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Eschaton)과 요한계시록
무천년설이 옳다. 이제서야 늘 궁금해 하던 것들이 해소되다.
이제사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 부터 궁금하던 것들이 결국에는 중대한 신앙적 깨우침으로 연결 된다.
우리는 종말적 시대에 살고 있다.
바로 종말의 시대적 흐름 속에 하나님 나라의 전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분명 앞에 큰 빛이 기다리고 있음을 느낀다.
요 몇 일새부터, ‘과연 내가 구원 받은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답은 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여 교회라는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 만드사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늘 인식하고 있던 터였지만, 하나님 나라의 증시라고 할 때 그 하나님 나라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하나님 나라의 증시’는 공구호(空口號) 밖에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무엇을 추구하고 나가는지 알아야 내가 구원 받은 의미를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의 한 지체로서, 전체 중 어떤 부분을 감당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는지 그 내용을 알 때 비로소 교회의 일원으로서 일 할 수 있는 것이고, 부분인 내가 맡아야 할 것을 알려면 당연히 전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일을 지금 시대에 하고 있는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세대에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가? 이것에 대해 섣불리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라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 혈관 속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 그 자체이다. 사랑은 우리가 받을 사명의 원동력이지, 사명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또한 섣불리 ‘세계 전도’가 사명이 될 수 없는 것 역시 전도를 통한 확장은 하나님 나라의 자연스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도 하여 교회에 들어온 새 신자와 교회의 사명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지, 전도 자체가 교회의 사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전도가 교회의 궁극적 사명이랄 것 같으면 교회는 세상에 대해 할 얘기라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밖에는 없다. 왜 전도를 하는가; 전도를 해서 새 생명에 접붙임을 받으면 그 새 생명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가 교회의 사명에 가깝다.
더군다나 전도가 교회의 사명이라면 왜 복음이 로마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였는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엄밀히 말하면 왜 이리 전도가 느리게 진행 되는가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2000 여년을 기다리시는가를 이해 못한다. 어떤 이들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만큼 세계의 어떤 부분은 복음을 늦게 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년수는 100년이 안된다. 2000 년이 되는 동안 듣고 구원 얻는 이가 늘었다면, 죄 가운데 구원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늘어난다. (물론 나는 알미니안적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왜 이리 느린가 하는 그것을 지적하는 것 뿐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천천히 진행시키시는 데에는 분명하게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분명한 목적과 뜻이 있음은 지당한 말이지만, 다시금 그 내용을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성을 느끼게 해준다고나 할까?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비로소 끝이 오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빨리 아니하시냐 이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려 하신다는 것은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 설명임을 앞서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더 빨리 하실 수 있으시다. 바울이 아니면 바울 보다 몇 배 더 능력있게 쓰실 종을 만드셔서 바울이 서쪽으로 가는 동안 그 사람을 동으로 보내셨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인용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이야기다. 사도들은 마지막이 가깝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관심은 결국 “지금 신약 시대의 의미는 무엇인가?“로 선회하게 되었다. 신약 시대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곧 신약 교회의 의미를 안다는 것이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신약 시대의 역사적 진행이 어떠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역사적 흐름과 방향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찾기가 어려웠다. 오직 요한계시록만이 신약 시대의 종점에서 일어날 사건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결국 ‘종말에 일어날 것이라도 알아보자. 종국을 알면 종국을 향해 가는 지금의 의미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 않겠나’하는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계시록은 내게 무서움의 책이었다. 어렸을 적 처음 계시록을 읽은 이후, 딱 한 번 더 대학생 때 읽어 보았다. (이로써 내가 성경을 통독한 것이 몇 번인지 드러나는구나 -.-;;) 666, 적그리스도, 7년 대환란 등 참 읽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뭔가 미래에 관련된 것이고 매우 어렵고 지금과는 큰 상관이 없는 내용,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더라도 계시록은 마지막에 공부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늘 궁금했던 것은, 왜 주님께서는 계시록에서 “이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가이다. 계시록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라면,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라는 명령을 지금 나에게 왜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1-3장 가운데 기록된 내용은 교회들을 향한 말씀이니 거기서는 뭔가 배우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 다음의 계시록 대부분을 이루는 나머지 장들은 나와 큰 상관 없는 것 아닌가? 뭐 전혀 상관 없다고 말은 못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큰 의미로 다가올 대상은 미래의 성도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경의 독자 설정은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성경에 기록된 책 중에 특정 세대만을 (미래의 성도) 위한 내용이 있다?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은 뭔가 전체 성경와 통일성이 결여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천년왕국 같은 내용도 이해가지 않았다. 그런 시기가 왜 필요한가?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계실텐데, 계시록 해석에 관한 대표적 세가지 해석 —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 중 가장 널리 퍼진 해석이 아닌가 싶다. 소위 전천년설 또는 후천년설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직전이냐 직후냐 또는 휴거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고, 대략 두 이론에서 말하는 미래에 일어날 일은: 마지막 때가 이르면 7년 대환란이 시작되고 세계 단일 정부가 들어서고, 7년 환란의 끝에 사단은 결박되고 1000년 동안 이 땅에 태평성대가 이뤄진 뒤 (천년왕국), 천년이 지나고 사단이 다시 놓여 세상을 미혹하면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악의 세력을 쓸어버리시고 백보좌 심판을 행하신 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것이다.
