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순종을 나의 순종처럼 여기시고 의롭다 하심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소위 한국인 신학자로서 이름이 났다고 하는 김세윤 교수가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를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접한 뒤로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active obedience)과 우리 칭의의 관한 역사적인 신앙고백에 대해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약적 율법주의: “Get In by Grace, Stay In by Obedience”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가르치는 칭의론의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그러한 의롭다하심 가운데 머물러야 하고, 성공적으로 머물러야 마지막 심판 때에 정말 의롭다는 확인을 받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처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만, 의롭다하심 가운데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아닌)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에 “은혜로 들어오고, 순종으로 머무른다”(get in by grace, stay in by obedience)는 것이 언약적 율법주의의 핵심이다. (후자의 ‘순종’이라는 표현 대신 ‘행위'(works) 혹은 ‘신실함'(faithfulness)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처음 칭의는 그리스도를 믿어 죄 용서를 받는 것으로서 이는 마치 우리가 갖고 있는 지저분한 도화지를 그리스도의 공효로 깨끗이 지워서 새로운 도화지를 주신 것과 같고 (언약으로의 진입),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그림을 도화지에 잘 그려나가면 최후의 심판 때에 그 그림을 보시고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즉 칭의에 우리의 행위 역시 참고하신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신앙고백: “Get In by Christ, Stay In by Christ”
언약적 율법주의의 시각과는 달리 역사적인 개혁교회는 우리의 행위는 조금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질이 아니며, 칭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효에 근거한 것임을 고백하였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칭의라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사람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으로서 그것을 위해서는 죄 지은 것은 없던 것으로 여기고, 안 지킨 율법을 지킨 것으로 여기는 두가지 사실이 다 필요한데, 죄 지은 것을 없던 것으로 여기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심판을 받아주신 것이고, 우리가 안 지킨 율법을 지킨 것 처럼 여기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율법 요구를 완전히 이룬 삶을 지상에서 사신 것이다. 우리 죄를 없이하기 위해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순종'(passive obedience)과 우리의 의를 위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active obedience)이 우리 칭의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근거라는 것이 역사적인 신앙고백이다. 앞서 사용한 도화지의 예화를 다시 사용하자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그림을 그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의 기준 앞에서는 전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못 되고 그리스도의 공효에 더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대신 그리스도의 완벽한 그림을 우리가 그린 것 처럼 여기시고 늘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위대한 사실이자 그리스도의 비류없는 아름다움이다.
바울 서신에서 발견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잠시 살펴보자. 로마서의 다음 말씀을 눈여겨 보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위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내줌(죽으심)과 살아나심(부활)에 각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죽으신 것은 우리 범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시 사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서라 했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이것을 답하기 위해서는 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예수는 신인(神人)이니까 다시 사셨다”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예수가 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율법을 단 한 순간의 예외도 없이 완벽하게 지킨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로운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고 얘기한다 (행 2:23-32).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위와 같이 로마서에 적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을 우리의 의롭다하심과 연관을 짓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 말씀에서 또 드러난다 (괄호 및 굵은 글씨는 졸인 첨가):
한 사람이 [아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예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물론 여기서 말하는 순종을 십자가 사건으로 한정 지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의 다른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우리의 구원과 관련짓고 있다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만일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 뿐이라면 지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곧바로 골고다로 가시는 것만으로도 구속의 성업을 달성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나신 것은 잉태될 때부터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들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실은, 우리의 칭의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생에 걸친 완벽한 율법의 순종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1 즉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 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 된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의 사실이 우리 칭의의 근거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에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분명하게 고백했다. 아래에서는 그것들을 살펴보자. (신앙고백 가운데 굵은 글씨는 졸인의 강조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에 대한 역사적인 신앙고백들
그리스도의 순종을 우리의 것으로 돌려 의롭다 여기심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 까지 우리의 것으로 여기시는 사실이 있음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C]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HC 60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까?
답: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만 됩니다.2 비록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어겼고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3 여전히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다고4 나의 양심이 고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 은혜로5 그리스도의 온전히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선물로 주십니다.6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실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7 오직 믿는 마음으로만 나는 이 선물을 받습니다.8
네덜란드 신앙고백[BC]은 우리의 칭의와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에 관해 무엇이라 고백하는가:
BC 23.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의 의에 관하여: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죄 사함에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의 또한 발견 된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다윗과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준 바 선행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이라고 고백한다.9 바울 사도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무상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10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기초를 의지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11 당신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고, 우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시인하며,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도 혹은 우리에게서 나온 그 무엇도 의지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12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순종 만을 의지하고 거기에 안식한다.13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의 순종은 우리의 것이 된다.14 이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담대함을 주기에 충분하니,15 떨림 가운데 자신을 무화과 잎으로 덮으려 했던 우리 시조 할아버지 아담과는16 다른 방식으로 양심 속의 두려움, 공포, 및 무서움에서 해방이 됨이다. 그리고, 참으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그 어떤 다른 피조물을, 아무리 조금일지라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면 삼킴이 됨을 받고야 말리라!17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윗처럼 기도해야 마땅하다: “주의 종을 재판에 부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1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CF]은 어떤가?
