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결핍을 알아야
그런데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할 것은 본질적이고 근원적으로 생각할 때, 세상에서는 어떠한 성자(聖者)라도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죄와 상관없이 죄를 안 짓는 생활을 한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단 일초간이라도 죄라는 세계를 떠나서 사는 시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단 일초간이라도 죄를 안 짓는 시간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죄를 안 짓는다든지 짓는다든지 하고 말할 것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는 말을 할 것이 없습니다. 단 일초간이라도 죄를 안 짓는 시간이 없고 늘 죄…속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나 이외에 바깥에 죄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엄격하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내 생활 전부가 죄라는 것입니다. 내 생활의 가장 의롭고 착하고 선한 시간도 죄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본질적으로 결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하나님 앞에 부채(負債)를 자꾸 짊어지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이 마땅히 요구하시는 장성을 하느냐 하면 요구하시는 장성과 당위를 나는 다 채우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그만큼 부채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만큼 부채를 지고 내일 이만큼 부채를 지고 모레 이만큼 부채를 지면 그것이 누적될 때 오늘날 나의 서 있는 자리는 무한히 많은 부채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신 장성이나 이해나 깨달음은 이런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까마득하게 이르지 못해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지금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도 모르는 처지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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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사실이 우리의 이 기본적이고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결핍을 메워 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히 산다, 거룩하다, 신령하다 하는 사실은 내 오늘날의 현실을 전제로 하고 현실에서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이만한 그릇이라 할 때 이 그릇은 당연히 이만해야 할 그릇은 아닙니다. 그것은 굉장히 작은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요구하신 그릇에 비교할 수 없이 작다는 말입니다. 성신님이 나에게 충만히 역사하시더라도 이 그릇에 부어서 충만하신 것입니다. 이 그릇 이상은 커지지 않습니다. 성신이 이 그릇 이상으로 신통하고 이상하게 나타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현실하에 있는 나는 죄를 안 짓는다든지 짓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할 대상이 안 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 김홍전,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