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법주의(antinomianism)의 예: 서머나 교회 김성수
(마지막 수정: 2017년 02월 25일)
§0. 글머리
이 글의 구조
율법주의 및 반법주의와 관련된 배경이 될만한 사항들은 읽으시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글 마지막에 부록으로 달았습니다. 또 문단마다 번호를 붙였습니다. 글 중간에 “§1.2” 혹은 “§A.3″과 같은 표식은 각각 “제 1절 2번 문단” 그리고 “부록 A의 3번 문단”을 참조하시라는 뜻입니다.
논술의 동기
올해 초 본 블로그에서는 김세윤 교수의 가르침 속의 율법주의의 한 양상을 살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반법주의의 한 양상을 살피고자 하는데, 서머나 교회의 (故)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을 보고자 합니다. 율법주의와 반법주의는 마치 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과 그분의 법을 훼손한다는 점에서는 배 다른 형제와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반법주의를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여기시는데, 사도 바울은 물론이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반법주의는 이해해줄 수 있는 실수가 아니라 정죄 받아 마땅한 잘못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고 말했다면서 우리를 헐뜯고 다니는데 그들은 당연히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합니다.” (롬 3:8 현대인의 성경) 다른 신앙의 선조들은 어떤가요? 사무엘 러더포드: “반법주의의 오류에 완강히 서서,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하면서 그것을 믿고 그에 따른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엽적이고 하찮은 문제가 아닌 중심적이고 주요한 문제이며, 복음의 핵심과 중추에 너무도 가까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에이든 토저: “반법주의는 은혜의 교리를 가지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곡해해서 기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틴 루터: “그[반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교회에 설 자리가 없다고 위험하게 가르쳤는데, 그것은 신성모독이요 성물절도에 해당한다.”
물론 김성수 목사의 심각한 오류들에 대해서 다른 분들의 비판들이 이미 있었지만 (후기 참조), 거기에 대해 김성수 목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반박이라고 하기에는 어설픈) 반박을 보면 “당신은 은혜가 뭔지 모른다” 혹은 “당신이 누군데 함부로 판단하느냐”는 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성수 목사의 반법주의에 대해 학술 논문까지는 아니지만, 상식을 지닌 기독교인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논술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신앙고백에 나타난 은혜는 무엇인지 논술하고, 김성수 목사의 설교가 반법주의를 가르친다는 구체적인 근거들을 제시함과 동시에, 반법주의가 어떻게 교묘히 은혜의 복음을 훼손하는지 논술할 필요를 보았습니다.
이유를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김성수 목사가 개척했다고 하는 서울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그가 북미주개혁장로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의 목사였다고 적어놓고 또 그가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설교한다고 홍보합니다. 이것은 거짓이요 기만입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은 김성수 목사가 역사적인 개혁파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충실한 목사로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지적하고, 또 김성수 목사 자신도 시인하듯이, 김성수 목사는 구원과 율법에 대한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오도하는 김성수 목사의 추종자들의 주장이 역사적인 신앙고백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필요를 보았습니다.
다음 사항은 이 글의 논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켜야 하는가?’는 이 글의 논점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글 어디에서도 율법으로 자기 의를 쌓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글 어디에서도 부패한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글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 의를 쌓으라고 율법을 주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자가 분명히 적고 있는 것은,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며(§5.3), 성화는 결코 성도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성취 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열매임과 동시에 불완전한 우리를 통해 나오는 것인 만큼 여전히 불완전하기에 내 의가 될 수 없으며(§D.3),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세 가지 용도 중 첫번째 용도가 사람이 율법을 통해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C.4)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의 제 1용도> 즉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하여금 율법 아래 죽은 몸이며 의를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께 피하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하는 것은 이 글의 논점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조금이라도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으며,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미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큰 사실은 기본으로 깔고 있습니다.
