adds another clause, to teach us, that if anything in us tends to life, it is what the Spirit produces; for no spark of life proceeds from our flesh. The minding of the Spirit he calls life, for it is life-giving, or leads to life; and by peace he designates, after the manner of the Hebrews, every kind of happiness; for whatever the Spirit of God works in us tends to our felicity.” (Calvin, Commentary on Romans)

7절: 육신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기는 커녕 깨달을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만 낼 뿐이다.

8절: “nothing pleases him but righteousnes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고로 육신에 있는 자들 곧,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Behold the power of free-will! which the Sophists cannot carry high enough. Doubtless, Paul affirms here, in express words, what they openly detest, — that it is impossible for us to render our powers subject to the law. They boast that the heart can turn to either side, provide it be aided by the influence of the Spirit, and that a free choice of good or evil is in our power, when the Spirit only brings help; but it is ours to choose or refuse. They also imagine some good emotions, by which we become of ourselves prepared. Paul, on the contrary, declares, that the heart is full of hardness and indomitable contumacy, so that it is never moved naturally to undertake the yoke of God; nor does he speak of this or of that faculty, but speaking indefinitely, he throws into one bundle all the emotions which arise within us. Far, then, from a Christian heart be this heathen philosophy respecting the liberty of the will. Let every one acknowledge himself to be the servant of sin, as he is in reality, that he may be made free, being set at liberty by the grace of Christ: to glory in any other liberty is the highest folly.” (Calvin, Commentary on Romans)


9–11절: 거듭난 자들에겐 성신이 계셔서 영생으로 이끄심

5–8절에서는 주로 육신(σάρξ)에 속한자 곧 거듭나지 아니한 자의 죽음을 논했다. 9절부터는 로마서를 쓰는 대상, 곧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가 믿고 명심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너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9절: “육신에 있다… 영에 있다…” 영어로는 “in flesh… in the Spirit…”이다. “In”으로 번역된 “εν”은 어디 안에 머문다는 의미가 있다; 영어의 in과 매우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He is in love” 또는 “He is in drink”라는 말 처럼 무엇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 있다. 즉 “육신에 있다… 영에 있다…”는 것은 각각 육신의 지배 아래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성신의 지배 아래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제 육신이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신께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이다.

10–11절: 6절과 대응 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몸”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자연스런 성품 곧 “옛 사람”을 지칭한다 (로마서 6장 6절 참조). 거기에는 죽음 밖에 없다. (이것이 1절-8절에서 논의된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내주하시는 성신께서 불어넣으시는 것이다.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라고 번역된 것을 “성신은 의의 생명이시다”라고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다. (칼빈은 후자에 해당.)

11절의 “죽을 몸”이란 앞서도 그러했듯이 우리의 옛 사람을 의미한다. 그것을 “살린다”는 것은 완전히 제압해서 죄성을 없이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성화를 의미한다. 차라리 옛 사람을 없이해서 우리의 성품에 새 사람 만이, 그리스도적인 성품 만이 나오도록 한다고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성신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11절의 내용이다. 그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다. 물론 그것은 제 2위 성자 하나님의 내재하시는 능력이기는 하나 (요한복음 10:18),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길 원하였고,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다른데, 과연 그리스도 처럼 부활할 수 있을가?’하는 염려 없이 ‘아버지께서 성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듯이, 같은 성신께서 내주하시는 우리 역시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12–30절: 거듭난 자들에겐 성신이 계셔서 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이끄심

12–13절: 12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 즉 11절에서 말한 바 우리가 ‘영생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 우리에게는 영생의 길로 걸어가야 할 “빚” 곧, 당위가 있다 — 여기서 “빚”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갚아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 보다도 (우리는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드려야” 할 것이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받은 은혜를 갚아 나가야 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은혜를 내리신 목적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우리에게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좇아갈 당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육신에게는 일절 아무런 당위가 없다! 그것을 사도는 “육신에게 빚 지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When solicited by the flesh, the believer should reply, “I am the Lord’s.” (A. Pink, “Practical Christianity”)

