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 Salvation,  신학 | Theology

흑백논리의 위험성

예컨대 어떤 건강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반드시 숨을 쉬게 되어 있다. 사람의 유전자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다음과 같이 지금 한 번 해 보자: “내가 지금 부터 숨을 쉬어야지”하고 1분이라도 숨을 쉬어 보도록 보자. 귀찮고 힘들어진다. 신경이 자꾸 쓰이고, `숨쉬는 것이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나’ 싶을 것이다. 왜? 우리는 숨을 쉬려고 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다. 숨을 쉬도록 말이다. 가만 있어도 계속 숨을 쉰다.

심장이 뛰는 것도 마찬가지다. 팔, 다리 근육과는 달리 심장 근육은 ‘아, 심장을 계속 움직여야겠다’ 해서 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심장이 뛰지 않았으면’ 해도 계속 뛰는 것이 심장이다. 끊임 없이 뛴다. 이것이 生命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심장을 칼로 찌른다든지 스스로 자해하지 않는 이상 나는 숨을 쉬게 되어 있고 심장이 뛰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흑백 논리 처럼 “내 심장이 뛰고 내가 숨을 쉬는 이유는 내가 스스로 자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는 내가 숨을 쉬길 선택했고, 심장이 뛰길 내가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내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원인은 따로 있다. 내가 그걸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숨쉬길 원한다. 지금부터 열심히 숨을 쉬어야지” 하면 더 귀찮아졌을 것이다.

나는 숨을 쉬게 되어 있고, 심장이 뛰게 되어 있다. 그것을 일부러 멈추려 한다는 것도 이상한 것이지만 일부러 하려고 한다는 것도 이상한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내가 자해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간혹 사람들은 그러한 논리를 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말장난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자해하여 죽었다면,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이 죽은 원인은 당연히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이 논리를 잘 이해해야 한다. 자해하여 죽었다면 그는 자기가 자신을 죽인 것이다. 죽음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살아 숨쉬는 원인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