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정할 때 고려할 것들: 참 교회의 외적 표징
8월 중순입니다. 미국의 많은 대학들이 새로운 학년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할 때입니다. 신입생들의 이주가 가장 활발한 때이기도 하지요. 가정과 멀리 떨어지게 된 학생들의 경우, 특히 기독교인일 경우, 새로운 곳에서 적절한 교회를 찾는 것이 고민일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 보다는 개신교인이 더 그러할 것입니다.) 저 역시 유학을 막 왔을 때 그랬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계실 분들에게 생각의 재료를 드리고자 하는 심정으로 지난 날 제가 배운 것들을 돌이켜 보며 몇 가지 고려할 것들을 적어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3,16
1. 교회에 대하여
교회를 생각할 때 성경에서 가르친 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비로운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5:29-32). 몸의 각 지체는 유기적으로 (organically)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체가 몸을 떠나서는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개인의 인격 완성을 최고의 목표로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영광의 정점에 다다름에 따라 그 안에서 나 역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신자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 관계를 보면 목자가 양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개인적인 친밀함이 있는 관계입니다 (3절). 하지만 양 하나 하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양들을 하나의 무리가 되게 하여 인도하는 것이 목자가 마음에 둔 목적임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16절). 주께서는 양들을 인도하시되 무리로써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시는 그 무리 가운데 있지 않은 양들을 찾아 마땅히 있어야 할 무리 가운데 데려다 놓는 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자기 종교관이나 가치관을 따라 방황하거나 엉뚱한 무리 가운데 들어가 있는 양들을 그리스도의 양 무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런 정상적인 상태를 떠나 개인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상 그리스도의 뜻과는 어긋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무리’라는 표현 앞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이야말로 그 무리라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개신교회의 다양한 교파들을 비판합니다. 물론 지금의 수 많은 교파들로의 나뉨 가운데는 사람의 죄악된 성품에 기인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장차 교회는 내용 뿐 아니라 형식면으로도 분명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영광의 정점을 향한 역사의 진행 속에서 교회가 반드시 형식적으로 하나를 유지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형식적결속(uniformity)과 내면적결속(unity)를 구분해야 합니다. 진리를 타협해 가면서 까지 형식적결속을 유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약의 교회가 유대 교회로 부터 쫓겨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로마 교회의 서슬퍼런 흑암의 통치 아래서 유럽이 해방 되는 종교 개혁도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들 중에는 ‘사탄의 회당’라고 표현할 만큼 타락한 교회들도 있습니다 (계 3:9). 그러므로 기독교회라고 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서 그냥 들어가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따르고자 하는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음성을 좇아가는 자태가 뚜렷한 무리들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마음에 좋은대로 교회를 정하고 나가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9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잠 28:26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2. 참 교회의 표징
그렇다면 수 많은 교회들 중에서 과연 그리스도의 음성을 따르는 교회라고 판단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준거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명하신 것에서 찾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8-20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베풀고” 또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에서 나타난 것은 (차례로) 성례전의 집행, 말씀의 강설, 그리고 권징의 시행입니다. 이 세 가지를 순결하고 거룩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참 교회의 표징입니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참 교회는 다음 표징들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복음의 순수한 강설, 그리스도께서 규정하신 것을 따른 성례전의 순결한 시행이 풍성하게 나타나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교회의 권징의 시행이다. 이로써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참 교회는 스스로 제어하며, 말씀과 어긋나는 모든 것을 배격하고, 그 유일한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든다. 이러한 표징들을 통해 참 교회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으며, 누구라도 그러한 교회로부터 분리된 상태는 거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 네덜란드 신앙 고백, 제 29조 중
(1) 말씀의 강설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 가지 범주(category)로 나눌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 \(\Rightarrow\) “복음”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 \(\Rightarrow\) “율법”
복음과 율법이라는 두 범주를 혼동하지 않고 잘 해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법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당위들을 두루 포함하는 범주를 기술하고 있음을 주의해 주십시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과 복음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는 참된 신학도이기 때문입니다. — 마틴 루터 (갈라디아서 2:14 주석 중)
예를 들겠습니다:
- 율법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주 예수를 믿으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들로서, 우리가 행해야할 당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복음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 —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전한다고 할 때는 율법과 복음 잘 구분하여, 치우침 없이 전하여야 합니다 (행 20:27,롬 11:22 참조).
