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기에 그분의 계명을 지킴
싱클레어 퍼거슨 (Sinclair Ferguson) 목사는 율법주의의 본질을 하나님의 인격 혹은 인품을 그분의 계명과 분리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Legalism is simply separating the law of God from the person of God.” — Sinclair Ferguson 하나님의 계명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서려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에게는 그분의 성품이 묻어난다. 그런 자기 모습을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이면서 연인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즐거워 하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율법주의와 반법주의는 동전의 양면 처럼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반법주의는 율법에 서려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절하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절하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 그 자체 혹은 그로써 내가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자기 백성 대신 세례를 받고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님
세례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주라고 명하신 세례와 그 의미가 같지 않다. 여기서 자세히 세례의 의미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니, 사도행전 19장 3-5절에 나온 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는 정도만 기억하면 좋겠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마태복음 3:11; 21:25 참조) 그 당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 것을 요한이 선뜻 이해하지 못함이 이상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평생 하나님께 순종하신 분이시기에,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를 받아야 할 죄도 없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친히 불 곧 성신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마태복음 3:11).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행위언약에 대한 교리를 이단시하는 것의 위험
교의학에 관한 제이슨 반 블릿 (Jason Van Vliet) 교수의 저서가 <복음 안에서 자라가기>라는 제목으로 성약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것을 읽고 있다. 제 1권 11장은 ‘언약’이 주제인데, ‘행위의 언약'(Covenant of Works)라는 용어에 대해 부정적이고, 심지어 그 언약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불확실하다는 인상을 글에서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표준은 행위언약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그 고백이 바르다고 믿는 나로서는 반 블릿 교수의 설명이 흡족하지 않았다. 행위언약에 대해 반 블릿 교수가 언급하길 꺼리는 것은 그가 속한 캐나다 개혁교회(CanRC)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캐나다 개혁교회는 네덜란드의 해방파 개혁교회 신도들의 이민을 통해 설립되었고, 해방파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스킬더인데, 스킬더는 행위언약을 언급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스킬더가 행위언약을 부정한 이유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스킬더가 걱정한 것 가운데 하나는 카이퍼 학파의…
Spirit & Truth [신령과 진정]
약 한달 늦은 소식이기는 하지만, 성경적 예배에 관한 다큐멘터리 “Spirit & Truth”가 출시되었습니다. 다음 주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vimeo.com/ondemand/spiritandtruth 예배에 관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지, 즉 누가 받으시는 것인지입니다. 받으시는 분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분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배워야 하고, 그것을 떠나서 우리의 예배 방식을 스스로 고안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제 2계명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관련된 글들은 여기에: 예배의 규정적 원리) 아래는 소개해드린 예고편입니다:
[BST.1.1.I] 신학의 계통적 제시에 붙여진 이름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계시를 하셨다. 성경은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또한 가르친다. 먼저 계시의 내용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체계를 이루고 있기에 계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한 공부를 지칭하는 말로 종교개혁 이후로 독일 및 네덜란드 쪽에서는 우리말로 교의학에 해당하는 ‘도그마틱’이란 표현이 주로 쓰였다. 미국쪽에서는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시스테메틱 티올로지’가 더 보편화 되었다. 각 표현에 장단점이 있다. 교의학이라는 표현은 학문의 범위를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학문은 조직적이지 않다는 오해를 피한다는 점에서 장점이고, 그래서 버코프는 그것을 선호하는 듯하다. 하지만 워필드(B. Warfield)는 조직신학이란 표현을 선호한다. 어떤 표현을 쓰던, 본 학문의 정당한 원칙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 교재를 작성한 버코프는 결국 조직신학이라는 표현을 택했다
[BST.0] 버코프 조직신학: 서문
루이스 버코프(Louis Berkhof)의 조직신학 교재가 1930년대에 초간되었을 때는 두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다. 제 1권은 조직신학의 서론(prolegomenon)으로서 조직신학 자체에 대한 기본을 다루었으며, 제 2권에서 조직신학의 세부 내용을 다룬다. 그러다가 1996년에 개정 합권본이 나왔는데 (제 1권 개정증보판, 제 2권 4차 개정증보판), 그 서문은 칼빈신학교의 리처드 멀러(Richard A. Muller)가 썼다. 이 합권본을 읽어 나가면서 인상에 남거나 기억하고 싶은 내용, 혹은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을 이곳에 기회와 여력이 닿는대로 남기려고 한다. 오늘은 서론을 읽었다. 신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신학은 철학의 제분야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리를 놓고 연역하거나 추론하는 학문도 아니다. 성경을 인식의 토대(principium cognocendi)로 하여 성경이 계시하는 바를 배우고 거기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정립하는 것이다. 그 인식의 정수(principium essendi)는 다른 아닌 하나님 당신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