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9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질문은, 이제까지 이야기한 복음이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것이었다면, 어째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반대하는가이다. 복음이 사실이 아니라면 몰라도, 유대인들이 반대한다면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냐이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6절)고 말한다.

이런 질문을 사도가 다루어야 할 중요한 배경이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교회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려 함이다. 일단 구약 시대의 교회는 대부분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교회를 그들의 혈맥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라합, 룻과 같은 이방인들이 간혹 교회의 회원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런 것은 극소수였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이 계시하는 중요한 사상을 제시하면서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는 (로마서 9장 6–8절) 중요한 가르침을 전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리가 바울에겐 기본 사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로마서 9–11장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기본적으로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을 바울이 언급할 경우엔 문맥상 과거의 이스라엘 국가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약을 넘어 신약까지 포괄 되는 내용에 대하여 이스라엘을 언급할 때는 유대 민족이 아닌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뜻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교회에는 보이는 속성과 보이지 않는 속성이 있는데, 바울이 때로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보이는 교회를, 때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택자들의 모임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문맥을 통해 대개 구별 가능하다.


3절: “끊어질지라도…”는 “I could wish…”로서 “만일 끊어지는 것이 가하다면…”이라는 의미이다. 끊어지길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뜨거운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보다 이스라엘을 더 사랑함이 아니요,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 만을 사랑함도 아니다. 또한 4절에서 말하듯이 이는 단순한 동족애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비춤을 받은 공동체에 대한 연민이다.

4절: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여기서 언급된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예배라고 번역된 것은 “예배 의식”(λατρεία)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의 예배로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고안 대로 해서는 아니 된다.

6-7절: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언약이 폐하여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닌 것은, 육체를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인정하셔야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 증거를 바울이 이제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교하며 설명한다.

8절: 그러므로 육체가 아니라 약속을 간직한 자가 (즉 언약을 믿음으로 자기 속에 간직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9-10절: 뿐만 아니라 한 아버지, 한 어머니에서 난 야곱과 에서의 예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1절: 왜 그런가? 구원을 조금치라도 인간의 공로에 두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두기 위해서였다고 사도는 설명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은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다.

이 부분을 읽고 하나님의 택하심은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내다보시고 택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잊고 있는 것은 부패한 사람의 행위 중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즉 미리 내다 본다고 해도 어떤 사람을 구원하실 만한 행위의 근거를 찾으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장 16절)

이 부분에서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 만의 자유로운 의사 결단에 의해 되는 것이지, 인간의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18절: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이 굳는 것 처럼,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은 돌 처럼 단단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는” 것 역시 죄인에게 내리시는 심판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지예정론, 곧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복음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를 보고 구원 여부를 정하셨다는 이론이 틀렸음을 본다; 왜냐면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아니주셨기 때문이라고 18절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Then that frivolous evasion, which the schoolmen have recourse to respecting foreknowledge, falls to the ground: for Paul teaches us, that the ruin of the wicked is not only foreseen by the Lord, but also ordained by his counsel and his will; and Solomon teaches as the same thing, — that not only the destruction of the wicked is foreknown, but that the wicked themselves have been created for this very end — that they may perish. (Proverbs 16:4.)”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9절: 여기서의 반문 곧,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질문은 “이렇게 상황이 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신가?”, 즉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반문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신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은 아니다.

24절: 이제까지 육체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을 말했다. 그 두 번째 증거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자들이, 이방인일찌라도,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25-26절: 호세아의 이 예언은 쫓겨난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쫓겨난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같은 위치로 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이방인에게도 적용하는 것이 가하다.

“In Romans 9:26, the words are taken from Hosea 1:10 and are not verbatim either from the Hebrew or the Septuagint, but the difference is very trifling.”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John Calvin)

27-28절: 육체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이다.

29절: 오직 하나님이 선택을 받은 자 만이 이스라엘이 된다는 증거이다. “만군의 여호와” “LORD of hosts”는 “천지만물의 대주재”라는 뜻이다.


이제 가능한 질문들에 답한다.

30절: 어찌 율법에 그렇게 열심인 이스라엘이 아닌 율법에 관심도 없는 이방인이 의를 얻을 수 있는가? 답은 인간에서 난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깨로 부터 온 의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온 것이다. 믿음을 발휘함으로 의로움을 얻은 것이 아님은, “의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의를 얻었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 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31절: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율법이 가르치는 것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율법은 “의의 법”이라고 할만큼 의를 가르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를 가르치고 있다.

32절: 믿음과 행위가 어떻게 대비 되고 있는지 보라; 행위를 의지하면 할 수록 믿음을 통한 의와는 멀어지는 것이다.

“As then trust in works is the chief hinderance, by which our way to obtain righteousness is closed up, it is necessary that we should wholly renounce it in order that we may depend on God’s goodness alone.” — Calvin, Commentary on Romans

” ‘For they have stumbled at the stone, etc.’ He confirms by a strong reason the preceding sentence. There is indeed nothing more inconsistent than that they should obtain righteousness who strive to destroy it. Christ has been given to us for righteousness, whosoever obtrudes on God the righteousness of works, attempts to rob him of his own office. And hence it appears that whenever men, under the empty pretence of being zealous for righteousness, put confidence in their works, they do in their furious madness carry on war with God himself.” — Calvin, Commentary on Ro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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