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공간은 가상이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코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교환은 반드시 물리적인 기구와 시공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람 또한 시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물리적인 존재이다. (물리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서 인터넷을 통한 상호 작용에는 반드시 물리적인 효과가 따라온다. 물리적인 효과라 함은 무엇보다도 대상 물체의 시간 속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인터넷 교류 사이트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Facebook 같은 곳.) 서로 정보 교환을 하기 위한 거리적인 제한이 줄어 들었을 뿐, 누군가를 만나 부대꼈을 때 발생하는 기쁨, 분노, 미움, 사랑 등은 여전히 발생한다. (소식을 올리는 자와 읽는 자의 시간차는 상대적인 차이일 뿐이다; 아무리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주고 받는다 하더라도 상대의 성대에서 발생한 음파가 내 귀에 도달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렇게 발생한 효과라는 것은 접속을 끊은 이후에 까지라도 내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분 좋은 혹은 나쁜 정보를 접한 이후에 동요된 나의 마음은 접속을 끊은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소비한 시간은 다시 찾을 수 없다. 만일 그 시간에 원래 했어야 할 일이 있었다면, 그 부채는 쌓이는 것이다. 이것은 거리에 나가 직접 사람을 만나서 상호 작용한 후에 발생하는 효과와 별반 다름 없다; 다른 것은 만나는데 소요된 에너지 뿐이다.
그러므로 인터넷 교류 사이트에 몇 분간 접속하는 것을 실제로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 크게 다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오산이다. 아니, 오히려 상호 작용에 소비되는 에너지가 적다 보니, 과잉 정보 수집에 나서기가 쉽고, 그로 인해 두뇌에 누적되는 피로는 더 클 수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인터넷은 까페, 시장, 혹은 일 터를 집 안으로 끄집어 들어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정작 집 안 사람들을 위해 소비되어야 할 시공간이 어뚱한 데 바쳐지기 쉬운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물리적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라도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컴퓨터를 별 다른 방에 놓고 꼭 필요할 때만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그럴 여유 공간이 없다면, 집에 있는 라우터(router)를 꼭 필요할 때만 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럴 선택권 조차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사용하는 기기의 접속 창구를 닫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강한 결단력을 요구하는지는 시도해 본 사람 만이 안다.)
정보 수집에 대한 정욕, 그 유혹이 틈타기 쉽다는 것이 인터넷 시대의 위험이다. 시험이 손 닿는 곳에 있다. (Temptation is just a click away.) 손가락의 움직임, 그리고 짧은 시간의 투자로, 내 눈 앞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유혹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 세상의 복지에 보탬이 되고, 그것을 위해 소요되는 노력이 작고 미미해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것을 내게 맡기셨고 또 그 방법과 시기 또한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자식은 가담해서 안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 중 광야에 있던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하라는 제안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에 이른 우리는 이제 접속을 끊어야 할 시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