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기독교 세계관과 자연 환경 파괴
누군가가 이런 글을 올렸다:
인간중심적 자연관 — 현대의 범지구적 환경위기는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이다. 최상의 신, 그의 대리자 인간, 그리고 인간을 위한 정복과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이렇게 순위가 매겨진 세계관으로는 지구는 물론 인간조차 구원할 수 할 수 없다.
“위험한 생각”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했는데, 확인한 바로는 지어낸 말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역사와 성경에 대한 글쓴이의 이해에 있는 결핍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기후 변화, 특히 지구 온난화가 건실한 과학적 사실인지, 그것의 큰 원인이 서구 문명인지, 서구 문명이 세계를 이끌고 있는 것인지, 또 서구 문명이 성경적 세계관의 충실한 반영인지 — 이런 부분에서 글쓴이의 논지에 허점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인간-자연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적은 글쓴이의 기술에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본다. 단적으로 말하면 글쓴이가 말한 것은 성경적 세계관이 아니다. 죄의 종이 된 사람은 결코 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다. 서구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는 글쓴이가 언급한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한 역사가 아니라 반역의 역사이다.
자연-인간-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몇몇
위에서 언급한 글쓴이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우활하게 넘긴 점 몇가지만 지적하자.
(1)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지, 자연을 정복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람이 자연을 다스릴 때 하나님을 본받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훌륭히 통치하시느냐 — 태평성대라고 일컫는 요순 시대에는 백성이 임금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것 처럼, 통치자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천하 만물을 운행하시고 모든 것을 섭리 가운데 치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없다고 망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잘못이랴. 참으로 하나님을 본받아 다스린다는 것은 억지가 없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다스림이다.
(2) 글쓴이는 문화 명령이 등장하는 성경의 첫 장, 창세기 1장 만 읽고 성경을 덮었는가보다. 그 다음 다음 장에 기록된 바 모두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건 곧 인류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들어가 죄의 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과 갈등이 있고, 살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또 죽어서도 영벌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늘날 범지구적 위기는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잘 따라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했고, 또 반역 해왔기 때문이다. 문화 명령을 수행할 능력은 애초에 잃어 버렸다. 그런 인간이 다른 생명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일께다. 구원은 오직 창조주 그 분의 손에 있고 인간은 생명에 거기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3)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 그의 아들에게서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애써 피하려고 하는 광야로 가 시험을 받았다. 거기서 들짐승과 함께 있었다는 마가복음 1장의 기록에서 피조물과 화목한 참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인정하신 유일한 사람, 모든 시험을 이긴 참 사람 예수 그리스도 만이 피조물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일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성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고 억조창생의 죄값을 치루었다.
(4) 그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고통을 받고, 또 성도들 속에 계신 하나님의 성신 또한 탄식하신다는 것이 오히려 성경이 가르치는 세계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유의 통일, 샬롬이 이루어질 때 까지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장 中
(5)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인간을 위한 정복과 관리”라는 명령으로 살짝 바꾸는 글쓴이의 어법이, 마치 그 옛날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식으로 말하던 뱀의 어법을 생각나게 한다. 피조물을 위하여 자기 자신 까지 주신 하나님을 오히려 어떤 열매도 먹지 말라는 매정한 존재로 소개하는 삐뚤어지고 거짓된 입술. 이와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이 또한 생각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한복음 8장 中
서구 문명의 기원이 기독교인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반문을 했다:
하지만 현재의 환경적 재앙은 분명 서구사회의 발달된 물질문명의 결과이고 그 서구 문명은 기독교적 세계관속에서 발달했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이것은 (a) “기독교적 세계관이 우리가 오늘 보는 서구 문명을 가져왔다.” (b) “서구 문명은 물질 문명을 가져왔다.” (c) “물질 문명이 환경 재앙의 원인이다.” (d) “기독교적 세계관이 환경 재앙을 가져왔다.” (a), (b), (c), 고로 (d)라는 말이다.
하지만 (a)는 사실이 아니다. 서구 문명이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옳지만, 기독교가 지금의 서구 문명을 가져온 유일의 근원은 아니다. 유럽 주위의 지중해,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무시한 채 (a)를 사실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역사 이해이다. 게다가 기독교가 유럽에 퍼진 2000 여년의 역사 가운데 자연을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물질 문명이 융성하게 된 것은 15세기 이후 반기독교적인 사상들이 나오면서 부터이다.
