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공부 | Scripture Study

    하나님께서는 항상 언제까지고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 잠언 1:26–30 (굵은 글씨는 졸인 강조) 하나님께서 언제까지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음이 반복 되면 어느 시점 이후로는 돌이키는 것이 불가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그 옛날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다. 재앙을 만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거역한 그들을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불순종 가운데 내버려두셨고, 그 결과 거듭되는 재앙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작용하기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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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m,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이 세상 | This World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로마서 15:6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여기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큰 이유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는 그 최종 목표를 막연하게 신적인 존재에 다가가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혹은 만물을 신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분명한 대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에 두기 때문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경배하기 싫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기록된 문서를 보면 수 천 년 전 이집트의 파라오도 자기 수하에 있던 히브리 종들을 놓아줄 것을 이스라엘의 신(神)께서 명하신다는 모세의 말을 전해 듣고도 무릎 꿇기를 거절하였다. 파라오와 그 신하들은 야훼께서 행하시는 기사를 보고 거기서 신적인 권능을 보았지만 히브리 종들의 신(神)이 자기 머리 위에도…

  • 신학 | Theology

    그 날과 그 때는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하신 이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이 신비로운 글에서 사도 요한은 “말씀”에 대하여 적고 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 예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같은 본문 14절). 이와 관련하여 종종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은, 그럼 어째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느냐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24:36 즉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어째서 아버지는 아시지만 자신은 모르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가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한 것과 서로 상충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것은 근거 있는 질문인데—다만, 그 근거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자태에 대한 오해 위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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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 | Salvation,  복음 | Gospel,  신학 | Theology

    기독교는 나약한 자를 위한 종교인가

    종교를 갖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엔 그 이유로서 종교는 나약한 사람이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기 위해 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는 것은,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은 절대의 대권으로 통치하시는 대주재시라는 사실이다; 그 분은 내가 어떻게 감히 어르거나 달랠 수 없는 분이시며, 그런 것을 보시는 분도 아니시다; 영원전부터 선하신 뜻을 따라 작정하신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이루어 나가시는 절대의 통치권자이시다; 그 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왜”라고 물을 자 누구랴; 무슨 공포 영화에 나오듯이 귀신들이 하나님께 거역하지 못한다; 천지만물 모든 피조물이 그 분의 통치 앞에 복종할 뿐이다. 더 두려운 것은 절대의 공의로 다스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각 사람의 무한한 죄 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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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하나님을 두려워 함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다르다고 —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은 엄격하신 분이시나 신약에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 생각하기가 쉬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베드로 앞에서 거짓을 말하였다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행 5장), 주님의 성찬을 분별없이 대하였다가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있었다 (고전 11장). 일일이 이런 것들을 나열하는 것이 필요할까; 구/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엄위로우사 한 호리도 남김 없이 토죄하시며, 또한 한 없는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해서 우리는 얼마나 그 분을 업수이 여기는가? 사람 사이에도 존숭히 여김을 받아야 할 분에게 합당한 공경과 예를 다 하지 않는 것은 죄이거늘, 하물며 도무지 감히 상상할 수 없이 높으신 그 분께 대한 우리의 죄는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도와 도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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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령한 생활 | Spiritual Life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기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은 것.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이 생각은 무서운 교만이다.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다. 왜? 겸손한 것이 미덕이라서? 아니다. 인간은 몇 겁이 지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질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알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를 주께서는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인간의 세상에서도 자식이 부모 앞에서 당당해질 수가 없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도 자식이 부모의 은헤를 다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랴. 우리의 지은 죄를 간과하신 것과 그분의 오래 참으심, 그리고 베푸신 큰 은혜와 사랑 앞에서 감히 어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히 그분을 상대하겠다는 것인가?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그분께 부채를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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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 Theology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창조주, 구주, 주 혹은 왕이라는 칭호로 표현합니다. 창조주라고 할 때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구주라고 할 때는 구원받은 죄인의 입장에서, 주리고 할 때는 종의 입장에서, 왕이라고 할 때는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이와 아울러 또 한 가지 보편적으로 쓰는 표현은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그것은 성부, 성자, 성신 가운데 성부의 위(位)만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대해서 보편적으로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에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실 때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켜 하신 것이지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하실 때는 반드시 성부께 대한 칭호인 것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칭호로서 쓰시는 경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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