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종합적이고 견고한 부부의 사랑

그리고 사랑이 중요하다고 그랬는데, 그 사랑이 [부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양을 나타내는 중요한 또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독처하는 사람에게서는 존재하지 않다가 대상이 있음으로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야 세상에 사람이 많으니까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을 못한다는 법이 없으나, 혼인을 안 했을 때의 사랑은 부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혼인을 안 했을 때는 이성(異性)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거기에 또 봉사하는 아가페의 사랑이 붙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친족의 사랑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혈통적인 사랑은 아직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플라토닉하고, 그리워하고, 위하여 목숨이라도 다 주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위하여 목숨을 주겠다는 것은 반드시 혈통적인 사랑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박애(博愛)에도 있는 것이고, 남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다 버릴 수 있는 인도애(人道愛) 가운데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에로스의 극치에 이르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이라도 버려도 좋다는 데까지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것이 고귀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참으로 가져 본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오직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 한 번 가지는 것이지 두 번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 가지게 사람이 되어 있지도 않고……

그런데 그런 사랑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라면 혼인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혼인을 하지 않았을 때 가지고 있던 부분적 사랑이 혼인을 하고 나면 종합적인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종합적인 사랑이라 하더라도 처음 혼인을 하려고 하거나 혼인을 한 후 얼마 동안은 어떤 일정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성립됩니다. 이것은 마치 건물을 지을 때 건물 외벽을 바지랑대로 빙 둘러 세워 놓고 발판도 만들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건물을 다 지으면 바지랑대도 발판도 다 떼어 버리고 혼자 서게 만듭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 한동안은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부부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조건이라는 바지랑대를 둘러 놓고 자꾸 쌓아 올렸지만, 서로간의 관계가 공고해진 다음에는 그까짓 바지랑대는 필요 없게 됩니다. 부부는 결국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누고 사는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 잘난 줄 알고 혼인했다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시시해서 못쓰겠다’ 하고서는 집어치우기로 한다면 세상에 되어 먹은 가정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은 처음부터 엄격하게 규정하기를, 혼인하기 전에는 자기네가 선택을 하여 맞는 사람하고 혼인을 해야 하지만, 일단 혼인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법칙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는 멋대로 못 나가도록 해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 19:6). 부부가 됐으면 이제는 조건을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편 혹 아내가 악인이라도 사랑을 해야 하고 선인이라도 사랑해야 하고, 잘났어도 사랑해야 하고, 못났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혼인할 때 엄숙하게 묻기를, “바람이 불든지 비가 오든지 날이 궂든지 맑든지 병이 있든지 건강하든지 슬프던지 기쁘든지 언제든지 사랑할 것인가”라고 묻지 않습니까? 환경만이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 개인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되었을 때에라도 그것 대문에 사랑이 없어지지 않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부부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또한 가정을 떠받치고 나가는 가장 기저(基低)적인 힘이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에로스만 가지고는 될 수 없습니다. 에로스라는 사랑이 우선 기초가 되어 가지고 서로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스토르게(storgh)라는 친족애 혹은 혈족애가 생기고, 거기서 우애 곧 필리아(filia)라는 사랑이 가지 쳐 나오고, 그것이 더 커질 것 같으면 나중에 아가페(agaph)라는 사랑이 생깁니다.