이 글의 논지
그랬을 때, 이 글의 주제는 김성수 목사가 <율법의 제 3용도>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자들에게 이제 율법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생활의 표준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법주의입니다. 김성수 목사는 자신의 반법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셨으며,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도록 만드셨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이것으로 머릿말을 마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김성수 목사의 반법주의를 설명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글의 주된 논점은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한 것이지, 율법의 제 1용도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1. 김성수 목사의 오류
-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된 것은 어떤 지인의 소개를 통해서였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대뜸에 연상된 것은 박영선 목사의 설교 방식이었습니다. 나중에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것을 보니 생전에 그가 미국의 CRC (Christian Reformed Church) 교단에 몸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 때문인지 김성수 목사의 설교에서 개혁신학적인 표현들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과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개혁주의적 표현 너머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있습니다. 표현은 개혁주의적이지만 실내용은 다릅니다.
- 거두절미하고 김성수 목사의 메세지는 반법주의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반법주의에 대해서는 §B.7 참조.) 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결된 많은 오류들을 마치 진리인양 이야기합니다. 제가 보았을 때 그의 오류 중 가장 도드라진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신자의 생활은 율법에 순종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
- 왜냐하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처음 창조 될 때부터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다고 주장
-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셨다고 주장
- 신자의 생활은 율법에 순종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그의 주장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대목으로 다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는 거이지, 그것을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말입니다. 김성수, 로마서 강해 74강, (5:59-6:10)
하지만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 중 하나는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2:14
특히 위에서 ‘불법’이라하면 말 그대로 ‘법이 없음’ 즉, 하나님의 법이 없는 것처럼 사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디도서는 예수님의 공효로 의롭다하심을 이미 얻은 신자들에게 있어 선행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한번 더 강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디도서 3:5,8
사도 베드로는 신자들은 “순종하는 자식들”로 거듭난 것이니까, 모든 행실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14
§2. 김성수 목사가 사용하는 기교
- 김성수 목사의 오류를 설명하기 전에, 김성수 목사가 사용하는 기교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그는 그리스어 혹은 히브리어를 사용한 뜻풀이를 종종 시도합니다. 그것 자체는 잘못될 것이 없고, 또 원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다만, 단어라고 하는 것은 (사전을 한 번이라도 펼쳐보신 분들은 아시는 것이지만) 뜻이 하나로만 쓰이기 보다는 여러가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 혹은 문장의 의미는 결국 문맥 속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원어로 뜻풀이를 하는 것이 말과 글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이라면, 그리스에 있는 교회 혹은 이스라엘 땅에 있는 교회가 성경을 제일 잘 알 것이라 하겠지만 실상 교회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 김성수 목사가 사용하는 기교의 예를 보겠습니다. 김성수 목사가 로마서 7:7에 ‘탐심’으로 번역된 에피두미아(ἐπιθυμία)라는 말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에피두미아는 ‘욕구, 정욕, 혹은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고 ‘지식에 대한 욕망’과 같은 표현을 쓸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탐하다’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식을 탐하다’는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에서는 경우에 따라 ‘소욕’이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갈 5:17 참조). 단어의 적절한 의미는 결국 문맥에 의해 결정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성수 목사는 에피두미아를 설명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펼칩니다:1
- (ㄱ) 에피두미아란 원래 ‘자연적으로 올라오는 성향 혹은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 (ㄴ) 인간이 자연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자기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 (ㄷ) 그러므로 로마서 7:7에서 말하는 ‘탐심’은 ‘자신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얼핏 보면 그럴듯 하지만, 결론에 해당하는 (ㄷ)이 문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7:7에 바울이 사용한 에피두미아는 십계명 제 10계명(출 20:17, 신 5:21)을 인용하면서 사용한 것이고, 제 10계명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서 말씀하시는 ‘탐심’의 의미를 설명하시기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하심으로 거기서 말씀하시는 ‘탐심’이 ‘타인의 소유를 탐하는 마음’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성수 목사의 논리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벌써 (ㄱ)에서 시작 되고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의 (ㄱ)과 같은 주장과는 달리 에피두미아의 의미가 ‘자연적인 욕구, 욕망’ 만을 의미하지 않고 문맥에 따라서는 ‘금지된 것을 추구하는 욕망’ 등의 뜻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결국 김성수 목사가 원어를 가지고 이야기함으로써 본문의 의미에 잘 접근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그가 논리적인 오류들을 범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왜곡합니다. 결국 그것은 반법주의를 향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주장들은 위의 §1.2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다음 절에서 왜 그의 주장이 오류인지 언급하겠습니다.
