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면 지옥에도 계신다
아무도 지옥에 대해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신학자들 중에는 묘한 말로 참된 가르침을 가리우는 자들이 있다. 뉴스앤조이의 톰 라이트의 지옥관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학자들의 특징은 지옥을 ‘하나님과의 단절’, ‘하나님의 방임’, 혹은 ‘하나님의 부재’ 장소로 소개한다는 것이다. (그의 책을 직접 읽지는 않았으나, 기사가 정직하게 쓰여졌다는 가정 아래 파악한 것은 그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큰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아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이다 — 설령 지옥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 요한계시록 14:10
위의 굵은 글씨는 졸인이 강조한 것이다. (누가복음 16:23의 예수님 말씀과 비교해 보라.)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심판하심을 가르치고 있다.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다’는 것은 전혀 망설임 없는 순도 100%의 심판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 되기도 하지만, 지옥에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음을 여기서 본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브리서 10:31) 물론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에는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라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주의 얼굴’을 떠난다는 것을 ‘주의 절대적 대권’에서 벗어난다고 과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 왜냐면 바로 전절인 8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라고 해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형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주의 얼굴’을 떠난다는 것은 민수기 6장에 나타난 여호와의 낯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25–26)
앞서 소개한 기사를 쓴 신광은 목사는 말한다: “기독교 복음은 천국 입장보다는 지옥 면피 수단으로 곡해되기도 했다. 즉 청중들은 천국에 대한 사모함보다는 지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교회에 더 순종적이 되어 갔던 것이다” — 이 얼마나 앞뒤가 안맞는 말인가? 복음을 진정 지옥 면피 수단으로 가르쳤다면 어찌 지옥에 대한 공포로 교회에 더 순종적이 되어 간단 말인가, 지옥을 이미 면피했는데? 오히려 교회에서 지옥의 공포가 강조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복음의 위대한 사실을 가르치지 않을 때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그 횡포를 잊었는가?)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싶다면 복음과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지, 지옥을 듣기 좋은 이론으로 포장한다고 복음이 바르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앞서 인용한 민수기 6:23–25의 은혜는 오직 그 독특한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바랄 수 있는 것이며, 그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지옥의 형벌을 받았기에 그의 백성은 영원히,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따사로운 낯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쁘고도 감사한 소식인가! 종교개혁자들이 작성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복음에 대한 ‘우리의 감사’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