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몇 주 전부터 교회에서는 예수님과 교회의 신비로운 연합을 주제로 말씀이 증거되고 있다. 어제는 요한일서 4장을 읽었다. 지금까지 그 본문은 항상 사랑을 강조하는 율문처럼 느껴졌었는데, 성령님께서 새롭게 마음을 밝혀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물론 여기에 강조는 “사랑”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전체에 있다 —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9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다는 것임을 어째서 지금까지 몰랐던가. 물론 머리로는 예수님의 희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한다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는 것을 대속이라는 논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죄의 대가와 그것을 대신 값는다는 경제 논리를 믿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구원해 내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있었던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분과 관련된 교리를 의심없이 믿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것인가? 어째서 나는 하나님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있음을 깨우치지 못했던가…
마지막 날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이유를 알 것 같다. 하나님을 전지전능, 거룩한 의 등과 같은 추상적 개념의 집합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마지막 심판 때에 나를 바라보실 하나님의 눈에서 무슨 따스함을 찾을 수 있으랴. 하나님의 식언치 아니하시는 속성이라는 추상적 교리보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믿기가 훨씬 쉽다; 쉬운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이 온데간데 없다. 날 사랑하시는 아빠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아들이 어디 있으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라”(18절)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을 알찌니,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니라.”(17절)
하나님의 사랑이 이토록 큰 것이었던가… 어제까지의 세상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세상이 이토록 다를줄이야.
(개역성경의 번역이 어색해서 조금 수정을 가했다.)
덧글: “하나님의 사랑”에서 “사랑”만 떼어내서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개념 속에 살아가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 교리를 신봉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위에 인용한 요한일서 4:9의 증언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큰 사실로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사실을 떠나 “사랑”만 뚝 떼어내서 추상화시킬 때 ‘보살 예수‘와 같은 얘기가 나온다; 그런 것은 학자들의 아무 의미없는 말장난(abstract nonsense)이다. 사랑이란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것이며 추운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이며,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어 나를 살리셨다. 사랑이란 그렇게 구체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