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전업 주부
Gootjes 교수의 “동정녀 탄생: 여성주의 신학의 걸림돌“이란 글을 읽고, 여자가 전업 주부로 있으면 사회인으로서 자기 의미를 잃는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풍조가 떠올랐다. 물론 그것은 이 세상의 이야기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그렇지 아니하다.
정부가 시민을 통제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약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한 대표적 전략은 첫째, 이혼이 어렵지 않게 할 것, 그리고 둘째, 여성이 직업을 갖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이로써 아이들의 교육은 공교육에 더욱 의존적이 된다. 교육은 통제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다. 이것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구별 없이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세상이야 이것을 정치 논리든 경제 논리든지 어떻게든 해석을 하겠지만, 어쨌든 여성이 전업 주부로 있는 것을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나는 것으로 묘사하는 세상 풍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격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것을 교회가 알지 못 하고 세상 속에 떠내려갈 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불문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우리는 남자 또는 여자로 살고,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여성이 전업 주부로 있는 것은 그 고유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소위 꿈을 찾는다, 비전을 찾는다고 요란한 가운데 형제든 자매든 그것을 직업 전선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과연 바른 생각인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성경의 빌레몬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전업 주부 문제를 하나의 예로 삼아 더 큰 일반적인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항상 있어 온 문제인데,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호방한 사상을 깨우치지 못하고 세상에서 배운 어떤 철학, 윤리를 가지고 자꾸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열심을 발휘하는 경우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들이 그 시대의 윤리관과 철학 또는 정치 경제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빛을 발하기는 커녕 세상의 사상에 파뭍혀 지내거나 또는 그것을 강화하는데 이용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다시 구체적인 예로 돌아와서 전업 주부의 예의 경우 옛날엔 성경을 들고 나와 왜 여자들이 집안에 머물러야 하는지 주장하는 신학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같은 성경을 들고 나와 왜 여자들이 집안에서 해방 되어야 하는지 논증하는 신학자들이 많아졌다. 둘 다 그 시대에 유행하던 관점에 부합 되는 것만 성경에서 발췌해냄으로 결국 참된 지혜와 생명에 이르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