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열정은 피해만 드릴 뿐
마라톤맨 님의 블로그에서 글을 읽다가 다음의 칼빈 인용을 보았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 그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날의 나를 돌아보면 얼마나, 얼마나 어리석고 형편없고 암매하며 저속한 나의 생각 아래 하나님 앞에 열심을 품고, 또한 그러한 나의 열심을 비록 불완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여삐 받아주시리라고 생각했던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불이 아닌 다른 불로 주께 분향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고린도 교인 중에는 주의 성찬을 분별 없이 대하였다가 목숨을 잃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 64:6)
기독교의 첫 시작이 그것 아닌가 — 비록 부패하였으나 아직은 잔재가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하여 아무리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 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도, 그런 것들로는 하나님께 하나도 인정 받지 못한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 예수님의 의를 덧입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그 후로 신자의 삶에서도 동일한 원칙과 도리로 서 있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주님이 가르치셨던 것 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 거기에는 나의 열심이라든지 그 무엇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도 우리가 목청을 높이고 금식을 하고 열심으로 아뢰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친히 처리하여 주시는 것이고,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의 그 속죄의 은혜를 의지하여 주께 절하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참 가상하구나”하고 받아주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 아닌 그 무엇을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이렇게 악(惡)으로 연결될 뿐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지혜로 동원한 것 중에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며 오히려 삐뚤어지고 어그러져서 썩어지지 않을 것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때로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성경에 가두려고 하느냐고 묻지만, 아 사람들이여,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얻는 유일한 길이 성경 아닌가.
물론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것 이상으로 크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계시된 것은 그분으로부터 나온 바른 계시이며, 그것과 사람의 경험이 동등할 수는 없다. 성경 말씀이 자기의 경험을 해석해주는 것이지, 자기 경험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2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