“Thus indeed we ought to reason, not as some blasphemers are wont to do, who talk idly, and say, — that we must do nothing, because we have no power. But it is as it were to fight against God, when we extinguish the grace offered to us, by contempt and negligence.”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육신에게 빚 지지 않았고 도리어 성신께 빚을 졌기에 육신을 좇아가서는 아니 되는데, 이 둘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음을 13절에서 사도는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을 위해 앞서 5–8절에서 기술한 육신(σάρξ)에 속한 자와 9–11절에 기술한 성신에 속한 자의 대비를 다시 사용하고 있는데, 곧 육신대로 사는 자와 영[성신]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사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과, 둘 사이에는 죽음과 영생의 극명한 결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사실을 12절에 이어서 (우리 말에는 잘 안 나타나 있지만) 그리스어로 γάρ, 영어로는 for를 이용해 연결시키고 있다. 가정법의 형식을 통해 말하고 있는데, 이를 보고 신자들 중에 일부가 영생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을 사도가 염두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다 — 이는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는 승객들에게 “비행기에서 뛰어 내리면 죽겠지만, 가만히 앉아 계시면 삽니다”라고 승무원이 말했다고 해서, 누군가가 뛰어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그가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과연 그렇다 — 사도는 이 말씀을 신자들에게 하고 있으며 (13절 뿐만 아니라 9, 10, 11, 15절의 “너희”는 12절에서 적고 있는 “형제들”이다) 9절과 15절에서도 밝히듯이 신자들은 성신께 속하였음을 사도는 믿었다. 또한 성신께서 그들을 생명으로 이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므로 13절과 8장 전체의 맥락을 읽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논리적인 결론은, 참된 신자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그것이 성신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돌려 말하자면, 바울이 로마서를 보내는 대상인 ‘너희’ 곧 신자들은 성신께 속하였고,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내주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주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예정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신 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내신 법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서는 성신으로 인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역사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2–13절은 11절의 내용에 대한 우리의 ‘아멘’ 곧 신앙 고백이다; 즉,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사람을 없이 하시고 새 사람을 나타내시겠다는 뜻을 보이셨고 그것을 이루기시 위해 성신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육신 대로 사는 사람에서 벗어나 (12절) 성신으로 인해 오히려 육신의 소욕과 싸우도록 새로 지음 받은 사람임을 믿는 것이다 (13절). 참으로 구원의 모든 면모,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 역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로마서 6장 11, 14절)

It is indeed true, that we are justified in Christ through the mercy of God alone; but it is equally true and certain, that all who are justified are called by the Lord, that they may live worthy of their vocation. Let then the faithful learn to embrace him, not only for justification, but also for sanctification, as he has been given to us for both these purposes, lest they rend him asunder by their mutilated faith. —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육신대로 사는 자”는 육신의 지배로 (거기에 대해 항거는 커녕 기쁘게 좇아가는) 살아가는 자로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죽음에 거하는 자이며, 만일 하나님께서 거기서 건져주시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이 또한 예비 되어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바 성신께서 육신으로부터 해방시키신 사람은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것을 가리켜 사도는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표현했다. 몸의 행실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았다. 몸의 행실과 싸우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은 전적으로 성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사도는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6장 13, 19절의 ‘드린다, 바친다’와 그 성격을 같이 한다. 또한 갈라디아서 5:16절과도 성격이 같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

그러므로 참된 성화는 성신 만을 의지하는 믿음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 자기의 종교적 열정으로 행하려 할 때는 단 일보도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14절: 앞서 13절까지 우리는 영생의 길을 걸어갈 빚을 졌다는 것을 배웠는데, 빚진 것은 그것 만이 아니라는 것을 14절에서 본다. 즉 신자는 영원한 생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또한 유업으로 받을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성신께서 내주 하시사, 혼자서는 도저히 어찌할 바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연약함에서 건지시는 은혜를 받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보장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아들이다!

15절: 그러므로, 이렇게 놀라운 성신의 은혜와 보장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신을 주신 이유는, 예전에 죄의 노예로 있을 적 갖고 있던 심판의 두려움을 또 다시 가지라고 주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로 올려 놓으신 것이다!

