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요한1서 3:1-3)
요한1서 2장 24-29절을 놓고 이전 강설에서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가를 배웠다.
요한1서 3장 1-3절과 함께하는 이번 강설에서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원하도록 만드는지 상고한다. (강설 녹음 연결 고리)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이끄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비류 없는 사랑이다 (1절).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9) 그 사랑은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가 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위치로 옮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는 호세아 1:10의 말씀을 이루신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 2:9)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만장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은 말씀 한 마디면 당장에 가능한 일이지마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는 당신의 친 아드님께서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대가를 치루셔야 했다.
그 사랑은 앞으로 더욱 풍성하게 경험할 사랑이다 (2절). 마치 혼인을 통해 남녀가 종합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위치로 들어가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는 지금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즐거움과 다함이 없는 사랑 가운데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랑이다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는 말씀은 우리 보고 이제 가서 열심히 수양(修養)을 하라는 뜻이 아님은 명료하다.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스스로 깨끗하게 해야 앞으로 주를 뵙게 될 줄 알라’고 하지 않고 ‘주를 뵙게 될 줄 아는 사람이 깨끗함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소망’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일반 사회에서 사용하듯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왠만하면 그리 됐으면 좋겠다’ 하는 막연한 바램이 아니라, 확고한 소망이다. ‘소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2절에서도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아버지의 참모습 그대로를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참모습과 같이 될 줄 ‘안다’고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영광 가운데로 친히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실 미래의 그 확고한 사실을 기다린다고 하는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깨끗하심을 추구하도록 만든다는 진리를 사도 요한은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고 그러므로써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 열매를 맺어야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