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고려할 것
혼인의 원형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이다 (엡 5:31–32). 돌려말하자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닮은 일체성을 구현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혼인의 관계이다. 이와 관련된 김헌수 목사님의 강설 중 일부분이다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교회 안에서도 ‘혼인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런 것을 물을 때에 물밑에서 몰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고백과 삶의 여정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상대의 반응이 있으면, ‘우리 서로 교제의 기간을 정하여 놓고 주님께서 혼인으로 인도하시는 일이 있을지 잘 확인해 보자’는 그런 이야기를 서로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몰래 하다 보면 오히려 이상한 쪽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숨기는 것보다는 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자신을 평가하거나 믿음으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은 상당히 신령한 지혜가 요구되는 문제입니다. 부모님이나 믿음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나 아니면 교회 직분자의 도움을 얻어 가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것이 없이 그냥 몇 번 만났을 때에 따뜻하게 해 주니까 정이 들었고 그래서 울고불고 하면서, 흔히 하는 말로 ‘정 때문에’ 혼인을 한다면, 그 ‘정 때문에’ 평생 짊어질 수 없는 짐을 지게 됩니다. 혼인을 하고 나면, 이제 정이 떨어져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정’은 결코 혼인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혼인은 주님의 언약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혼인의 관계에서 주님께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거룩한 언약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혼인에 들어갈 때에도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서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진실한가? 그 고백을 따라서 살아온 생활의 족적이 있는가? 이제 주님과 그 백성의 언약을 더 풍성하게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 혼인의 관계로 인도하시는 일이 있는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교제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누구와 교제하다가 맞지 않으면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헤어지면서도 서로 신앙상의 큰 유익을 얻습니다. 꼭꼭 감춰두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믿음으로 정당하게 평가하고 고백하면서 과정을 밟으면 주님의 인도를 바르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데서 신앙은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신앙은 지식과 의지와 고귀한 정서,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함께 가는 전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을 잘 잡고 그 목표를 향해서 혼인한 사람은 그 다음의 다른 것들은 작은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태도로 혼인하면 혼인의 목적을 향해서 그냥 쑥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혼인한 사람을 보면, ‘어, 사람이 일 년 사이에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할 정도가 됩니다. 2년 지나고 3년 지나면서도 그 목표를 향해서 죽 살아가면, 그 가정은 교회 안에서 아주 훌륭하고 풍요로운 가정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핵심을 놓치면 차츰 온갖 문제가 다 드러납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 될지 모를 정도의 문제들이 생깁니다. 핵심을 놓치고 혼인했기 때문에 평생 동안 사람이 질 수 없는 짐을 짊어지고 고생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직 교회에 공적인 신앙고백도 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매우 철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혼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고백을 받아들이면 똑같이 철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혼인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려고 준비하는 것이 혼인을 가장 잘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혼인의 관계에서 핵심은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교제를 하거나 혼인을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핵심으로 잡고 나아가면, 주님께서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그의 백성에게 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 김헌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3』 311–313쪽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