§3. 신자의 생활은 율법에 순종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김성수 목사의 주장: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는 거이지, 그것을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말입니다.” (로마서 강해 74강, 5:59-6:10)
- 디모데후서 3:16-17 말씀을 먼저 인용하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를 쓰는 사도 바울 당시에는 “성경”이 아직 “구약 성경”을 뜻하던 때였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성경을 주신 목적 중 하나가, 특히 율법과 선지서를 주신 목정 중 하나가, 신자들에게 의를 가르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의이고 선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법이 의요 선이라고 합니다 (§C.5).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 가운데 맹세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보증하시는 것이 또한 성도들의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입니다 (§D.3-4). 위의 디모데후서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의 맹세와 부합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대한 순종에는 관심이 없다는 김성수 목사의 말은 거짓입니다.
- 당장 에베소서 6:1–3을 보면 사도 바울은 십계명 제 5계명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 5계명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면서 그 계명에 붙어 있던 현세적 복도 여전히 유효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켜서 의를 얻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논의는 어떻게 칭의를 얻는가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 글머리 참조.) 이미 의롭다하심을 얻은 신자들이 어떻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지, 그 감사의 생활은 어떠한 원칙을 따르는 생활인지,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갖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이것이 소위 “율법의 제 3용도”입니다.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2문을 참고해보십시오:
제 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2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3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4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5 하에델베르크 요리문답
위에서 ‘첫째’는 율법의 제 1용도를, ‘둘째’는 ‘복음’을, 그리고 ‘셋째’는 율법의 제 3용도를 나타냅니다.
- 이러한 율법의 제 3용도를 부인하기 위해 김성수 목사가 종종 인용하는 것이 계명의 하나만 어겨도 전부를 어긴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약 2:10). 어차피 전부 지키지 못하니까 우리의 순종과 율법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입니다. (이런 논리적 오류를 피장파장의오류라고 하지요.) 물론 계명을 하나만 범해도 다 범한 것이라는 성경 말씀은 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이 통일성을 이루고 완전하기 때문이지, 하나 어긴 사람과 둘 어긴 사람을 하나님께서 똑같이 대하신 다는 것은 아닙니다. 둘 다 그리스도 없이는 멸망이라는 점에서는 물론 같습니다. 율법은 하나를 범한 사람이나 다 범한 사람이나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훼손한 자들이고 저주를 선고 받는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 “하나만 범해도 다 범한 것’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지옥에서 받을 형벌의 경중이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더 큰 죄”를 언급하시면서 죄의 경중을 따지셨습니다 (요 19:11).