“Wolfius gives a quotation from the Talmud, by which it appears that “servants” or slaves, and “maids” or bondmaids, were not allowed among the Jews to call their master Abba (אבא), nor their mistress Aima (אימא), these being names which children alone were permitted to use. And Selden says, that there is an evident allusion in this passage to that custom among the Jews. Under the law the people of God were servants, but under the gospel they are made children; and hence the privilege of calling God Abba. Haldane, quoting Claude, gives the same explanation. The repetition of the word is for the sake of emphasis, and is given as an expression of warm, ardent, and intense feeling. See an example of this in our Savior’s prayer in the garden, Mark 14:36, and in what he said on the cross, Matthew 27:46.”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칼빈은 여기서 “영”이라고 번역된 것을 모두 성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두려워 하는 영”을 처음 율법을 받을 때 우리에게 정당한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시는 성신의 은혜로 해석했다. 이와는 달리 여기서 “영”이라고 번역된 것을 우리의 감정을 표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But we may take spirit here, in both instances, as it is often taken, in the sense of disposition or feeling; according to the expression, “the spirit of meekness” — πνεύματι πρᾴοτητος, 1 Corinthians 4:21, and “the spirit of fear” — πνεῦμα δειλίας 2 Timothy 1:7.”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But observe, that fear is connected with bondage, as it cannot be otherwise, but that the law will harass and torment souls with miserable disquietness, as long as it exercises its dominio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For we must ever hold fast this principle, — that we do not rightly pray to God, unless we are surely persuaded in our hearts, that he is our Father, when we so call him with our lips. To this there is a corresponding part, — that our faith has no true evidence, except we call upon God. It is not then without reason that Paul, bringing us to this test, shows that it then only appears how truly any one believes, when they who have embraced the promise of grace, exercise themselves in prayer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Professor Hodge gives this paraphrase, — “Not only does our filial spirit towards God prove that we are his children, but the Holy Spirit itself conveys to our souls the assurance of this delightful fact.” This seems to be the full and precise import of the passage.”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But there is here a striking refutation of the vain notions of the Sophists respecting moral conjecture, which is nothing else but uncertainty and anxiety of mind; nay, rather vacillation and delusion. 256 There is also an answer given here to their objection, for they ask, “How can a man fully know the will of God?” This certainly is not within the reach of man, but it is the testimony of God’s Spirit; and this subject he treats more at large i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from which we may derive a fuller explanation of a passage. Let this truth then stand sure, — that no one can be called a son of God, who does not know himself to be such; and this is called knowledge by John, in order to set forth its certainty. (1 John 5:19, 20.)”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6–18절: 14절에서 한 이야기의 부연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신이 곧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주신다.

““The [Roman] Catholic Church, with which all sects that proceed from Pelagian principles agree, deters from the certainty of the state of grace, and desires uncertainty towards God. Such uncertainty of hearts is then a convenient means to keep men in the leading-strings of the priesthood or ambitious founders of sects; for since they are not allowed to have any certainty themselves respecting their relation to God, they can only rest upon the judgments of their leaders about it, who thus rule souls with absolute dominion; the true evangelic doctrine makes free from such slavery to man. — Olshausen. There is no doubt much truth in these remarks; but another reason may be added: Those who know not themselves what assurance is, cannot consistently teach the doctrine; and real, genuine assurance, is an elevated state, to which man, attached to merely natural principles, can never ascend.”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다. 그 때 까지 우리는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는 어려움이 있다. 구원을 받기 위해 고난이라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가 얻을 유업을 확보하셨다면, 우리가 그 유업을 얻을 때 까지 고난이 없을 것을 기대하기 보다는 오리혀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함을 사도는 가르치는 것이다.

“It is however the design of Paul, as it will presently appear more fully, highly to extol this inheritance promised to us, that we may be contented with it, and manfully despise the allurements of the world, and patiently bear whatever troubles may press on us in this life.”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영어로 “For”라고 종종 번역된 γὰρ 에 대한 중요한 참고사항: ‘설명’ 또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because”라고 읽어도 된다. 그러나 앞에 선언 된 것에 대한 설명이 아닌 이상 “indeed”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The connection can hardly be otherwise [than the meaning of “indeed”], except indeed we consider something understood, as, “Not only so;” and then it may be rendered for, as giving a reason for the qualifying negative. An ellipsis of this kind is not without examples in Greek authors, as well as in the New Testament.” (Owen, footnote in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앞에서 고난의 의미를 이야기 했다. 사도는 이제 우리가 그 고난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다는 안위의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19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길 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14절 참조)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충만한 영광을 입을 날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장차 우리가 이를 영화의 상태는 모든 (!) 피조물들이 어서 속히 나타나길 바라고 고대하는 영광스런 모습이다. 이성이 없는 피조물 조차 고대하는 그 모습을 이성이 있는 우리는 얼마나 더 고대해야 하겠는가!

