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이 넘게 전수된 하나님 나라의 도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는 것을 떠나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는데,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리스도인 답게 살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인한 새 사람을 입음으로 외에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그런데, 이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악하고 선하고 예쁘고 더러운 것 중 선하고 예쁜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새 사람이라고, ‘사람’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교적인 생각을 조심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사람들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 출발한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지 아니하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결코 입을 수 없는 것이 새 사람이다. 그렇다면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거듭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만일 그랬다면 위의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왜 이미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옛 사람을 벗으라’고 말했겠는가?
이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일부분이 아니라 거듭나지 아니한 그 전체로서의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하고 아릅답고 죄스럽고 악한 것 중에 악한 것들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죄스러운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선하고 악하고 더럽고 아름다운 것과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그 옛 ‘사람’ 자체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말해서 ‘나’라고 하는 그것, 그 아상(我相), 자기(自己)라고 하는 것이 전체로서 싹 없어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옛 사람을 벗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라고 하는 것이 죽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옛 사람을 벗고는 진공 상태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새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 그것이 인격적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인격이라고 할 때에는 거기에는 편의상 지성적인 활동과 감정적이고 의지적인 활동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므로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큰 선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새 사람을 입혀주신다는 것인데, 그 새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새로운 습관 정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한 피조물, 새로운 인격, 전체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새로운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를 가장 닮았느냐 하면 자기를 창조하신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다 그것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다 나타나지는 아니할지라도, 성신께서 기르시는 새 인격은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가는 인격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랬다 – 지식에 까지 (골 3:10).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전체를 주께 맡기는 그런 정의(情意)적인 모습 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치관과 사상 조차도 하나님 나라적인 새로운 사상과 역사관과 인간관 그리고 법도들로 점점 그 깊이가 깊어지고 체계를 이루며 자라나가야겠다 그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리와 법도들과 사상이 얼마나 호방하고 심오하고 깊은지는 경험해 보지 아니하고는 모를 것이다. 그런 깊이와 넓이와 높이 앞에 눈뜨게 해줄 교역자가 성도들의 곁에 있기를 바래본다.
이 사상적인, 지적인 부분이 결여된 사람은 아무리 정의적인 요소가 강하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름발이 사람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르침과 종교적 현상은 열심과 감정을 무척이나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바른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착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라고 가르침들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복음인가? 그리스도와는 상관 없이, 우리가 하여간 착하게 살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배웠는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런 존재인가? 그저 선한 표본을 보여주는 선지자인가?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아니하였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 (잠 19:2)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인격을 입는 자들이고, 그것은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문구를 보고 ‘야, 이거 좋은 말씀이다. 지켜야겠다.’ 하고는 자기가 열심으로 지켜보려고 하나, 해 보면 잘 안된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자기 열심으로 하라고 애초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도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만 가능한 것이고,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열매가 아닌 성신의 열매 외에는 받으실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그냥 하라고 하셨겠는가? 그에 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생활하는 것인지, 그런 하나님 나라의 생활 법도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계시다. 이러한 것들을 유념하지 않은 채 무작정 ‘성경의 명령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그런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이교적인 노력을 하나님께서 그나마 좋다고 받으신다고 생각한다면 글쎄, 사람의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적인 표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죄와 사망의 법칙을 깨우치고, 그에 반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던지는 생명의 성신의 법을 알아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던지 할 것 아닌가?
그런데도 간간이 이교적인 생각 그대로 성경을 읽고는 ‘착하고 선한 것이 좋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열심을 가지고 생활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힘을 주시고 도와주신다’ 그렇게 성경을 가르치고는 성경에 나오는 높은 표준들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배우지 아니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효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은 우리가 열심으로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가 개입된 것이 있던가?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하나님을 자신의 열심으로 감동시키겠다고 혈기를 내는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고전 15:50). 거듭나고 믿음을 받은 것이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와 은혜로 인한 것인데, 이제 와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겠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합쳐서 하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가능이나 한 것인가? 성령으로 시작했다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것이다 (갈 3:3).
대한민국 국민이 제대로 생활하려면 대한민국의 법과 사회 규범들을 알아야만 하는 것과 비슷하게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내신 하나님 나라의 도리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의 높이와 깊이는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깊고 오묘하고 호방하여서 배워도 배워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역사속에서 갑자기 형성된 것도 아니고, 창세 이후로 이 땅에 있어온 성도들의 거룩한 무리 곧 교회에게 점진적으로 하나님께서 밝히신 것이고 또한 교회는 끊임 없이 전수해 온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고백을 역사적 신앙고백, 또는 역사적 개혁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처럼 기독교는 그저 서로 사랑하고 살아가라는 것 하나로 일축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만이 깨닫고 볼 수 있는 역사관과 인간관과 윤리관이 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자기 손 안에서 논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