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삶에 대한 칼빈의 사상
신자의 삶에 대한 칼빈의 태도 혹은 신학에 대하여 근래에 마이클 호튼 (M. Horton) 교수가 책을 냈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관련된 인터뷰들 몇몇을 읽고 혹은 듣고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책에 대한 추천사에서 싱클레어 퍼거슨 (S. B. Ferguson) 교수는 경고(?)를 하고 있는데, 신자의 삶에 대한 칼빈의 사상에 관한 책이라고 읽기 시작하지만 곧 칼빈의 신학 전체를 맛보게 되는 책이라 한다.
과연 그렇다. 그것이 참 신앙, 참 신학,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개혁 신앙과 그 신학이다 — 한 두 마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깊이는 우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항간에는 소위 ‘칼빈주의 5대강령’과 같은 말들이 돌아다니지만 그런 것들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잘못된 표현인지를 생각할 때 그런 문구를 만들어낸 사람은 큰 잘못을 한 것이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호튼 교수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그 짧은 인터뷰 가운데서도 이전에 알지 못했던 칼빈에 관한 것들을 또 배울 수 있었다. 영어로 된 것을 국어로 번역하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몇 가지 인상 깊었던 것 몇몇을 여기 기록한다:
- 칼빈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경건'(piety)이었다. 그가 “교회 개혁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면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 첫번째로 든 것은 (칭의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타락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규정해준 것에서 벗어나 우상숭배로 가득한 당시의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예배에서 불순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칼빈의 경건에는 믿음(교리)과 행위(실천)가 분리 되지 않는다. 믿음과 행위를 “구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는 것은 사실 그 당시 신학자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오늘날 (적어도 한국에서는) ‘경건’이라는 말은 퍽 감성적인 느낌을 갖고 어떤 면에서는 믿음의 “내용”(교리)와 그다지 관계가 없는듯 취급 되지만, 실상 기독교에서 바른 믿음 없이는 바른 실천이 불가능하고, 바른 실천이 없는 바른 믿음은 모순으로 여긴다.
- 칼빈의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이루신 크신 일 곧 복음 사실에서 경건은 시작 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우상 공장(idol factory)과 같아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신 하나님이 아닌 자기식대로의 신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신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참된 경건은 언제나 하나님과 당신의 말씀에서 시작한다.
- 칼빈의 경건은 개인에서 시작해서 교회로 번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시작해서 개인에게 미친다. 경건을 일차적으로 개인의 덕목으로 여기는 우리의 습관과는 차이가 있다. 경건은 그리스도의 복음 사실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 복음 사실에 대한 표(sign)와 인(seal)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친히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은 경건을 위해 중대한 자리를 차지한다. 교회는 개개인의 신앙 나눔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과 그 성례전, 그리고 그것들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성신과 함께 발생하였다.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하나님의 절대권 못지 않게 칼빈이 중요하게 여긴 주제이다. 그래서 칼빈은 기도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심판자에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아버지의 품에 기대어 풀지 못하는 문제를 의탁하는 것이다.
- 칼빈은 자기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이었다. 칼빈도 간증 거리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야기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긴듯 하다.
이외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들이 많았다. 어쨌든 책을 구해서 읽을 일이다. 칼빈과 같은 사람은 과연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