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방식
그러나 우리 주님이 어떤 사람을 붙들고 말씀을 하실 때는, 그사람의 의표(意表) 이외의, 그가 생각한 이외의 전연 딴것을 가지고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사람과 이야기하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지, 그 사람은 전연 생각지도 않고 준비도 안 된 것을 문제로 내놓고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야기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모처럼 시간을 얻어서 또한 그만한 기회를 타서 예수님께 나와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니고데모한테, 그가 전연 생각지도 않고 꿈도 안 꾼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마치 “너 이런 것도 모르느냐?” 하고서는 공격을 하듯이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거나 사람을 다루거나 대하실 때 그런 방법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자비롭고 따듯하게, 항상 가장 이해를 많이 하시는 분으로서 하십니다. 가장 이해를 많이 하시는 분으로서 니고데모 속에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처음부터 핵심적으로 딱 붙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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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사마리아뿐 아니라 갈릴리나 유다에서 전도를 하셨으면 무엇을 전도하셨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죽을 터인데, 그 공로를 너희가 믿어야 산다”고 하셨겠는가? 즉 오늘날의 그 속죄의 교리 체계를 전부 자세히 이야기하셨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제자들도 그 교리 체계에 대해서 형성해 가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무엇까지 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가를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누구나 사람에게는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 한 단계를 올라가고 또 다시 한 단계를 올라갑니다. 그렇게 이끌어 올리는 것이 정당합니다. 처음부터 풍성한 내용을 가져다가 둘러 씌운다 해도 아직 낮은 정도의 깨달음과 빈약한 예비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 김홍전, <예수님의 행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