- 잠시 육체의 질병을 놓고 비유하겠습니다. 김성수 목사의 이야기는, 감기에 걸려도, 감기에 안 걸려도, 어차피 죄로 인해 죽어가는 몸이니까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감기에 걸렸다가 나으면, 나은 만큼 그 사람에게서 생명이 좀 더 힘있게 나타납니다. 그처럼, 처음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으나 성신의 능력으로 거듭나고, 그럼으로써 처음에는 죄의 부패로 가득하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신의 은혜로 조금씩 그 부패한 행위들을 버리고, 즉 “더욱” 순종해 간다면, 거기에는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났다는 명백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인데, 김성수 목사는 이처럼 성신께서 신자 가운데 발휘 되도록 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 비록 우리 순종이 불완전 하지만, 깨우쳐주시는 만큼 회개하고 “더”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성신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불완전한 순종이지만 그 사람의 인간적인 노력이 아닌 성신의 능력으로 맺어진 열매이고, 우리를 통해 나오는 것이기에 비록 흠이 있지만 그것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서 하나님께서는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15-16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여기 보면 신자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찬송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순종이 갖는 성격입니다 —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 이미 받은 구원, 이미 받은 영생, 이미 받은 긍휼, 이미 받은 의롭다하심에 대한 ‘감사의 찬송‘이 우리의 순종이 지니는 성격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수 목사는 개혁주의 성화론이 긍휼을 얻기 위한 순종을 가르친다고 거짓말을 합니다.6 분명하게 하기 위해 개혁파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24조를 보면 (§E.3)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능력이 아닌 성신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공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것은 우리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비록 성신께서 맺으신 열매지만, 완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성신께서 우리로 자원하는 심령 가운데 예전 보다 “더” 계명에 순종해 가도록 하신다는 것 뿐입니다.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신자가 회개하고 더 이상 폭력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만큼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법을 여전히 어기는 것이 되겠지만, 폭력을 부리는 정도에서 폭력을 더 이상 부리지 않는 정도로 바뀐 만큼 그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예전 보다는 “더” 순종하는 것입니다. 돌려 말하자면, 미움을 갖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미움을 갖되 폭력을 부리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을 보면 하나님께서 죄의 경중을 따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순종 정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김성수 목사의 말은 거짓입니다.
§4. 사람은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창조될 때부터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에 대하여
-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 중에는 편의상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자연적 무능력 (natural inability): 물리적 혹은 이치적으로 실행하지 못하는 것.
- 도덕적 무능력 (moral inability): 성향 혹은 도덕성의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는 것.
예를 들어 ‘물을 절대로 마시지 말라’는 명령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물을 마시고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명령은 다릅니다; 만일 누가 그 명령을 어기고 커피를 마셨다면, 그것은 비록 그 사람이 커피를 마시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고 또 충분히 안 마시고 살 수 있지만, 단지 그 사람의 성향상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에 마신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이 자연적 무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무능력의 문제라고 합니다. 자연적 무능력의 문제였다면 하나님의 계명 자체가 매우 지키기 어려운 명령들이어야 하겠지만, 성경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명기 30:11-1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1서 5:3
위의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문제를 우리의 마음의 문제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기능을 없애버리셨던지 애초에 못지키게 정해 놓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심령이 부패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부패가 심하면 심할 수록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 곧 죄를 현저하게 짓는 것입니다.
- 하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복음의 약속 가운데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은 우리에게 성신이 내주하게 하심으로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D.3-4). (이 말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님을 이미 §3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중생(거듭남)의 위대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김성수 목사는 우리가 “자발적 순종을 내어놓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7 재미있게도 김성수 목사가 인용하는 시편 51편을 가운데서 다윗은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심령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51:12) 물론 그 심령은 성신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강제가 아닌 자원하는 심령으로 순종을 내어놓도록 성신께서 바꾸어 놓으신 것이 중생의 큰 사실입니다.
- 하지만 김성수 목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계명에 대해 자연적인 무능력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심지어 그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8 그렇게 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사망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합니다.9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악의 조성자가 아닌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선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합니다.10 이것을 보면 김성수 목사는 ‘악의 조성자’ 질문이 던지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물론 선입니다. 하지만, 김성수 목사 자신의 말대로11 사람의 행위는 선악 판단의 대상인데,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만드시느냐가 ‘악의 조성자’ 질문의 요지입니다. 즉, ‘하나님이’ 악을 행하셨냐가 질문이 아니고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므로), ‘사람이’ 악을 행했는데 그것이 하나님 때문이냐가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선하시고, 악한 것은 사람인데, 사람이 악한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냐는 질문입니다. 특별히 선악과 문제에서 선악과를 먹는 것이 사람에게 악이었는데, 그 악을 사람이 행하도록 만든 것이 하나님이시냐가 ‘악의 조성자’ 질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김성수 목사는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을 하면서 사람들을 오도합니다.
