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나님 나라 | Church & Kingdom of God,  신학 | Theology

하나님 나라와 자유주의 신학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기독교는 언제 그만 둘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기독교에 대한 질문이니,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에 대해 가르치느 것 중 몇 가지 기초적인 것을 먼저 상기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 마귀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일개 영에 불과하고 감히 하나님께 거역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 중엔 하나님이 없다고 입 여는 것을 볼 때 사람이 귀신 보다 못된 짓을 할 때가 있음은 분명하다.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과연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귀신들은 생사여탈의 절대적 권세를 지니신 분의 존전임을 알아보고 무서워 떨며 부복하였건만, 사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며 욕하였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다.

그 일이 있은지 벌써 20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온 세상은 그 악한자 안에 처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처했다’고 번역된 κεῖμαι 라는 말은 엄마 품에 아기가 안긴 것과 같이 세상이 사단의 품에 안겨 자는 상태를 그린다.

사단은 어떡해서든 그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마치 영토 문제에서 독도는 분쟁 지역으로 부각시키려 하지만 러시아와의 문제는 가능한 잠잠하게 하려는 일본의 이중적인 전략처럼, 사단도 때와 지역에 따라 시끄러운 영적인 영향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도취된 현대 사회에서는 조용히 역사하는 것이 무척 효과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원수 되게 하겠다’는 은혜로운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의 백성을 빼어내사 뱀과 사이가 나빠지게 하셨다. 아담 이래 그 은혜의 언약을 믿는 자들 곧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을 친백성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 — 그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사단은 막아보려하지만 도무지 막을 수가 없다. 사단은 어떡해서든 현상 유지를 하고 사람들이 그저 이 세상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지만, 죽은 자를 살리사 하나님의 것으로 재창조하시는 성신을 누가 막을 것인가.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방어해 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이 사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분의 말씀과 성신의 능력으로 침노해 들어간다. 그 역사적 행보가 우리 앞에 있고, 그것은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가 과연 우리 가운데 있다는 증거로 서 있다. 천국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식의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물론 그 나라의 실상을 깨닫는 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바 성신으로 인한 거듭남이라는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의 역사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언제든지 관념적인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인 진리를 말한다.

이렇게 봤을 때, 계몽주의와 관념주의에 영향 받아 나타난 자유주의 신학은 어떤가? 자유주의의 본고장인 독일의 기독교회는 19세기에 이미 강한 합리주의 아래 물들었다. 그 교회가 히틀러의 나치 앞에서 무엇을 했던가.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 계획과의 연루 되어 사형 당한 이야기는 알려져 있다. 하지만 힘의 철학에 기반한 게르만 민족 재편성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행보와 부딪히는지 비판한 예를 독일 교회에서 찾을 수 있는가. 자유주의 신학의 그 정교한 건설이 어떻게 부실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따로 논할 수도 있겠지만, 진리의 실증이라는 시금석에서 벌써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력한 신학이 교회 쇄신을 위해 필요하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야 거기에 진보네 뭐네 수식어를 붙여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이 허용하는 목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악한자의 품에 누워 있는 세상(κόσμος ὅλος)이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출애굽기 8:28) 도덕적 혹은 종교적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것 다 좋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세상 사람으로서 하는 것이고, 이 세상이 규정하는 범위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되 거기서 거룩한 계시에 접촉하지 못하면 여느 종교, 철학, 도덕에서 생각하는 가르침으로 해석하기가 쉽고, 그러는 동안에 자기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자임하고 세상은 훌륭하다 칭찬할지 몰라도 실상 “사단의 회”라고 타매하실 정도로 타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경우도 그들이 하는 말이 다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거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과연 하나님의 성신으로 재창조를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신령한 나라인가? 일방 복음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교회들 가운데에서는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를 표어로 내거는데, 기독 종교를 통해 각 사람의 인격을 잘 가꾸어서 안온한 시민사회를 만들고 사회적 분란을 막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표방하는 것인가? 반대로 ‘땅 밟기’ 한다는 신도들로 인해 한동안 시끄러웠는데, 그렇게 사람의 종교적 열정으로 ‘하자, 하자’ 해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맺힌다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쳤던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의 도리인가…

죄악과 암매를 공기처럼 마시고 사는 우리는 신선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사상으로 씻기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불쌍히 여겨주시길 바라는 심정으로 주께 절하며 그의 영원하신 언약을 믿고 의지하고 나가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주를 좇아 가겠다는 사람들은 참으로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교만을 품어서는 아니 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라는 말씀에 나타난 바 역사적인 신앙을 체득, 체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