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회는 개혁된 위치에 있는가
미국 개신교는 유럽으로부터 전수 받은 것이지 자기네 땅에서 어떤 개혁을 통해 수립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누가 상기시켰다1. 그 미국의 개신교를 전수 받은 것이 한국의 개신교이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된 한 요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떠오르는 말이 있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이는 교회가 계속 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된 상태에 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개혁된 교회의 상태에서 떨어져 있다면, 개혁된 위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실상 한국의 개신교회는 그 초기부터 개혁된 교회의 각성 내용이 희미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종교개혁의 본질, 쟁점, 혹은 정수라고 할 내용이 처음부터 뚜렷하지 못했고 지금도 전체적으로는 그렇다.
예컨대 개혁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 두 가지로 칼빈은 예배와 복음의 왜곡을 꼽았다. 예배에 대하여서는 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승인하시는 예배 방식이 아닌 인간이 고안해낸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수이 여기는 큰 죄라는 각성이 있었다. 구원에 대하여서는 우리의 믿음이라던지, 행위라던지, 선택이라던지,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비참한 상태이지만, 은혜로운신 하나님께서 하나도 건질 것이 없는 우리의 것들을 간과하시는 대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오직 그리스도’) 구원하시되 처음 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신다는 (‘오직 은혜’) 복음의 사실을 개혁자들은 분명히 간취하였다.
개혁자들의 그러한 자세에 비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관념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조심히 비춰보는 태도를 갖고 있는가? 설교, 기도, 찬송, 헌상에 담긴 내용은 천지의 대주재에게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예배의 주된 목적과 어울리는가? 혹 예배를 기도, 찬송, 말씀으로 구성된 종교예식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복음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은 어떤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실에 대한 각성이 명확하지 못하면 ‘나는 xxx니 그렇지 않은 사람 보다 하나님과 더 가깝다’는 식의 자기 시인이 자리 잡게 된다. (‘xxx니’는 뭐든지 될 수 있다; ‘예수님을 믿으니’, ‘새벽기도를 하니’, ‘신앙생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니’, ‘개혁교회 회원이니’, ‘사기를 치지는 않으니’, 등등.) 반대로 지금보다 더 큰 종교적 열정을 가져야 하나님 앞에 혹은 교인들 앞에 좀 더 위신이 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런 종교적 욕구를 이용해 종교 활동에 열심을 내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비류 없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공로에 우리의 그 무엇을 덧붙이려는 행사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로채는 우람된 짓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완전하다는 복음의 사실을 훼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 꽤 있다. 그럴 때 개혁의 방법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두어야 할텐데, 허다히 많은 경우 인간의 방식,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회 단체를 개혁한다고 할 때 들고 나오는 것들을 그냥 쥐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참된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사용하시는 성신의 능력 만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는 그것을 증언한다.
미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 되는 ‘신’, ‘하나님’, ‘하느님’ 등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잘 설명한 글의 서두에서 읽었다. 그 글의 내용은 내가 평소 갖고 있던 생각 곧, 미국이 이신론 위에 세워진 나라라는 것과 잘 들어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