-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김성수 목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신 율법을 어기도록 명령하셨다며 몇 가지 예를 댑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거민들을 몰아내도록 한 것입니다 (신 7:1-2, 20:16-18). 12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거민들에게 오랜 기간 회개의 기회를 주셨으나 (창 15:13-16) 어린 아기들을 우상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악행을 그치지 않아서 이스라엘을 보내심으로 회개의 마지막 기회로 삼으시고 (라합과 같이 회개한 사람들은 죽음을 면했습니다; 여 2:8-14, 6:25 참조)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할 군대로 이스라엘을 쓰신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도 사형 제도가 있는데, 사형 집행관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보고 살인죄를 범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심판의 도구로 쓰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율법을 어기도록 명령했다는 것은 법치의 원리를 모르는 오류입니다.
- 한걸음 더 나아가 김성수 목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도록 하셨다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함인지, 우리의 죄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려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진리를 알고 나니까, ‘아니 그게 탐심이었다고? 율법이 하지 말라고 그러는 걸 나는 계속 하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 이야기 하는 거에요.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그 탐심을 어떻게 죄로 알아들었겠어’ 그거에요. 그럼 바울이 그동안에 자기가 열심히 율법 지키면서 한 그게 죄잖아요? 그 죄가 바울에게 해가 된 겁니까? 바울에게 유익한 거였어요, 그게. 그러면 죄가 뭐 이렇게 나빠요? 김성수, 로마서 73강 (21:32-22:04)
이는 바울이 로마서 6:1에서 강력하게 타매하는 바 “죄에 거함으로써 은혜를 더한다” 논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이외에도 김성수 목사의 오류가 더 있지만 이 정도로 하고 다음 문제, 즉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셨다는 그의 주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5.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셨다는 주장에 대하여
-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는 주장은 김성수 목사가 처음 한 것은 아니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5:18). 하지만 여기서 사도 요한은 유대인들의 시각이 무엇이었는지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아도 예수께서 실제로 율법을 어긴 예는 없고 다만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장로들의 유전 혹은 율법 해석을 어겼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이유는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오히려 어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태복음 15:1-3
오히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 요한복음 5:10
- 김성수 목사는 심지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율법을 지키려면 사랑을 할 수 없고, 사랑하려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면서, 마치 예수께서 율법의 모순을 가르치시며 율법과 우리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럼 강도만난 자를, 부정한 자를, 율법사가 만지면 안되거든요. 그러면 율법을 어기는 거에요. 그런데 율법은 ‘사랑하라’ 그랬죠.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어겨야 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지 말아야 되요. 그건 인간은 율법과 관계 없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건 하나님꺼라는 뜻입니다. 김성수, 산상수훈 6강 (48:31-48:53)
하지만 율법 그 어디에서도 거반 죽어가는 사람이 부정하다거나 만지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김성수 목사는 다시 한 번 거짓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 당신은 뭘 하셔도 선하시다고 김성수 목사 자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13 ? 그런데 하나님 당신에게 율법이 왜 필요합니까? 율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내신 것이라고, 우리 주께서 특별히 제 4계명을 놓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막 2:27)?
- 이상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에, 김성수 목사는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처럼 무슨 착하게… 뭘 어떻게 착하게 살았어요? 뭐 그렇게 버릇없는 분이 어디 있어요? 나이 많은 양반들한테 막 독사 새끼라고, 남의 가게 가서 다 떼려부수고, 이게 착한겁니까? 여러분은 너무 그런 것을 미화하고 싶어해요. 영웅을 하나 만들어서 그냥 그 사람에게 나를 투영시켜 대리만족을 하는 것 같애. 천만에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본받는 분이 아니에요. 그건 슈바이쳐 신학입니다, 신신학의 아버지. 김성수, 로마서 강해 93강 (17:56–18:24)
지금 인용한 김성수 목사 이 설명은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망나니처럼 묘사하는 것이 벌써 성경 기록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지만,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에 대한 김성수 목사가 설명 역시 본문의 왜곡입니다. 그는 설명하기를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닮아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사도 바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6장 5절을 보면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을 본받는다고 하였고 (롬 6:5), 부활에 연합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 곧 그가 주시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 하였으며 (롬 6:4), 이는 결국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롬 6:13).
