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신(神)개념은 진화하였는가
성경을 비판하는 부류 중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대조시키면서 신(神)개념이 무자비하고 엄한 히브리 민족신의 모습에서 사랑이 많고 포용력 있는 전인류를 위한 신 모습으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 몇 가지만 되돌아보려고 한다.
(1) 아브라함의 기록
자주 등장하는 예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기록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신 것일까? 아직 여러모로 인류 문화가 현대에 비해서 미개하였던 그 당시의 아브라함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음직 하다. 그 때엔 다른 종교들 가운데 인신제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도 그런 제사를 원하신다고 생각한 것이다—바로 이러한 오해를 고쳐주시기 위한 것이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이려 하자 이삭에게 손 대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기 때문이다—이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제서야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다고 말하나, 그들이 간과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손 대지 말라고 하신 때도 역시 이삭을 죽이기 전이라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것을 실제로 칼을 대기 전에 아신 하나님이시라면 애초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실 그 때에도 아셨을 하나님이시다. 고로,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편에 변화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결론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인신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가 분명하고도 여러번 선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깊은 의미를 담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가르치셔야 했던 것일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1에서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치시라고 할 때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산제사”를 원하신다는 것을 직접 설명하시면 안 되는 것일까? 안 될 것이야 없겠지마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아브라함은 수 천년 전의 사람이며 계시의 초기 시대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제 완성된 계시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사도 바울의 글을 읽어도 다 이해가 안 되거늘, 아브라함에게 그런 예지와 통찰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 처럼 일종의 “체험 학습”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아말렉 숙청
사무엘상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을 숙청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당시 모세를 통해 이미 받았던 명령이다. 아말렉의 치라는 이유는 그들이 그 지역의 매우 비열한 대강도단이었기 때문이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설령 아멜렉이 그렇게 흉악한 범죄를 그 지역에서 오래 동안 저질러 왔다 하여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숙청하시는 것은 잔인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자연재해라든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원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거두시는 일이 일어날 경우 그것은 잔인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주위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재(統裁) 아래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 45:7) 역사 속에서 매우 드문 일이기는 하나 어떤 족속이 명맥을 잃고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일들이 있다—예컨대 마야인들이 그렇다; 지금도 마야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는데, 그들의 문명 속에서 발견하는 잔혹함을 볼 때 그들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잔인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아멜렉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잔인하다고 느끼는 것은 생각에 오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 내용을 다 모를 뿐, 또 모양새 만 다를 뿐, 하나님의 그 절대적 통치 대권의 발휘는 예나 지금이나 일관 되게 발현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현대에도 만일 한 사람 또는 단체가 나타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민족을 숙청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위에서 잠시 언급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는 기록된 계시가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종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어디서 환상을 보았다든지 하는 사람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주장이 있다면 반박하기가 쉬울 것이다. 왜냐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그들이 처했던 그 역사 시기, 역사적 사명 아래서 주어진 특수한 명령들이었기 때문이다.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위에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신개념이 진화된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언급되는 대표적인 것들 두 가지만 살펴보았다. 이러한 내용들을 갖고 계속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그러한 긴 논술을 할 자리가 아니므로 간략한 소개로 마치려고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은 일관적이라는 사실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관(神觀)에서 연유된 오해라고 본다.
(참조문헌: 김홍전, “사무엘시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