20-21절: 이성이 없는 피조물에게 “자기 뜻”이라 함은 그것이 보유하고 있는 성향 즉 생명을 유지하고 완전한 상태에 있으려는 본성을 의미한다. “바라는 것” 또한 생물의 의인화이다. 이들 역시 우리가 영광에 이를 때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을 본 절들에서 배울 수 있다. 돌려 말하자면, 인간의 타락과 함께 온 피조물도 저주를 받았다.

“It is then indeed meet for us to consider what a dreadful curse we have deserved, since all created things in themselves blameless, both on earth and in the visible heaven, undergo punishment for our sins; for it has not happened through their own fault, that they are liable to corruption. Thus the condemnation of mankind is imprinted o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and on all creatures. It hence also appears to what excelling glory the sons of God shall be exalted; for all creatures shall be renewed in order to amplify it, and to render it illustrious.

“But he means not that all creatures shall be partakers of the same glory with the sons of God; but that they, according to their nature, shall be participators of a better condition; for God will restore to a perfect state the world, now fallen, together with mankind. But what that perfection will be, as to beasts as well as plants and metals, it is not meet nor right in us to inquire more curiously; for the chief effect of corruption is decay. Some subtle men, but hardly sober-minded, inquire whether all kinds of animals will be immortal; but if reins be given to speculations where will they at length lead us? Let us then be content with this simple doctrine, — that such will be the constitution and the complete order of things, that nothing will be deformed or fading.” (Calvin, Commentary on Romans)

22절: 우리 뿐 만이 아니라 20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별… 억조창생이 우리와 함께 탄식하고 다가올 영광을 고대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유업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우리의 고난에 온 피조물들이 함께 하고 있다.

23절: “그뿐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성신의 처음 익은 열매는 중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더더욱 탄식한다, 우리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그리고 새 몸을 입을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린다. 이것을 “양자 될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날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적(共的)으로 드러나는 날 또는 역사적으로 완성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24절: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즉 우리의 구원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받았다, 즉 구속의 사실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완성은 부활과 함께 온다.

“But since it has pleased God to lay up our salvation, as it were, in his closed bosom, it is expedient for us to toil on earth, to be oppressed, to mourn, to be afflicted, yea, to lie down as half-dead and to be like the dead; for they who seek a visible salvation reject it, as they renounce hope which has been appointed by God as its guardia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25절: 우리가 소망하는 바가 있다면, 기다릴 동안에는 인내가 요구된다. 믿음은 소망을, 소망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26절: “이와 같이”로 번역된 것은 23절에서는 고난에 동참하시는 것을 말했듯이 25절에서 말한바 우리가 인내를 갖고 나아갈 선한 싸움에 또한 동참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우신다”라고 번역된 συναντιλαμβάνεται 는 “함께 지고 간다”는 의미가 있다.

“The word infirmities, being in the plural number, is expressive of extremity. For as experience shows, that except we are supported by God’s hands, we are soon overwhelmed by innumerable evils, Paul reminds us, that though we are in every respect weak, and various infirmities threaten our fall, there is yet sufficient protection in God’s Spirit to preserve us from falling, and to keep us from being overwhelmed by any mass of evils. At the same time these supplies of the Spirt more clearly prove to us, that it is by God’s appointment that we strive, by groanings and sighings, for our redemptio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어떻게 함께 지고 가시는가? 특히 우리는 성신 없이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모르는데, 성신께서 개입하시사 (“간구하신다”라고 번역된 ὑπερεντυγχάνω는 intercede 라는 뜻이다) 바른 기도를 할 수 있다록 도우신다. 그 개입, 중보를 중간에서 우리의 기도를 받아 전달해 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 심령에 바른 심정과 깨달음을 주시사 그 분의 뜻을 땨라 기도할 수 있도록 개입하신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이라고 생각 된다.