WCF 11.1. 하나님께서 효력있게 부르시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또한 무상으로 의롭다 하신다.19 이는 그들에게 의를 주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각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 혹은 그들의 행실 중 그 어떤 것 때문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혹은 믿음 그 자체, 또는 믿음의 발휘, 아니면 그 어떤 복음적인 순종이라도 그것을 그들에게 의로 전가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배상을 그들에게 전가하시기 때문이다.20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또 거기서 안식하는데, 그 믿음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다.21
WCF 11.3. 그렇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 모든 사람들의 죄책을 그리스도는 자기의 순종과 죽음을 가지고 완전히 갚으셨는데, 이 때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에 대한 정당하고 완전한 배상을 그들 대신 실제적으로 이행하신 것이다.22 그래도 그들이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을 무상 은혜라 함은,23 성부께서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주시고24 또 그리스도의 순종과 배상을 그들의 것으로 받으신25 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찾지 않으시고 무상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신 것은 죄인들을 의롭다하심에 있어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와 풍성한 은혜가 모두 영화롭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26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닌 수단
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C 11.1)을 보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지만 그 믿음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근거는 전혀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믿음은 구원의 선물을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고, 구원의 근거가 아님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역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HC 61문: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27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28
비유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효를 믿음이라고 하는 우리의 손에 담아주시는데, 이는 우리 손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그 무엇을 찾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믿음을 우리의 “빈 손”(empty hand)라고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믿음을 통해 반드시 감사의 열매를 맺게 하심
사람의 공로가 아닌 전적인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은혜로운 칭의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HC 64문: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29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30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감사의 열매 곧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로 작게나마 관여할 수 있겠는가 할 때,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고백한다:
HC 62문: 우리의 선행은 왜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 합니다.31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라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3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자:
WCF 11.2.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거기에 안식하는 이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33하지만 그 믿음은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 단독으로 있지 않고 언제나 다른 모든 구원의 은헤들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34
WCF 16.5. 우리는 최고의 선행으로도 죄사함 또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영생을 받는데 기여할 수 없는데,35 이는 우리의 선행과 장차 올 영광 사이의 격심한 부조화,36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간격 때문이다 — 우리의 선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보탬을 드릴 수도 없고37 혹은 우리 죄책을 덜 수도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도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따랐을 뿐이며 무익한 종일 뿐이다.38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선행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성신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인데,39 우리를 통해 나오는 그것은 오염이 되었고 너무나 많은 결핍과 결함이 섞여 있어서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40
우리의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과 성화와 관련해 네덜란드 신앙고백 역시 같은 고백을 한다:
BC 24. 사람의 성화와 선행에 관하여: 우리는 참 믿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신의 사역으로 발생하는 믿음은41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여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함을 믿으며,42 또한 죄의 종된 상태에서 해방시킴을 믿는다.43 그러므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 대해 태만하게 만든다는 말보다 진실에서 먼 것은 없다.44 오히려 그 반대로 참 믿음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행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사랑함 혹은 멸망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참 믿음이 사람에게서 열매를 맺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곧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종류는 헛된 믿음이 아니라45 성경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한 그것인데,46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가운데 명령하신 일들에 순종하도록 운동력을 불어넣는다.
그러한 순종은 믿음의 선한 뿌리에서 발생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 성결케 된 만큼,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으로 보신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이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는데 조금도 기여를 하지 못하니,47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무런 선행을 하기 전에, 의롭다하심을 받기 때문이다.48 의롭다하심을 받기 전에 선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나무가 좋지 않으면 열매가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49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에 힘쓰지만 그것을 우리의 공으로 삼으려 함이 아니다 (우리의 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가?). 아니, 우리의 선행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채무가 생기기 보다는 도리어 하나님께 우리가 빚을 지는 것이니,50 이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해, 우리가 의지를 갖고 실천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51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자: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52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에 대해 상을 베푸신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당신이 주신 선물에 영예를 입혀주시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53 더욱이, 비록 우리가 선을 행해도, 우리는 우리 구원의 근거를 거기서 찾지 않는다54 — 왜냐하면 우리의 행실 가운데 육신의 사욕으로 오염 되지 않고 죄책이 없는 것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55 설령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배격하실 이유는 한 번의 범죄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에 안식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늘 의문 가운데 있을 것이고, 불확실함 속에 흔들릴 것이며, 가련한 우리 양심은 끊임 없는 번뇌에 휩싸일 것이다.56
비류 없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에스더 왕비는 자신의 미모를 가지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 자기 백성을 멸망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의 대권으로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는 에스더 왕비 조차 접근하지 못한다. 의와 공의로 보좌의 기초를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불로 삼킴을 당할 뿐이다 (시 89:14, 50:3; 사 33:14). 그러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인정 받은 단 한 사람 있으니,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법을 완벽히 지킨 그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흠 없는 자기 피를 가지고,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얻어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순전한 복음 만이 참된 감사와 찬송 곧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불러일으킨다.
