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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란 사실과 제한속죄는 모순인가

이 글에서는 ‘제한속죄’와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이라는 명제가 왜 모순이 아닌지 추적하려고 한다.

(1) 제한속죄의 의미를 돌아봄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14-15,27-29)

그리스도께서는 성부(聖父)께서 그에게 주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고, 그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위하신 양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개혁자들이 제한구속(limited redemption)이라는 제목으로 이름 붙인 내용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부인하는데, 즉 예수께서 구원하실 목적을 가지사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 중에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제한구속’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이 갖고 있는 능력을 제한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능력을 맛보도록 의도된 사람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가르치신 것은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의 분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글 맨 처음에 인용한 요한복음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양이 아닌 무리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0:26)

그렇다면 우린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피흘리셨다는 것을 시인할 수 없다; 왜냐면 예수께서 위하여 죽으셨는데 결국 구원하는데 실패하셨다 하는 것은 위의 요한복음 말씀이 거짓이라는 뜻이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모든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2)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

그렇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은 오직 그 분의 양 때들을 구원할 딱 그만큼의 고난이었는가? 그 외의 사람들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는 질(質)의 그것인가? 이 질문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음 질문은, “과연 우린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은 자기 의지력으로 구원의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창세 전에 누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 것인가는 하나님의 선하시니 뜻에 따라 계획 되었다는 것이 제한속죄의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과연 복음의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과 제한속죄론은 서로 모순인가?

결론을 먼저 얘기하자면, (i)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은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질의 그것이지만, (ii) 그 공효는 인류 전체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을 위한 것이란 목적을 위한 가지고 있다. 바로 (i)의 의미에서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또 그렇게 초청 받았다. 그러나 (ii)의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6:44) 그러므로,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다면, 인류 전체를 구원할 수 있는 그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얼핏 보면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을 보기에 앞서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값이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온 인류의 죄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각 사람, 한 사람의 죄값이 하나님 앞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i)과 (ii)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있는지 살펴보자. 깨끗한 논리를 위해 수학의 예를 들어 유추하겠다. (이 예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맨 아래에 덧붙인다.) 예컨데 자연수의 집합 N = {1, 2, 3, 4, 5, 6, 7, … }과 짝수의 집합 2N = {2, 4, 6, 8, … }은 크기가 같다; 다시 말 해, 자연수의 집합과 짝수의 집합 사이에는 일 대 일 대응 관계가 있다. 무한 집합인 자연수의 집합 N을 “무한한 고통”이라고 이름 붙여보자 (순전히 이름일 뿐이다. 이 집합을 “맛있는 케잌”이라고 이름 붙여도 하등 상관이 없다. 유추관계(analogy)를 밝히기 위해 택한 이름일 뿐이다). 짝수의 집합 2N은 “구원받을 사람들”이라고 이름 붙여보자. 이 두 집합 사이에 있는 일 대 일 대응 관계는 “무한한 고통”에 있는 것을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고 표현해보자. 그렇다면 “무한한 고통”은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부족하지도 않지만 남지도 않는, 필요충분한 크기이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고통”을 “구원받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집합, 그것을 “구원받을 사람들에 들지 못한” 이름한다면, 이 다른 집합 까지에도 적용시킬 수 없다는 말인가? 반드시 그렇진 않다. 예를 들어 짝수의 집합 2N을 지금 “구원받을 사람들”이라 이름 붙였는데, 홀수들의 집합 {1, 3, 5, 7, … }을 “구원받을 사람들에 들지 못한” 집합이라고 하면, 이 집합과 “구원받을 사람들” 집합의 합집합은 아까 “무한한 고통”이라고 이름 붙였던 자연수의 집합 N = {1, 2, 3, … }이므로, 이 “무한한 고통”을 “구원받을 사람들”과 “구원받을 사람들에 들지 못한” 집합 전체에 다시 적용시키고자 하더라도 필요하고도 충분한 크기를 갖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유추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의 양들에게 적용되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 양 때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질의 그것이라 함이 논리적으로 모순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3) 결론

앞서 살펴본 무한한 집합의 예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효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얼핏 생각하면 논리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는 성경의 선언들이 실상 냉철한 논리의 세계로 들어가면 전혀 모순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 하겠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성경의 선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불특정 다수를 위해 죄값을 치루셨으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발판만 마련하셨을 뿐 그것을 취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알미니안주의의 가르침을 부인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복음은 오직 믿기로 작정된 사람들에게만 제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오라하셨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이다. 다만 주께서 변개시키지 않으시는 이상 누구도 예수님을 믿으려 아니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악함이다.