예를 조금 더 들어보겠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읽고 ‘우리도 어떻게 하면 다윗 같이 될 수 있을까’를 주로 논하는 것은 율법의 강론에 해당합니다. 그와는 달리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다윗 보다 더 위대한 용사이며, 어떻게 우리를 골리앗보다 더 큰 원수에게서 건지셨는지’를 논하는 것은 복음의 강설입니다. 에스더 왕비의 이야기를 강해하면서 우리도 어떻게 하면 에스더 왕비 같이 ‘만일 죽으면 죽으리이다’ 고백하는 믿음을 발휘할 수 있을까를 논하는 것은 율법의 강론이지만, 그리스도는 어떻게 죽을 때가 왔을 때 ‘죽겠다’는 순종으로 그의 백성들을 멸망에서 건졌는가를 논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순결하고 전한다는 것은 복음과 율법을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가 복음이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랬을 때 성경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효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 여기서 분명히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없이하시기 위한 것이고, 의로우심 가운데 다시 사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씌워졌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씌위졌습니다. 이를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씻고 또 의롭다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외에 추가로 필요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지, 그 외에 사람이 준비하거나 마련해야 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롬 10:9-13). 여기서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신자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무슨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효”가 그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그 무엇이 그리스도의 공효와 함께 역사하여 구원을 이루게 된다고 (synergism) 가르친다면 그것은 벌써 타락이요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갈 1:6-8). 근래에도 N. T. Wright 같은 유명한 학자가 ‘최후의 심판 때 신자의 생활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기 위한 근거가 된다’는 이론을 편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의 이론을 보면 롬 5:12–20의 평명한 내용을 부인합니다 —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순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 되는 것은 시인하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된다는 이중전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묘하게 복음을 왜곡하는 가르침이 유행하니 늘 주의하시고, 순결한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교회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2) 성례전의 집행
성례전은 통상 ‘언약의 표와 인'(sign and seal of the covenant)이라고 불립니다. 그 언약이란 다름 아닌 창세기 3장에 나타난 바 뱀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과 관련된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언약의 후손이 자기 자손 가운데 날 것임올 약속 받았습니다 (갈 3:16). 그리고 마침내 언약을 이룰 그 자손 곧,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영원한 보증이 되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신자들이 믿고 의지했던 언약은 본질상 동일한 언약이며, 신약과 구약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하나의 언약 공동체입니다 (롬 4:16; 행 2:16–39). 그 언약의 표와 인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할례와 유월절 만찬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그것들을 세례와 성찬으로 새롭게 하셨습니다 (골 2:11-12; 고전 11:23-26). 로마 교회에서는 일곱 가지 성례전이 있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고 명시된 것은 세례와 성찬 뿐입니다. 침례교회에서는 세례를 할례와 연결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언약의 연속성과 어긋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찬을 함부로 집행했다가 징계를 받았으니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고전 11:29-30). 물론 유월절 만찬 역시 그 뜻을 이해하면서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출 12:26-27).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성찬을 베풀 때는 반드시 복음의 사실을 이해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참여해야 하지, 그냥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권할 수는 없습니다. 성례전을 거룩하게 집행하는 것은 참된 교회의 표징 중 하나입니다.
(3) 권징의 시행
예수께서는 형제가 범죄할 경우 그의 회개를 위해 교회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 가르치셨습니다 (마 18:15-17). 형제를 권면하고 교회의 불순을 제거하기 위해 권징은 엄격히 시행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기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삼일교회에서 시무했던 전병욱 목사의 권징이 바르게 시행 되지 않아 그리스도께 얼마나 많은 누가 되고 있는지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권징의 성실한 시행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징계의 현장 보다는 권면의 현장을 살피기가 아무래도 쉬울 것입니다. 권징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장로들이 성도들의 권면을 어떻게 애쓰는지 살펴보십시오. 장로들이 성도들을 성실하게 심방하는 교회를 찾을 수 있다면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직분자들이 성경에서 가르친 기준에 따라 세워지는지 또한 보십시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했습니다 (엡 2:20). 교회의 제도는 사람들이 함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이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 받아 전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3. 기타 현실적으로 고려할 것들
이상의 큰 지표들 아래 추가로 생각해 볼만한 것들 몇 가지를 적습니다.
-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는가 — 16세기 기독교 종교개혁은 인류 역사상 그 어디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위대한 개혁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와 같은 걸출한 신앙고백들이 교회의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반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개혁자들의 신앙고백을 정죄하는 공의회를 열었고, 지금까지도 로마 교회의 교도권은 그들의 공의회 결정에 아무런 오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를 살펴보실 때 그 교회에서는 어떤 신앙고백을 표방하는지 잘 알아보시고 참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좇는 교회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의 분자가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의 신앙고백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방문하시는 교회에서 신앙고백서가 유명무실한 것은 아닌지,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실천적으로 고백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미국에서 교회를 찾으신다면 NAPARC 소속의 교회 가운데 찾아 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다른 곳에 계신 분들은 ICRC 소속 교회 부터 찾아 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물론 건전한 교단에 가입 되어 있다고 해서 그 교회가 꼭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직접 방문하시고, 방문하신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과 떠나오신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에게 자세한 것을 물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말씀에 근거한 예배 형식을 따르는가 — 시내산 아래서 황금 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다름 아닌 자기네를 이집트에서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여 예배했습니다 (출 32:4). 하지만, 그 사이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 있었고, 그가 받아온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한답시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 것을 명하고 있었습니다 (출 20:4).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민 26:61). 가장 가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우리 멋대로 드릴 수 없는 것이고 그분께서 계시하신 말씀에 따라 드려야 합니다. 요새는 “예배를 경험한다”는 말이 많이 유행하는데, “경험한다”는 것은 콘서트에 있는 청중이나 관중에게 적합한 표현입니다. 예배는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이고, 내 기분과 상관 없이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금하지 않았다면 괞찮다고 생각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그렇다면, 예를 들어, 멜 깁슨 감독이 제작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의 장면들을 예배 시간에 보는 것이 과연 예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바른 예배의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 또한 배우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 가족 중심의 교회인가 —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유아들도 참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신 29:11). 예수께서도 어린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이중으로 강조하여 명하셨습니다 (마 19:14). 그리스도께서 보증이 되신 영원한 언약의 복을 나누는 예배 시간에 남녀노소 다양한 세대들이 모이는지 한 번 보십시오. 그것이 적극적으로 권장 되는지 살펴 보십시오. “청년 중심의 교회”와 같이 어떤 특정 세대를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꼭 이민 교회이어야 하는가 — 이것은 한국을 떠나오신 분들에게 해당합니다.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민 교회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역할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참된 교회의 표징들이 뚜렷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내게 익숙한 환경을 찾아 이민 교회를 출석한다는 것을 과연 그리스도께서 가납하시겠는지 진지하게 여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회원으로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 한다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롬 14:7-8). 외국에 계시다면 그곳 사람들과 함께 성도의 교통을 나누는 것 역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