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Prayer

‘중보기도’는 부적절, ‘도고’라 해야

‘중보기도’라는 말이 한국 교회에서 많이 쓰이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디모데전서 2:5) 진리를 놓고 생각한다면 부적절한 표현이다. 사람들 입에 익지 않았겠지만 ‘도고(禱告)’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개역성경에서 디모데전서 2:1을 번역할 때 사용한 말.)

로마서 15:30을 보면 바울 사도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도고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더 도고의 유익을 기대해야 하겠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도고를 요청한 것을 읽고 우리도 천당에 가 있는 바울에게 도고를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Whitby는 ‘바울이 편지를 통해 도고를 요청한 것을 잊지 말라. 그러니 바울을 본받아 그에게 도고를 요청하고 싶다면 바울한테 편지를 쓰라’고 대답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말씀을 아뢰는 방도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와 기도라는 방도를 통해 교통할 수 있다고 성경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시도는 우상 숭배이다.

물론 우리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서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손에 우리의 기도를 맡겨야 한다. (이것은 기도 뿐만이 아니라 예배, 헌상, 찬송 등 모든 것이 그렇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골로새서 3:17)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새벽에 하던, 밤에 하던, 영어로 하던, 국어로 하던 상관이 없는 것이다 — 기도는 다 예수님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공효 외에 그 무엇으로도 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기쁘게 받으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Comments

  • Rev. David

    어휘 해석에 조심해야 합니다. 중보(mediation)는 “~를 위한 어떤 행위”를 말하며, 도고(intercession)는 “~를 위한 간청”을 뜻합니다. 도고라는 단어의 의미속에는 간청이나 기도라는 구체적 행위/방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중보는 포괄적입니다. 그러므로 두 단어는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intercession 은 중보를 위한 기도(prayer for mediation) 또는 기도를 통한 중보(mediation by prayer)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보는 예수님만이 하는 것이며, 도고는 인간이 하는 것이라고 구분 지으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도고(=중보기도, intercession)은 예수님도, 성령님도 하십니다. 다음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 53:12) Therefore I will give him a portion among the great, and he will divide the spoils with the strong, because he poured out his life unto death, and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For he bore the sin of many, and made intercession for the transgressors.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롬 8:26)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지칭한 단어는 “중보” 가 아니라 “중보자”(mediator)입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중보자가 될 수는 없지만 “중보의 삶”을 살라고 위탁 받았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감히 주님의 제자를 삼고, 양육하고, 세례 주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이러한 사역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닙니다. 내 속에 계시는 주님의 영-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능력과 권세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the Mediator, 신자= a mediator입니다. 이것은 the Priest 와 a priest, the Shepherd 와 a shepherd, the Son 과 a son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보기도와 도고를 다르게 보려는 것과 중보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틀린 개념이라는 주장은 중보기도 운동을 약화시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입니다.

    최근에 튀는 판결로 이목을 받는 판사들을 조심해야 하듯이, 우리는 튀는 주장도 조심해야 합니다.

    • hun

      졸인의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시간 내어 의견도 달아주시니 고맙습니다.

      물론 Rev. David님께서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타인을 위한 기도’라는 뜻으로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러한 기도에 대해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도고는 사람 만이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성신도 도고를 하신다며 인용하신 성경 말씀은 참입니다.

      물론 ‘중보’라는 말이 통상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또 신학적으로는, ‘중보’라는 용어가 독특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Mediate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함부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인들도 그 용어 사용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제 주장은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위에 적으신 Rev. David 님의 주장 중에 과연 Rev. David 님께서 종교개혁의 신앙과 신학을 따르시는 분인지 고민하게 되는 의견들이 있어서 거기에 대한 의견을 달겠습니다.

      > intercession 은 중보를 위한 기도(prayer for mediation) 또는 기도를 통한 중보(mediation by prayer)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제가 아는 영어 사전들 — Collins, Merriam-Webster, New Oxford American Dictionary — 어디에서도 intercession을 prayer of mediation 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표현을 성경에서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중보한다’는 표현은 엄격히 그리스도에게 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 the Mediator, 신자= a mediator입니다. 이것은 the Priest 와 a priest, the Shepherd 와 a shepherd, the Son 과 a son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 역시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신자들이 mediator라고 (아무리 소문자로 써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royal priesthood) 베드로전서의 말씀은 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그런 제사장들의 대표(Priest)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 큰 대제사장 (great high priest)이라고 했습니다. 참되고 영원하신 대제사장께서 오신 후 그 누구도 감히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참되고 영원하신 중보자께서 오신 후 그 누구도 감히 중보자라는 칭호를 (아무리 소문자로 써도) 사용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