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사람과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세상이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은 애통이다. 세상의 전체적인 조직은 바로 그것을 피하기 위한 어떤 것이라는 전제 하에 되어진 것이다. 인생의 전체적인 조직, 쾌락에 도취되어 있는 것, 오락을 즐기는 사람 안에서 확장되어 가고 있는 열심과 에너지, 돈은 세상이 애통하고 비통해하는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큰 목적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실로 행복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 뿐이다! 이는 세상에서는 결단코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는 신약의 교회들과는 달리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들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사람들로 보이려면 의도적으로 우리는 밝고 즐거움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사상이 인기를 얻어왔다.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즐거움이 아니고 겉으로 입고 있는 그러한 모양을 내라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 교회의 상태가 완전하게 죄의식의 부족과 죄의 교리가 부족함에 기인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것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함께 가면서 필연적으로 피상적인 류의 사람들을 산출하여 내며 매우 합당치 못한 류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출해낼 것임에 틀림없다. 교회가 죄의 기쁨의 복합적인 개념이 부족해 있고 바르지 못하다면 교회가 선교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에 대한 깨우침과 죄를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회심보다 먼저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발견하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인생을 투자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죄의 깨달음을 떠나서 기쁨 얻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기쁨은 죄에 대한 혐오감을 알지 못하고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 마틴 로이드-존스, “산상설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