사도 베드로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14
- 예수께서 율법 아래 나시어 완전한 순종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계명을 어기면 단순히 거기에 대한 형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복원 또는 회복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훼손한 율법의 의를 당신께서 완전하게 만족시키셔서 그 의를 우리에게 덧 입혀주셨습니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것은 다음 글을 참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의 순종처럼 여기시고 의롭다 하심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셨다고 해서 하나님에 법에 순종할 우리의 당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B).
§6. 마치는 말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반법주의를 살피는 것을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김성수 목사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가 복음 사실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바른 도리를 지니고 있었더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다른 분들이라도 졸인의 글을 통해 반법주의가 어떻게 하여 복음의 약속들과 하나님의 법을 훼손하는지 생각하게 되시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만일 김성수 목사의 설교 방식이 귀에 잘 들어오신다면,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들을 오히려 추천드립니다 (http://lamp.kr).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
§7. 김성수 목사를 옹호하는 분들의 반박 몇몇 (2015.11.17 추가)
이 글을 게시하고 일년 넘게 댓글을 통해 김성수 목사를 옹호하는 분들의 반박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댓글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김성수 목사를 옹호하는 분들의 반박은 크게 몇 가지로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논리적은 오류가 많아서 제대로 된 반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래에 그 반박들을 나열하면서, 어떤 논리적 오류를 담고 있는지 함께 적겠습니다. 오류 중에는 많은 분들이 그것이 논리적 오류인지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독자들께서는 아래에 “어떤” 오류들이 등장하는가 보다는 그것들이 “왜” 오류인지가 더 중요함을 상기해주셨으면 합니다.
- “은혜가 뭔지, 율법이 뭔지지 모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 인신공격의 오류이자 논점일탈의 오류입니다. 제 글의 논점은 제가 이해하는 은혜의 뜻은 맞고 김성수 목사가 가르치는 은혜의 뜻은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 글의 논점은 김성수 목사가 가르치는 은혜는 역사적인 신앙고백이 말하는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분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예수 믿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식인데,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고 오히려 다음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갈 3:12상) 그러니 율법과 믿음을 섞으면 안 됩니다.
- “당신은 얼마나 성화에 열심이기에 남을 판단하는가?” “당신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 역시 인신공격의 오류이자 논점일탈의 오류입니다. 제 글의 논점은 김성수 목사의 설교는 반법주의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주장의 참 거짓 여부는 제가 얼마나 성화에 열심인지,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는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 “설교 한 두편 듣고 비판하는 것 아닌가?” “당신이 남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얄팍한 지식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가?” — 논점일탈의 오류이자 인신공격의 오류입니다. 독자는 제 글을 읽고 제시된 근거가 타당한지, 논리가 정연한지 따질 수 있습니다. 즉 저의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거나 제가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제 “논술”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할터인데, 그러지 않고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몇 편 읽었냐는 식으로 “자격”을 따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논점일탈이며, 애초에 제가 합리적인 사고와 주장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인신공격이며, 전문가만 의미 있는 논술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권위에의 호소입니다.