“Christ did not lay down His life to atone for the sins of all mankind, nor for an indefinite number of sinners. His sacrifice was indeed sufficient to save the whole world, had it been designed to do so; but in the purpose of God and in the undertaking of Christ, it was determined that He should make atonement for those who were elected in Him to everlasting life; these only He represented, and these only shall be saved through His redemption. This truth is commonly called limited atonement or particular redemption.” (John 10:14-15, 25-30; John 3:16; Acts 20:28; Rev. 5:9; John 17:9-10.) “We reject the teaching that the Gospel offer of salvation is freely and truly offered only to the elect. We reject the teaching that particular redemption is to be so understood and presented that Christ as ransom and propitiation is not preached or offered to all men indiscriminately.” “We reject the teaching that all will be effectually called and ultimately saved.” — from The CONSTITUTION of th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Being Its Standards Subordinate to the Word of God

— 예시에 대한 부가 설명 (무한대의 속성) —

여기 모든 자연수들의 집함 {1, 2, 3, 4, 5, 6, 7, … }이 있다. 이 집합을 편의상 A 라고 하자:

A = {1, 2, 3, 4, 5, 6, 7, … } = { 모든 자연수들 }.

다음, 여기에 모든 짝수들의 집합 {2, 4, 6, 8, 10, … }이 있다. 이것은 편의상 B라고 하자:

B = {2, 4, 6, 8, 10, 12 … } = { 모든 짝수들 }.

던지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A 가 B 보다 더 큰 집합인가?” 답은 ‘아니다‘이다. 이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집합의 구성원들을 개수를 비교하는 작업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a, b, c}라는 집합이 있고 {ㄱ, ㄴ, ㄷ}이라는 집합이 있다. 이 두 집합을 구성하는 것들의 개수가 같다는 것은 물론 직접 세어보는 방법이 있지만, 이것은 위의 A, B와 같은 무한한 집합에는 적합하지 않다.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면 짝을 맺어주는 방법이 있다. {a, b, c}와 {ㄱ, ㄴ, ㄷ}을 비교할 때 (a, ㄱ)을 짝으로 맺어주고 (b, ㄴ)을 짝으로 맺어주고 끝으로 (c, ㄷ)을 짝으로 맺어주면, 그 어떤 집합에도 남는 구성원 없이, 모든 구성원이 정확히 하나의 짝을 갖고 있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a, b, c}와 {ㄱ, ㄴ, ㄷ}이 같은 개수의 구성원을 같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a, b, c}와 {ㄱ, ㄴ, ㄷ}은 크기가 같은 집합이다.

자, 다시 집합 A, B를 보자. 우리는 짝수들의 배열 2, 4, 6, 8, 10, 12, … 를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

1, 2×2, 2×3, 2×4, 2×5, 2×6, …

보듯이, 집합 B에 있는 모든 숫자는 모두 “2×어떤 숫자” 의 형태로 쓸 수 있고, 바로 그 어떤 숫자를 이용하면 집합 B의 구성원들과 집합 A의 구성원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정확히 하나의 짝을 갖도록 맺어줄 수 있다. 그러므로 A와 B의 크기는 같다.

중요한 메세지는 다음과 같다: 얼핏 보면 집합 A는 집합 B의 구성원들을 세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숫자들을 갖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상 A는 집합 B의 구성원들을 세는데 필요충분하다; 다시 말해 B의 구성원들을 세는데 필요한 개수의 구성원들을 A가 갖고 있지만 그 중에 버릴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A를 가지고 B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숫자들, 즉 홀수들의 집합 C = {1, 3, 5, 7, 9, … } 까지도 세려고 했다면 그것도 역시 가능하다. 왜냐하면 짝수들과 홀수들을 모으면 결국 1, 2, 3, 4, 5, 6, 7, 8,9,… 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지금 짝수들을 세기 위해 집합 A = {1, 2, 3, 4, 5, 6, 7, 8, 9 … }를 준비했다. 이것은 필요하고도 충분한 크기이다. 하지만 만일 A를 가지고 짝수 뿐만 아니라 홀수들 까지 세려고 했다면 그것 역시 가능했다. 이러한 특성은 집합 A 뿐만 아니라 짝수들의 집합인 B 역시 무한하게 많은 구성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한대가 갖고 있는 독특함이다. 우리의 죄값 역시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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