언약적 율법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확인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를 기다리지 않는다. 아니, 심판대에 가기도 전에, 마지막 나팔이 불 때, 우리는 홀연히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런 몸을 입게 된다 (고전 15:49-57). 이것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고전 15:57). 흠 없는 순종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의 단 번의 제사로 당신에게 속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 결과이다 (히 10:10-14).
사실 고난의 순종(passive obedience)과 율법의 순종(active obedience)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다 —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이 없었다면 그의 죽음이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이 될 수 없고, 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당신의 순종의 일부분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시작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실상 십자가는 고난의 정점이요, 이 땅에 오시는 것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었으며, 율법 아래 나시는 것 자체가 당신의 낮아지심의 일부이다. ↩
롬 3:21-26; 5:1-2; 갈 2:16; 엡 2:8-9; 빌 3:9 ↩
롬 3:9-12; 약 2:10-11 ↩
롬 7:23 ↩
신 9:6; 겔 36:22; 롬 3:24; 엡 2:8; 딛 3:5 ↩
롬 4:24-25; 고후 5:21; 요일 2:1-2 ↩
롬 4:4-8; 고후 5:19 ↩
요 3:18; 롬 3:22 ↩
눅 1:77; 골 1:14; 시 32:1-2; 롬 4:6-7 ↩
롬 3:23-24; 행 4:12 ↩
시 115:1; 고전 4:7; 롬 4:2 ↩
고전 4:7; 롬 4:2; 고전 1:29-31 ↩
롬 5:19 ↩
히 11:6-7; 엡 2:8; 고후 5:19; 딤전 2:6 ↩
롬 5:1; 엡 3:12; 요일 2:1 ↩
창 3:7 ↩
사 33:14; 신 27:26; 약 2:10 ↩
시 130:3; 마 18:23-26; 시 143:2; 눅 16:15 ↩
롬 8:30, 3:24 ↩
롬 3:22, 3:24-25, 3:27-28, 4:5-8, 5:17-19; 고후 5:19, 5:21; 딛 3:5, 3:7; 엡 1:7; 렘 23:6; 고전 1:30-31 ↩
행 10:43, 13:38-39; 갈 2:16; 빌 3:9; 엡 2:7-8 ↩
롬 5:8-10, 5:19; 딤전 2:5-6; 히 10:10, 10:14; 단 9:24, 9:26; 사 53:4-6, 53:10-12 ↩
롬 3:24; 엡 1:7 ↩
롬 8:32 ↩
고후 5:21; 마 3:17; 엡 5:2 ↩
롬 3:26; 엡 2:7 ↩
고전 1:30; 2:2 ↩
롬 10:10; 요일 5:10 ↩
롬 3:8 ↩
시 92:12-15; 마 7:18; 눅 6:43-45; 요 15:5 ↩
신 27:26; 갈 3:10 ↩
사 64:6 ↩
요 1:12; 롬 3:28, 롬 5:1 ↩
약 2:17, 2:22, 2:26; 갈 5:6 ↩
롬 3:20, 4:2, 4:4, 4:6; 엡 2:8-9; 딛 3:5-7 ↩
롬 8:18; 시 16:2 ↩
욥 22:2-3, 35:7-8 ↩
눅 17:10 ↩
갈 5:22-23 ↩
사 64:6; 갈 5:17; 롬 7:15, 7:18; 시 143:2, 130:3 ↩
벧전 1:23; 롬 10:17; 요 5:24 ↩
살전 1:5; 롬 8:15; 요 6:29; 골 2:12; 빌 1:1, 1:29; 엡 2:8 ↩
행 15:9; 롬 6:4, 6:22; 딛 2:12; 요 8:36 ↩
딛 2:12 ↩
딛 3:8; 요 15:5; 히 11:6; 딤전 1:5 ↩
딤전 1:5; 갈 5:6; 딛 3:8 ↩
딤후 1:9; 롬 9:32; 딛 3:5 ↩
롬 4:4; 창 4:4 ↩
히 11:6; 롬 14:23; 창 4:4; 마 7:17 ↩
고전 4:7; 사 26:12; 갈 3:5; 살전 2:13 ↩
빌 2:13 ↩
눅 17:10 ↩
마 10:42, 25ㅣ34-35; 계 2:11, 3:12, 3:21; 롬 2:6; 요2 8; 롬 11:6 ↩
엡 2:9-10 ↩
사 64:6 ↩
사 28:16; 롬 10:11; 하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