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20-121문)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주기도문의 서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읽고 삼위 중 성부(聖父)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해석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 당신을 부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볼 수 있다 (아래는 독립개신교회 번역본):
120문: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 명하셨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기도의 첫머리에서부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공경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셨는데,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으며 [1],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부모가 땅의 좋은 것들을 거절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
121문: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하나님의 천상(天上)의 위엄을 땅의 것으로 생각지 않고 [3],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우리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4].
[1] 사 63:16; 요 20:17; 갈 4:6
[2] 마 7:9-11; 눅 11:11-13
[3] 대하 6:18-19; 렘 23:23-24; 행 17:24-25
[4] 롬 8:31-32
다음은 이와 관련한 김헌수 목사님의 강설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는 아직 오순절 성신 강림이 있기 전이었습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만대의 교회가 그러한 기도를 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만대의 교회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셨고 또 오순절에 성신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길을 열어 주셨고, 성신께서는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는 말을 가르쳐 주셔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 삼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과 성신께서 우리에게 아빠라고 가르쳐 주시는 일을 통하여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짧은 기도의 말이지만 삼위일체의 가르침이 이 안에 함께 있습니다. 동방 교부 가운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29-389 혹은 390)라는 사람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한 분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즉시 삼위의 휘광으로 휘감겨 가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세 분을 생각할 때에는 곧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며,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모든 영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시는 데 있어서도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있고 성신께서 하시는 일이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에 세 분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일을 이루신 것이고 성신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그러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에는 ‘이것이 참으로 영광스럽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은혜를 받게 되었는가?’ 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감사한 마음으로 부르게 됩니다.
— 김헌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4』 95–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