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5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1–2절: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아니다; 최종 목적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는 데에 있다;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담는 데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도덕의 목표는 자기 자신을 성인으로 만들거나 종교귀족으로 만드는 데에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 거룩한 몸 곧 교회를 나타내는 데에 있음을 분명히 배울 수 있다. (6절 참조)

3절: 하나님 나라 앞에서 ‘자기’라는 것이 없어져야 함을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본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 인용된 말씀은 시편 69편 9절 말씀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자신을 잊게 만드셨고 또, 하나님을 향한 비방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다고 혹은, 하나님을 위해 비방을 받으셨다는 말씀이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비방하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명예와 인정을 바라는 것은 결코 우리가 취할 것이 못 된다. 주인의 모습을 보고 종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리스도의 성신이 아니고서는 그런 사랑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4절: 구약 성경이 우리의 교훈과 인내와 위로를 위해 베푸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 보다 하위 취급하는 사람들은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높으신 분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 하나 마음에 새겨야 마땅하다.

5절: 참 인내와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그 목적은 우리로 그리스도를 본받게 함이다. 또 그것을 위해 우리의 뜻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세상과 교회가 하나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세상은 어디까지나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하나로 뭉치자고 한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류없는 탁월함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 되고자 한다.

6절: 여기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큰 이유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는 그 최종 목표를 막연하게 신적인 존재에 다가가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혹은 만물을 신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분명한 대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에 두기 때문이다.

8–9절: “할례 받은 자들의 추종자”가 되셨다는 것은 할례가 상징하는 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곧 이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하셨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구원 방법이 다르다는 주장이 터무니 없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두 번째 이유는 이방인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불리우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는 물론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가운데 들어 있는 내용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세기 12:3)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도는 시편 18:49를 인용하고 있다. (시편 18편은 사무엘하 22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10절: 신명기 32:43

11절: 시편 117:1

12절: 이사야 11:10. 이사야에서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한 것을 사도는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해석했다. 왜냐면 성경 곳곳에 나타나듯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에게 소망을 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기도 한다; 왜냐면 오직 여호와 만이 이스라엘의 소망이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아 17:13, 50:7; 시편 146:5, 37:9).

13절: 지금까지 권면한 것을 성도들에게 갖추어 주시기를 사도는 기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우리의 힘 또는 자유의지가 아닌 오직 성신의 능력으로만 성취되기 때문이다. 항상 기도에 힘써야할 이유가 여기 있다.

It hence appears, that the Lord does in no degree measure his precepts according to our strength or the power of free-will; and that he does not command what we ought to do, that we, relying on our own power, may gird up ourselves to render obedience; but that he commands those things which require the aid of his grace, that he may stimulate us in our attention to prayer. —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소망의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전 절에서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어야 함을 말했기 때문이다.


14–15절: 권면으로 인해 로마의 형제들이 낙담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는 사도의 모습이 보인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즉, ‘나 바울이 너희들보다 더 잘났거나 너희가 흠이 많아서 권면의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신 사도의 직분 때문에 그리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고 적었다. 여기서 형제를 권면하는 자가 구비해야 할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선함이 가득하여 형제를 세우는 데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며, 둘째, 그렇게 세워줄 수 있는 진정한 지식과 지혜를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16절: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이라는 번역 보다는 “이방인을 하나님께 바치는”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다. 희생 제사를 주관하던 제사장 직무를 놓고 은유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희생 제사를 드를 때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자이다. 희생 제물은 속죄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깨끗함을 받은 자가 그 터 위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희생 제사이다. 이처럼,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것을 믿고 깨끗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도록 하기 위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칼빈은 본 절을 이용해 예배 때 마다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의 오류를 지적했다.

17–18절: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바울 자신을 내세울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16절에서 말한 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증거로서 선보일 수 있는 것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과연 바울을 불러서 일을 하셨다고 객관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열매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신임장 외에는 의지하지 않는 바울의 겸손함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비방에 흔들리지 않고 바울의 사도적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20절: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곧, 사도들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닦은 터는 여러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 중에서도 모퉁잇돌이 되신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2:20)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을 근본으로 갖고 있다; 사도들의 터는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1) 그러므로 지금 로마서 15:20과 에베소서 2:20의 ‘터’는 그 의미가 고린도전서 3:11에서 말하는 ‘터’와 다르다.

21절: 이사야 52:15 말씀이다. 자신이 일한 결과들을 앞서 언급했는데, 그것들을 사도 직분의 열매로 볼 성경적 근거를 여기서 보이는 것이다.

22–24절: 앞서 얘기한 사도로서의 사역 때문에 그동안 로마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지, 결코 로마를 경시해서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을 만나면 여행을 위한 기운을 얻을 것이라며 로마의 성도들을 높이고 있다.

27절: 영적인 것 곧 영원한 것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이 육적인 것 곧 일시적인 것으로 돕는 것은 마땅히 할 일이다.

30절: “힘을 같이 하여” 기도 해달라고 말한다.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일을 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기도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읽고 바울이 로마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던 것처럼 우리도 (천당에 가 있는) 바울에게 기도를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무슨 방법으로 바울에게 요청할 것이냐이다. ‘기도’라는 수단은 우리의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는 방도로 주신 것이지, 육신이 죽어 천당에 가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 우리의 뜻을 알릴 수단이 된다고 성경은 어디에도 가르치지 않았다.

“If Paul,” saith Estius, “might desire the prayers of the Romans, why might not the Romans desire the prayers of Paul?” I answer, they might desire his prayers, as he did theirs, by a letter directed to him to pray for them. He adds, “If they might desire his prayers for them when living, why not when dead and reigning with Christ?” I answer, Because they could direct no epistle to him, or in any other way acquaint him with their mind.” — Whitby

바울과 같은 사도도 도고(禱告)를 요청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바래야 하겠는가.

31절: 바울에게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성신께서는 미리 알리셨다. 하지만 자신의 안위 보다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더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을 나타나고 있다.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 때문에 혹 예루사렘의 성도들이 자신을 배척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자신을 배척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섬기러 바울은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성도”라 부름으로 예를 다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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