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교리의 중요성
(For English version, see: Scripture on the Importance of Doctrine)
들어가는 말
교리는 따분하고 분열을 가져올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 조차, 자신이 자각하지 못할 뿐, 신봉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내 죄 때문이다”는 것은 교리이다 —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그것은 내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신학적 진술’은 교리이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교리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대략 두 가지 뜻으로 사용 된다:
- 성경 그 자체
- 성경에 기록된 내용
(1)번의 의미로 말한다면 예배 시간의 목사의 설교는 결코 (성경을 직접 읽을 때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2)번의 의미로 말한다면, 목사의 가르치는 내용이 성경의 내용과 부합될 때, 우리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1)번의 의미로 말한다면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지만, (2)번의 의미로 말한다면 사도신경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2)번의 의미로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술 뿐만 아니라 시와 노래 등 다양한 것들이 기록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신학적인 논술과 교리들 또한 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는 성경의 기록에서 “그의 죽으심”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술인 반면, 우리가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는 진술은 신학적 진술 곧 교리이다. 성경에 명시된 교리인 것이다. (성경에 명시된 교리가 있는가 하면, 명시된 교리로 부터 논리적으로 유추한 교리들 또한 있다. 지금은 성경에 명시된 교리에만 집중하기로 하자.)
이참에 ‘교리'(敎理)의 뜻을 분명히 하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교리는 “종교적인 원리나 이치” 혹은 어떤 종교/종파에서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정의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하나의 종교적인 원리이기에 “교리”이며, 특히 기독교에서 진리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종교적인 원리나 이치는 (교리라는 말의 정의상) 다 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종교적인 원리나 이치를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과 다름 없다. “난 교리는 모르겠고 오직 성경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얼핏 들으면 성경을 참으로 높이는 것 같지만 실상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는 소치이다. 하나님 당신이 아닌 성경 자체를 숭앙하는 것에 가깝다고 하겠다. 성경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내용”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려 하신 그분의 의사(意思)이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가 2천여 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신학적 진술 즉 교리를 우리로 믿게 하기 위해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고 사도 요한은 적고 있다 (요 20:31). 이처럼, 성경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학적 진술 즉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발생한 기독교와 기독교회는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학적 교리 즉 신앙고백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리와 신학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만든 교리가 있기에 더욱 그리하다. 사람의 교리가 교회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리와 신학은 진리요 참 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교리와 신학은 거짓이요 오류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
성경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우리가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이라 혹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고 부르는 의미를 잠시 짚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하나님께 가서 받아쓰기를 해 온 것이라는 뜻인가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것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주된 이유인가)? 그래서 거기에 적힌 조사 하나 까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어떤 신령한 주술 처럼, 조사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읽을 때 능력이 발생한다는 것인가? 혹은 그 경구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 그것을 읽거나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영험한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인가? 만일 그런 것이라면 성경을 원어로 읽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생각임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언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념, 사상, 가르침, 감정 등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랬을 때 성경이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가운데 담긴 가르침들, 다시 말해, 교리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은 습득한 교리에 대한 지적 인식과 감동적 느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를 맺는 믿음에 도달하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성신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지 성신과 상관 없이 성경 구절들을 줄줄 외운다고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잠시 로마서를 예로 들어보자. 바울이 많은 편지들을 썼을 텐데, 그 중에서 로마서를 우리가 성경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이 편지는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것이오”하고 누구에게 얘기했기 때문인가? 혹은 교회가 어떤 공의회를 통해 “로마서는 성경 가운데 들어간다” 결정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교회는 바울의 로마서에 담긴 가르침이, 다른 말로, 교리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인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가 되어 교회는 로마서가 성경 가운데 하나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런데서도 볼 수 있듯이, 성경이 마땅히 믿고 따라야 할 것으로 가르치는 것들 즉 교리들을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과연 성경은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말로 교리, 영어로 doctrin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을라카흐(לֶקַח) 혹은 쉐마아(שְׁמוּעָה), 그리스어는 디다스칼리아(διδασκαλία)와 디다케(διδαχή) 등이 있다. 개역성경에서는 교리라는 말 대신 주로 “교훈” 혹은 “도리”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관련된 어휘로 헤트로디다스칼레오(ἑτεροδιδασκαλέω)가 있는데, 직역하자면 “다른 교리”라는 뜻으로, 바른 교리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교리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몇가지 소제목 아래 모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교리를 가르치시고 또 사용하신다
예수께서는 바른 교리를 사용하여 양육하신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 4:6)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시고 믿음을 요구하셨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0–27)
예수께서 사도들을 세우신 목적 중 하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위함이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딛 1:1–2)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교리 가르치는 것을 힘썼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교리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0)
요한1서가 기록된 목적중 하나는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교리를 가르치려 함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1 5:13)
영을 분별하기 위해 교리를 살필 것을 가르쳤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1 4:1–3)
성신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우리의 지성의 영역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성신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도록 하신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
하나님의 형상은 지식의 영역도 포함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10)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지적인 기능을 새롭게 하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한 것은 그리스어로 νοῦς로서, 영어로는 mind, 즉 사람의 지적인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삼상 2:3)
하나님께서는 바른 지식을 주신다.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시 94:10)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은 지식과 명철을 가지고 양육한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렘 3:15)
하나님의 말씀은 명철과 지식을 준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119:66)
하나님께서는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신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잠 2:6)
바른 교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는 생활은 불가능하다
교리의 문제는 실천의 문제로 이어진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3–5)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태가 아니다.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딤후 3:6–8)
바른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바른 지식 없는 열정은 악하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잠 19:2)
하나님께서는 헌상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하나님의 제사장은 지식을 지켜야 한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말 2:7)
하나님의 일꾼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 지식과 […]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고후 6:4–7)
성도들은 믿음에 덕과 지식을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 1:5)
진리를 거역하는 것은 회개의 대상이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딤후 2:25)
흑암의 세력은 바른 교리를 공격한다
악한 영들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 4:1)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 거짓 선생들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꾸민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3–15)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타락으로 이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1–5)
하나님께서는 바른 교리를 거스르는 것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법은 바른 교리를 거스르는 것을 죄로 여긴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딤전 1:8–10)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사들을 심판하신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2:1–3)
불의 가운데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 1:18)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 3:15)
성도들은 바른 교리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 1:3)
영적인 싸움은 사상의 영역에 까지 미친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 10:4–5)
교회는 자신들이 어떤 교리를 따르는지 살펴야 한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 4:16)
교회는 바른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딛 2:1)
교회는 바른 교리를 가르칠 사람들을 길러야 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교회는 바른 교리로 권면하고 거스르는 자를 책망해야 한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딛 1:9)
성도들은 바른 지식 가운데 서로 권면해야 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롬 15:14)
바울은 칭의의 교리에 대한 부실한 이해로 교인들을 잘못 인도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1–16)
하지만 바울은 잘못된 동기로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그에 반해 복음을 조금이라도 왜곡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동기를 가졌다해도 모든 힘을 다해 막았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5–1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7–9)
교회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못 가르치게 해야 한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 1:3–4)
성경은 바른 교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성경 해석하는 것을 경고한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3–4)
교회는 진리를 거슬러 거치게 하는 자들과 갈라서야 한다
교회는 바른 교리에 대해서는 지혜롭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거치게 하는 자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롬 16:17–19)
온전하지 못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9)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하나이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요2 1:7–10)
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4–6)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려면
성경이 바른 교리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가르치는지 이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른 교리를 어떻게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가?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믿음을 설명하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교만을 부른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
지식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5–7)
선조들이 물려준 신앙고백을 존중하라.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