원래 모든 사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하나님께는 벌써 있는 것이지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순서란 대개 이렇습니다. 사람이 어려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어서 비로소 에로스적인 심적을 가질 대부터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고민도 해보고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자기를 희생하겠다던가, 위하여 자기의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정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랑을 배우는 학교에 입학한 셈입니다. 그래가지고 에로스적인 사랑 가운데 들어가서 차례차례 사랑을 해가다가, 그것이 점점 뜨거워지고 깊어지면 대상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전부를 주고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처음부터 상대방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댓바람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맨 처음에 시작할 때는 아주 냉정하게 관찰합니다. 여러 면을 냉정하게 관찰해 본 결과, ‘어디로 보든지 그 사람은 내가 존경하고 따라가도 좋다’는 자기의 긍정이 생겨야만 에로스도 나오는 것이지, 덮어놓고 오다가다 눈이 맞아 가지고서 맹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의 행위는 사랑도 아니고 말초적임 충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시작하려면 이성(理性)의 요소가 처음부터 필요합니다. 즉,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치를 제대로 판단함 없이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때의 가치 판단이 반드시 정확한 것이 아니라도 적어도 자기가 그때 가지고 있는 척도를 충분히 사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저것도 없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는 이성의 작용에서 시작을 하되, 나중에 살아가노라면 그때 가졌던 이성의 작용이 얼마나 미흡했고 미급했던지를 느끼는 때가 오기는 옵니다. 왜냐하면 그런 나이란 모든 것을 냉철하게 깊이 판단하지 못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자기 눈에, 자기 생각에 좋아 보이고, 따져 보니까 가치가 있어 보인 것뿐이지, 자기보다 지혜와 경험이 많아 사리를 투철하게 보는 사람의 눈에까지 반드시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훨씬 지혜 있고 경험이 많은 사람의 눈에 비친 대로는 아닐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때 자기가 판단해서 결정한 것은 결국 자기의 책임입니다. 자기보다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좋지 않다고 일러줘도 자기 보기에는 좋아 보이니까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기뻐서 만족하고 살았으면 그만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의 모양을 내고, 천박한 사람은 천박한 모양을 내고 사는 식으로, 자기 멋으로 그냥 자랑하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에게 좋으면 그만입니다. 누구나 지혜로운 사람이 보기에 배필이 될 만한 사람을 꼭 얻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혼인을 한 다음 살아가면서 생깁니다. 같이 살다 보니까 처음에는 참 좋아 보였는데, 자꾸 지나면서 결함이 보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결함이 있었는데도 발견하지 못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건실했는데 세월이 가는 동안에 한쪽은 크고 한쪽은 안 클 때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서로 비슷해서 함께 갈 만했는데, 나중에 하나는 장성하고 하나는 정체해 있으니까 키다리와 난쟁이 격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불만과 괴로움이 생깁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혼인한 후 당하는 문제입니다. 또 사람은 장래를 모르는 까닭에 처음에는 다 같이 참 좋다고 만족스럽게 생각했지만, 사는 동안에 하나는 병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앓아 눕는다면 그것도 적지 않은 괴로움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을 줄로 알고 아주 기운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같이 붙들고 같이 밀어대고 화산 지대라도 갈 줄 알았는데, 이제는 등허리에다가 밤낮 짊어지고 가게 되는 그런 괴로움도 생기는 것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처음에는 이러고 저러고 타산에서 시작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부부 생활이 계속 되지를 않습니다. 에로스가 발생할 때의 조건이 언제까지든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고 한번 소실되는 때도 있고, 변형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서로 조건을 달지 않고 서로를 위해서 봉사해 주는 아가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가 병이 났으면, ‘그렇다. 그를 일생 동안 사랑해 주는 이것이 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것이 내 일생의 과업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 중요한 일입니다.

부부간에 서로에게 대한 봉사의 사랑이 없이 연애할 때의 달콤한 사랑만 가지고 시작을 하다가는 벽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연애할 때는 굉장한 것 같지만, 사노라면 병에 걸려 어쩔 줄 모르는 경우도 있고,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자기에게 짐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당해서라도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주를 위해서 기꺼이 봉사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이 일을 잘해 나가면 주께서 큰 교훈을 주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부부 사이에 있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에게 사랑의 총체적인 것, 원만한 것이 생기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랑을 구현하도록 부부를 두신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간에 모든 점에서 만족스럽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싫은 때도 있고 짐스럽게 느껴질 대도 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 가운데 인생의 길에서 서로가 연약하고 결함이 있는 까닭에 자기의 결함을 스스로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져 줄 수 있는 짐이 있다면 져 준다는 것 자체가 주님께 대한 하나의 봉사고 하나의 공부가 되는 줄로 여기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말이야 쉽지, 행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한두 번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덕을 발휘해서 괴로움을 당한 사람을 잘 도와주지만, 그것을 언제 그만둘지 기약도 할 수 없이 계속해서 도와주고 짐을 짊어지고 가게 생겼다면 포기하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365일만이 아니라 3650일이라도 괜찮다. 주님께서 지게 하시면 지고 가는 것이 내 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자리에 두셨으니까 이 자리에서 또 한 걸음 인도하심을 바라고 나가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이다’ 이렇게 작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위대한 일입니다.

–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