- “모두가 죄인인데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가?” “완벽한 사람은 없는데 함부로 판단하는가?” — 의도확대의 오류이자 피장파장의 오류입니다. 제 글의 의도는 김성수 목사가 좋은 목사인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김성수 목사가 거듭난 사람인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제 글의 논점은 김성수 목사의 설교는 역사적인 신앙고백과는 다른 반법주의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분명한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안의 참 거짓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심판자를 자처하는 행위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판단도 꺼려야 할 터이나, 성경은 그리 가르친 적이 없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2-3)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전 5:12-13)
- “율법을 잘 지켜야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인가?” — 논점일탈이자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입니다. 제 글의 논점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하지만,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반법주의에 서있다는 것이 논점입니다. 글머리에서도 적었듯이,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하여금 율법 아래 죽은 몸이며 의를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께 피하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하는 <율법의 제 1용도>를 이 글은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율법의 제 1용도>는 논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조금이라도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으며,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미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큰 사실은 기본으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미 의롭다하심을 받은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자들에게 이제 율법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이고, 이것이 소위 <율법의 제 3용도>가 다루는 내용입니다. 그랬을 때 이 글의 주제는 김성수 목사가 <율법의 제 3용도>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법주의의 핵심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반법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셨으며,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도록 만드셨다고까지 주장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부록
§A. 두 개의 범주
-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범주(category)를 가져오겠습니다:
- 범주 (A):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
- 범주 (B):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
-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위의 두 가지는 섞일래야 섞일 수가 없지요? 하나님과 우리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혀 다른 두 가지이고 섞일 수가 없습니다. 어렵지 않은 논리입니다.
- 그리고 범주 (A)는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것이니 만큼 우리는 거기에 순종할 의무 혹은 당위가 있습니다. 반대로 범주 (B)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는 그것을 의지할 수 있고 또 믿어야 합니다.
- 이제 위의 두 범주에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붙이려고 합니다. 이 이름들은 졸인이 지어낸 것은 아니고 종교개혁 시기에 잘 정립이 된 이름들입니다.
- 그런데 이름을 붙이기 전에 쉬운 말씀 하나만 더 드리겠습니다. 어떤 단어에는 협의(좁은 의미)와 광의(넓은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지요. 예를 들어 “밥”이라는 말은 협의로는 “쌀밥”을 의미하지만 (예: 반찬은 있는데 밥이 없네?), 광의로는 “식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 너 오늘 밥 먹었니?).
- 이제 위의 두 범주에 이름을 붙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각각의 범주 마다 성경에서 예를 찾을 수 있는데, 각각의 경우 가장 중요한 예를 뽑아 이름을 삼으려고 합니다.
- 범주 (A), 즉 우리가 해야 할 것 중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예는 물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들입니다. 그 명령들이 여러가지 형식으로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소위 ‘율법’입니다. 그래서 위의 범주 (A)에 ‘법‘(Law)이라는 별명을 붙이겠습니다.
- 범주 (B),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 중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예는 물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씻기시는 사실입니다. 이는 물론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범주 (B)에 ‘복음‘(Gospel)이라는 별명을 붙이겠습니다.
- §A.5에서 협의와 광의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요? 그처럼 ‘법’이라는 말도 협의로는 ‘모세법전’을 의마하지만, 광의로는 범주 (A)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라고 하신 모든 것을 지칭합니다. ‘복음’이라는 말 역시 협의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하지만, 광의로는 범주 (B)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지칭합니다. 앞서 §A.4에서 말씀드렸듯이 ‘법’과 ‘복음’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각각 범주 (A)와 (B)를 지칭하는 것은 졸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시기에 정립이 된 것입니다.
-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제 3문: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은 무엇이며,14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15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위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이라 함은 물론 복음이며,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라 함은 율법에 해당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사실들로 구성 되기에 거기에 합당한 우리의 반응은 ‘믿음’이라고 잘 적고 있습니다.
§B. 율법과 복음의 두 범주를 섞는 오류들
- §A.7-8에서 소개한 범주 (A)와 (B)에 대한 명칭을 갖고 조금 살을 붙여 아래에 다시 적어 보갰습니다:
- 법 (Law):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
- 복음 (Gospel):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시고 이루신 것.
