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개인의 어려운 사정과 슬픈 사정을 그냥 고(告)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에 관여를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명확하게 붙이지 않은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들으실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기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간 사람은 아담 이래로 하나도 받으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통해서 항상 무자격을 자격 있게 인정하신다는 속죄, 곧 하나님의 칭의의 사실이 늘 붙어다녔습니다. 그 사람을 보지 않으시고 그가 드린 제물이 그를 대신해서 죽고 피를 흘렸다는 사실의 터 위에서만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제사를 드려 달라고 제물을 줄 때도 반드시 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를 해서 “이것이 나입니다” 하는 자기를 대신 표징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이 양이 자기를 대신해서 죽으신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 나라에서 계획하신 대로 상징하는 더 큰 사실, 즉 “하나님의 어린양이 돌아가시는 사실을 보시고 저를 받아 주십시오.” 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의 시초부터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스스로 나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늘 생각했습니다. 아벨도 이렇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자기의 무자격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드리는 것들도 불결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항상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령 기도 가운데 나의 착잡하고 괴롭고 슬프고 어려운 사정을 다 하나님 앞에 고할 때 예수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하늘 높은 보좌 위 가장 영광스러운 데 홀로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역사의 세계에 들어오셔서 역사의 한 부분이 되시고 인류 역사가 가지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진통을 다 맛보셨습니다. 이렇게 당신이 친히 모든 고난을 맛보신 까닭에 연약한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자신의 괴로움과 슬픔을 당신의 슬픔으로 고(告)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시시하고 자자한 문제, 남에게 얘기하더라도 대단치도 않은 문제 하나하나를 당신이 짊어지시고 대언(代言)도 하시고 도고(禱告:중보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에 내가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시시한 문제도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이며 나 개인의 문제나 집안의 문제나 인아족척의 문제나 자녀들의 문제가 시시한 문제 같으나 사람은 그러한 데서 살아가는 것이지 그런 문제 없이 혼자 신선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건실하게 이 땅 위에서 살 때는 인간의 모든 문제와 더불어 싸워 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의 세계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것이지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신선처럼 만들어서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악머구리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아수라 같은 이 세상의 싸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피곤하고 괴롭고 어렵고 슬픈 것으로 하나님을 열 번도 더 괴롭히고 슬프게 해드리는 것들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일일이 다 취하사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이름으로 친히 기도하시고 또한 나도 거기에 합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중요히 여겨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천사가 되지 않는 것이고 신선과 같이 모든 것을 잊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당한 모든 문제와 더불어 씨름해 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당한 문제를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의 문제가 부정하고 시시하고 너절해서 예수님의 이름 같은 고귀한 이름을 그러한 데 붙일 수 없는 것같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거기서 건져내시려고 하나님의 로고스가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남에게 기껏 동정하고 사랑해도 그와 함께 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힘을 다해서 건져 보자고 해도 건지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치 나사로 무덤 곁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건져내시듯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내게 슬픔이 있을 때는 예수님도 같이 눈물 흘리면서 건지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나 우국지정(憂國之情)과 같은 굉장한 일로 슬퍼하는 슬픔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라버니가 죽어서 울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눈물과 함께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인간사의 괴로움과 슬픔에 대해서 예수님은 같이 눈물 흘려 가면서 하나님 앞에 당신의 그 공로를 가지고 “저의 공로를 보시고 제가 구하는 것으로 받아 주시옵소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상이라는 것도 우리의 시시하고 볼품 없고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또 매일 인간사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우수 사려(憂愁思慮)가 다 붙어 있는 그런 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라는 것은 자기 전체를 늘 대표하는 상징인데 어떠한 자신이냐 하면 만물보다 더 거짓된 마음, 항상 시시한 문제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거기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더럽고 추해서 딱 끊어 버려야 하나님께서 받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그냥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을 솔직하게 드리되 자기 스스로 드리는 것은 받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모든 것을 포용해서 드리는 그 속에서 드리는 까닭에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쓴물과 짠물과 단물 모두를 그 속에 포함하는 하해(河海)와 같아서 나의 모든 괴로움과 시름과 슬픔도 포함하시사 하나님 앞에 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 모든 문제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런 것을 대신해 주시는 그 큰 본의가 있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이라는 크신 뜻입니다.
따라서 헌상을 할 때 우리는 “구원의 크신 뜻을 내게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며 드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을 대표한 헌금은 또한 구원의 크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금 자체는 인간성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과 우수와 슬픔과 기쁨 즉, 희노애락을 그 속에 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싸서 하나님 앞에 가장 받으실 만한 훌륭한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예수님의 구원의 크신 목적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 김홍전, “헌상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