“We are indeed bidden to knock; but no one can of himself premeditate even one syllable, except God by the secret impulse of his Spirit knocks at our door, and thus opens for himself our hearts.” (Calvin, Commentary of Romans)

27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중 어떤 것이 성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신다”; 아신다는 것은 낯설지가 않고 버려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성신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28절: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신의 뜻을 따라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응락하시지 않으신다. 특히 지금은 고난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인데, 고난을 당장 없애달라는 기도는 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성신의 뜻이고, 그렇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답이 더 나은 대답이라고 소망을 가질 일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해당 되는 것인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서 나타난다. 바울이 보통 부르심을 “입었다”고 표한할 때는 부르심에 순종한 사람을 의미한다. (예: 로마서 1:6; 고린도전서 1:24; 요한계시록 17:14; 이 의미로 쓰이지 않은 것은 Matthew 20:16. and Matthew 22:14 뿐으로서 거기서는 “초대 받은”의 의미로 쓰였다.) 29절에서 보겠지만, 이 부르심은 단지 구원의 예정 뿐만 아니라 성화 까지 이르고 있다.

29절: “미리 아신 자들”은 당연히 28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미리 정하셨으니” 우리의 성화 조차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된 것임을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 특히, 고난을 통해 구원을 이루려고 하신 것 또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낙심할 것이 없다.

특히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셨음을 주목하자. 아들의 형상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는 자세이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가 없다.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그’는 ‘그 아들’ 곧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마치 형제들이 서로 닮았듯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려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그 가운데서도 머리와 대표 됨을 인하여 그를 맏아들로 지칭한 것이다.

30절: 과거 시제가 쓰였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과거 시제를 통해 현제 진행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문체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다. “미리 정하신”의 의미는 구원의 예정이라기 보다는 29절에서 “미리 정하신” 것 곧, 우리의 성화,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을 의미한다. 우리의 “의롭다 하심”은 그 작정과 조화를 이루는데, 곧 우리의 고난이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 아닌 성화의 도구가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대로 우리의 고난 끝에는 영화가 기다리고 있고, 그 큰 본보기로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영화의 자리에 앉아 계신다.


31–39절: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상에서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사랑을 배웠다. 이제 큰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의 환경과 겉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이김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31절: 결국 우리의 확신과 담대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 터를 두고 있다.

32절: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에게서 환요하게 나타났고 증명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값 없이 주셨고,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있다; 가장 소중한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그 아드님과 함께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Calvin renders χαρίσεται by “donaret;” Capellus more fully, “gratis donabit — will gratuitously give.” Christ himself, and everything that comes with or through him, is a favor freely bestowed, and not what we merit. This shuts out, as Pareus observes, everything as meritorious on the part of man. All is grace. The “all things” include every thing necessary for salvation — every grace now and eternal glory hereafter.” (John Owen, footnote of Calvin’s Commentary on Romans.)

33절: 그러므로 우리의 확신과 기쁨을 앗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우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사도는 누가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는가; 고발해도 소용이 없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이미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더욱 확신을 주기 위해 사도는 34절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확신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한 것임을 사도는 가르치고 있다. 즉 신자가 하나님의 예정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다는 가르침은 명백한 오류이다.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오직 하나님께서만 정죄하실 수 있다; 33절에서도 상기시켰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셨다; 사도는 우리의 확신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어떻게 굳건하게 하시는지 또한 상기시킨다; 즉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죄악을 자신의 공효를 덮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35절: 반어법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다.

36절: 그렇다면, 우린 죽음이 기다린다고 해도 두려워 하지 않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과연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의 앞선 신앙의 선조들도 죽음 앞에서 도망 가지 않았다는 증언을 인용하여 피력하고 있다.

37절: 35절에서 말한 바 끊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넉넉히 이긴다.

38-39절: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 생명, 천사 등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 얘기가 많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우리를 위협한다고 해도, 창조주 하나님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한 우리가 걱정할 것은 없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드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

Leave a Reply (남기신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다만 신원이 불명확한 의견은 게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