내게는 세계 단일 정부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없고 (왜냐면 내가 보고 느끼는 한 사람의 죄악된 속성 자체가 단일 정부를 거부하기 때문에), 게다가 7년이라는 딱 문자적이고 고정된 기간의 해석도 억지 같았다. (더더군다나 손과 이마에 666표를 준다는 해석은 표면적 문자 해석의 극치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왜 천년왕국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족과 같이 느껴졌다고 할까? 그냥 천년왕국 없이 바로 사단과 악의 세력을 지옥에 넣으시면 될 것을, 굳이 천 년 뒤에 다시 사단을 놓으셔서 또 사람들을 미혹케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거다. 나는 특히 이 천년왕국이 등장하는 이유를 안다면 뭔가 지금 신약 교회의 역사적 의미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몇 일 전 관심을 갖고 천년왕국설을 알아보던 중, 널리 알려진 전천년설 또는 후천년설보다, (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무천년설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왕국은 다름 아닌 지금의 교회 시대라는 것이다. 따로 미래에 천년왕국이 들어서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오직 마지막 한 사건 —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일만 남아 있고, 그 날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것이 계시록에 대한 무천년설 해석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바 하나님 나라의 사상과도 너무 맞는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Heaven)는 멀리 훗날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이미 와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왕권을 발휘하고 계신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금과 미래(새 예루살렘이 오는 그 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이라는 역사적 시기의 삽입은 너무도 불필요한 제도 아닌가?
더군다나 무천년설이 어거스틴 선생, 칼빈 선생, 루터 선생 등이 지지하였던 것임을 알고 나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무천년설은 대개 개혁주의에서 지지하는 해석임을 알고 나니 왜 무천년설이 잘 안 알려져 있는지도 이해가 갔다.) 오히려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설은 18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세대주의 (이들의 대표적 오류는 구약을 성부 하나님의 시대, 예수님의 시대를 성자 하나님의 시대, 그리고 지금을 성령 하나님의 시대로 구분하는 것) 학자들에 의해 유명해졌고, 거기서 ‘휴거’와 같은 개념이 부각 되고, 이것이 미국에 번져 결국 전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무천년설에 의하면 계시록이 계시하는 것은 앞으로 남아 있는 일은 예수님의 재림 뿐이요, 그날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이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이다. 무천년설은 계시록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피한다. 천년왕국에서 100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바 앞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고 하는 7년 환란이라는 것도 어떤 미래의 7년 동안 일어날 일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은 이후 전 신약 시대의 역사의 기술(記述)이라는 것이다. 7 년이라는 숫자 역시 상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전후의 구분도 의미가 없으며 휴거 사건과 같은 개념이 설 곳 또한 없다. 오직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만이 남은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앞두고 있는 ‘지금’이 바로 마지막 때(eschaton)이다.
그제서야 내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궁금증들이 확 풀렸다. “그래서 주님은 계시록에 기록된 것이 ‘속히 될 일’이라고 하셨구나! 그래서 사도들은 서신에서 ‘지금은 마지막 때다. 적그리스도가 이미 일어났다’고 말했던 것이구나!” 계시록에 기록된 것은 훗날 일어날 일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오고 오는 신약 교회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였던 것이다. 우리는 ‘종말'(終末)이라는 말 자체 때문에 계시록이 세상 끝날에 대한 기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성경의 사상(思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부활하시어 다시 오시기 까지의 전 기간을 ‘마지막 때’ 곧 ‘종말’로 본다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 베드로전서 1:20, 표준새번역) 어떤 이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속히 되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썼다고 하나,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베드로후서에 보면 사도는 재림의 시기가 늦을 것임을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쓴 바울 사도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내게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결국 계시록은 신약의 교회를 향한 말씀이고, 그러므로 그 예언 (예언의 예자는 ‘미리 豫’가 아니라 ‘맡을 預’이다) 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요한계시록을 다시 읽었는데, 변화가 있었다. 무서운 내용의 책이 아니라 희망과 소망의 책으로, 사명을 던지는 책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련의 묵상들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라 생각케 된 것은, 내가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는 매주 목요일에 목사님 댁에서 모여 성경공부를 하는데, 얼마 전부터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또 내가 주의 깊게 설교를 듣는 박영선 목사님도 현재 남포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앞으로 요한계시록을 찬찬히 공부하려고 한다. 뭔가 이 공부를 끝내고 나면 큰 빛이 하나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교회가 가는 길과, 그 안에서 내가 맡아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김홍전 목사님의 경우, 지금 시대는 바울 선생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한 바 재림 이전에 나타날 끝무렵의 징조인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앞선 배도(背道)의 현상을 지적하시며, 오늘날은 이미 배도의 시대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지적하신 근거들과 역사적 흐름을 이해한다면, 우리 시대에 교회가 임해야할 전투가 무엇인지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신 분 중 제가 종말론에 심취한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이 계실까 모르겠는데 — 사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그간 기독교에서 대개 잘 알려졌던 종말론 자체가 음침하고 공포스러운 (전천년설 후천년설 영향에 의한) 분위기를 띠었기 때문인데, 역사적 개혁신앙을 고백한다면 종말론이 전혀 공포스러울 수가 없다 — 나는 내일 당장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도 아니고, 종말을 대비하는 어떤 별스러운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몇 백년 후에 오실지도 모르는 것. 중요한 것은 역사관이다. 교회의 큰 선생들, 바울, 베드로, 요한, 어거스틴, 칼빈, 루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대에 와서는 바르트, 엘룰과 같은 학자들도 ‘종말론적 역사관‘을 지녔다. 요한계시록은 전 시대를 위한 주님의 말씀이며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전체 성경을 살펴야 교회가 그 사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알게 되리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생각이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