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구원 | Salvation,  신학 | Theology

제한속죄와 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값을 하나님께 지불하셨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책 까지 다 주님은 대신 받으셨다. 그것은 2000년 전의 일이었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그것은 이미 뚜렷한 사실로 서있는 것이고 단지 나는 시간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은혜가 내게는 2000년 후인 지금 임하였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를 기다리셨다가 이제 비로소 2000년 전의 예수님의 그 죽음을 나를 대신한 죽음으로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미 그 안에서 창세 이후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의 죄 값을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받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일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죄인들의 죄 값을 받으셨으므로 그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으실 것이다. 공의로서 그 보좌를 삼으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이미 예수님께 모든 인류의 죄책과 저주를 내리셨는데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또 다시 그 심판을 내리실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지셨다는 생각은 궁극적으로 만인구원론 또는 보편구원론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내 생각에는 바르트가 바로 이런 연유에서 만인구원론적인 이론을 펼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보편구원론이야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어긋난다. 이것은 누구나 수긍한다. 그런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값을 치루셨느냐 아니면 그분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 죄값을 치루셨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기독인들이 ‘모든 사람’이라는 보편속죄설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결코 역사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대 기독교인들이 보편속죄설을 별 생각 없이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반론을 제기한 17세기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이 현대 교회에 홍수처럼 퍼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다섯 가지 주장 중에 하나가 바로 보편속죄설이었다. 알미니안의 다섯 가지 이의(remonstrance)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만큼 타락한 것은 아니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
  2.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누가 복음을 믿을지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한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4.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베푸시는 은혜를 사람은 거부할 수 있다.
  5. 한 번 구원을 받은 사람도 훗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나는 늘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들 다섯 가지 이의는 루터, 칼빈, 등 어느 한 사람이 아닌 개혁자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전한 역사적인 신앙고백에 반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다섯 가지 이의에 대해 교회에서는 회의(synod)를 소집했고 약 6개월간의 긴 연구와 논의 끝에 알미니안주의는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는 결정과 함께 그들의 다섯 가지 이의에 대한 답변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T.U.L.I.P. 으로 요약되는 그 유명한 개혁주의 5대 핵심이다. 어느 누가 말하는 식으로 칼빈이 이것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 다섯 가지 핵심이란 역사적인 개혁신앙의 중요한 핵심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위의 알미니안 주장과 차례로 비교해보면 좋다):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의 선택에는 조건이 없다.

Limited Atonement: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주신 자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셨다.

Irresistable Grace: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 밖에 없으며, 그 사역은 반드시 구원의 열매를 맺는다. (R. C. Sproul은 “effectual grace”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Perseverance of Saints: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그 누구도 – 심지어 자기 자신도 – 예수님의 손에서 뺏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제한속죄던지 보편속죄던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속죄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한속죄는 속죄의 ‘대상’을 제한하고 있고, 보편속죄는 속죄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왜 역사적인 개혁신앙이 옳으냐를 얘기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가 더불어 실증해 주고 있다. 다만 나를 괴롭히던 문제는 “그렇다면 도대체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였다. (전도를 왜 해야 하느냐는 이미 해결된 문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택하신 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이라면,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택함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당신을 위해서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이다.

그러나 결국 나의 질문 자체가 우문이었다. 우리는 전도라는 것을 너무 쉽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받은 결과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전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주의 말씀 속에서, 또한 어거스틴, 루터, 칼빈과 같은 선생들이 전한 바 역사적인 개혁신앙 속에서 누누이 배웠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데, 그것이 곧 ‘거듭난다’는 말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듭난 사람에게만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에 절어 있던 나는 구원과 거듭남을 자꾸 혼동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회개하고” : 그러므로 전도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특히 그분의 법을 전해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케하는 것이 우선이다.

“복음을 믿으라”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를 믿는 자에겐 구원이 약속되어 있음을 말해야 한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꼭 속죄와 대속을 처음부터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부터 예수님의 속죄와 부활에 대해 다 알고 따른 것이 아니다. 차차 배우고 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라도 그들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신뢰한다는 믿음이다. 말 그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내 비록 이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할지라도 이분이라면 다 알아서 하실 것이 아니냐. 난 예수님을 믿는다”하는 그런 것이 참 믿음이다. 그런 사람에게 주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6:47; 10:27-29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양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믿는다. 그리고 이 말씀을 힘입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도 확인 되듯이 주님은 그냥 불특정 다수를 위한 고통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