여기에 대해 다음 반문이 있었다:
서구 문명은 물론 다양한 영향을 받았겠지요. 아이가 자랄때도 부모의 영향만 어디 받겠습니까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교회도 있고 동네 사람도 있고 그러겠지요. 하지만 다 자란 아이를 평가 할때 잘한다 그러면 부모님이 참 훌륭하시구나 사고치고 그러면 니 부모가 누구야 그러지 누가 동네 사람 누구야 선생 누구야 이러지 않지요. 자본주의. 이거 다 기독교출신이라는 거 부정못합니다. 정말 성서를 보면 적어도 경제에 관한한 빨갱이 사상인데도 말이지요.
허나, 기독교가 서구 문명의 부모라는 것도 지나친 주장이다. 기독교가 유럽에 전해지기 전에 유럽은 이렇다 할 문명이 없었던가? 그리스-로마 문화가 서구 문명의 부모 역할을 했다.
한민족의 환경 파괴
동양은 어떤가? 동양 사람들은 기독교가 유입 되기 전에 자연을 잘 보살폈던가? 한국의 산림이 (일본이 벌목해갔기 때문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무차별적인 벌채와 관리 부족으로 19세기에 이미 얼마나 황폐했는지는 역사적 문헌과 임학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다. 자연을 자신의 보익을 위해 혹사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원인이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머리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예다.
자본주의가 기독교의 산물인가?
자본주의가 기독교 출신이라는 말이 위의 반문에 등장하는데, 자본주의가 기독교 출신이라는 것 또한 정당한 생각이 아니다.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도 자본주의적 경제 형태의 출현을 찾을 수 있다. (아라비아의 상인들은 잘 알려진 예 중 하나이다. 그들은 노예 무역에도 유럽에 비해 수 세기 앞섰다.) 물론 근대 유럽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틀이 잡힌 것은 사실인데, 여기에 사상적인 기틀을 마련해 준 것은 계몽주의이다. 그리고 계몽주의는 기독교 세계관과 많은 부분에서 대척적인 위치에 있다.
성경이 경제에 관한한 빨갱이 사상이라는 것도 성경에 대한 피상적 이해이다. 이런 얘기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초대 교회의 유무상통이다. 그것을 읽고 성경은 유무상통의 경제 체계를 가르친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 시기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오해이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고 하신 예수님 말씀대로이다. 하나님 나라의 큰 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러다가 목숨을 잃었다 (사도행전 5). 거기서도 ‘거짓말 하면 안 된다’ 또는 ‘다른 사람 앞에서 가식적으로 행하면 안 된다’는 윤리적 덕목을 끄집어 내려는 시도가 허다하다. 성경을 읽고 이건 무슨 철학, 무슨 도덕과 비슷하겠거니 하고 넘겨잡기 때문이다.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다.
미국이 청교도 정신 위에 세워진 기독교 국가인가?
끝으로 받은 반문이 다음이다:
온실가스의 산실… 미국… 그 미국의 리더쉽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영향을 주/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게 지나친 주장일까요? 대통령이 취임선서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그 나라 말입니다. 홍선생님 말씀을 듣는다면 건국의 청교도들이 눈물을 뚝 뚝 흘릴겁니다. 그냥 인정해 주세요. 서구문명은 제가 공력이 딸려 포기할테니까.. 미국 만이라도 기독교가 부모같은 역할했다고 말이죠..
물론 “미국의 리더쉽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영향을 주로 받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이 청교도 정신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 항간에 돌아다니는 이야기지만, 틀린 이야기이다. (선풍기 쐬고 잠들면 죽는다는 이야기 못 들어본 한국 사람 없겠지만, 틀린 것 처럼.) 미국은 충실히 계몽주의와 이신론 (deism) 위에 세워진 나라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제퍼슨, 프랭클린, 워싱턴 같은 사람들의 글과 위싱턴 D.C.의 세워진 수 많은 기념 건축물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링컨도 이신론자였다.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는 역사적인 개혁 신앙에서 많이 벗어났다. 하지만 로비 세력으로서는 매우 큰 세력이다. “대통령이 취임선서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그 나라”라고 반문에 말했는데, 그들이 손을 얹은 성경에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라고 적혀있다. 선서할 때 악세사리 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대중을 다스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