- 교회를 조금이라도 다녀 보신 분들은 복음을 구원과 연결 짓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옳습니다. 다만, 그렇게 구원론으로 얼른 넘어가기 전에, §A.1-2에서 말씀드렸듯이 위의 두 범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의 단순한 구분일 뿐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법’과 ‘복음’이라는 범주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문제와 면밀한 연관이 있고, 조금 뒤에 §B.4에서 그것을 이야기 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간단한 논리적 구분 혹은 개념적 구분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 문단 §A.3에서 말씀드렸듯이 ‘법’의 범주는 우리의 순종이 요구되는 범주이고, ‘복음’의 범주는 우리의 믿음이 요구되는 범주입니다.
- 그럼 이제 약속드린대로 법과 복음이라는 범주와 우리 구원의 관계를 짦게 정리하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본 블로그의 ‘율법과 복음‘ 연재물, 그 중에서도 특히 다섯번 째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 우리 시조 할아버지 아담이 애초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함으로 우리 모두는 본성상 불순종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즉, 우리는 법의 범주에 있는 것을 범함으로써 죄인이 되었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셨습니다. (즉,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복음의 범주에 있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이상이 법과 복음이라는 범주가 우리의 구원과 지니는 관계입니다. 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섞음으로써 발생하는 대표적인 이단 사상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A.2-3에서 말씀드렸듯이, 법과 복음의 범주는 섞일 수 없다는 쉬운 논리적 사실과, 법의 범주는 순종을, 복음의 범주는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 율법주의 (nomism): 이것은 법의 범주에 있는 것을 가져와 복음의 범주에 있는 것을 밀어내는 이단 사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B.4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칭의는 전적으로 복음의 범주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에 기인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법의 범주에 있는 것 즉 우리가 순종해야 할 것을 가져와 칭의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가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하시는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율법주의는 밑에서 다룰 반법주의의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내신 법을 훼손한다는 점에서는 반법주의의 배 다른 형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가납하실만한 것이 못 된다고 성경이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위를 의롭다하심을 받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삼으려하다보니,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께서 본래 제시하신 기준보다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반법주의 (antinomianism): 이것은 복음의 범주에 있는 것을 가지고 법의 범주에 있는 것을 밀어내는 이단 사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법에 순종할 의무 혹은 당위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A.3와 §B.2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고,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지킨다는 것 뿐입니다. 복음의 범주에 있는 것들을 믿는다고 해서 법의 범주에 있는 것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참고사항 정도로 여기는 반법주의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에 대한 생각이 추상적이거나 이현령비현령식입니다.
- 이 글은 반법주의에 대한 글의 부록이니 만큼, 반법주의의 오류가 무엇인지 그려줄 예를 일부러 하나 더 들겠습니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매우 근면성실한 반면 아들은 게으르고 늘상 늦잠을 잤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 아들에게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밭을 돌보거라” 명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들은 게으름을 벗지 못했고, 아버지의 밭에는 곡식이 풍성하였어도 아들의 밭은 늘상 볼품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운 아버지는 곡식이 부족한 아들에게 자기 밭에서 난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자,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부지런히 밭을 돌보라”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할 당위가 없어졌습니까? 아들이 ‘내가 농사를 어떻게 짓던지 우리가 먹을 것은 늘 아버지 밭에서 나온다. 그러니 난 꼭 아버지 말대로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입니까? 물론 그것은 오류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명령이고 자신은 그것에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할 의무는 그것이 창조주의, 왕의,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거기에 순종해야 할 피조물이고, 친백성이고, 자식이기 때문이지,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든지 혹은 다른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우리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해서, 즉 복음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할 의무와 당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C. 모세법전에 대하여
- §A.5와 §A.9에서 말씀드렸듯이, 광의에서 ‘법’, ‘율법’, 혹은 ‘하나님의 법’이라는 말을 쓸 때는 협의로서의 ‘법’ 즉 ‘모세법전’을 꼭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실 때, 모세법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즉 구약 시기의 이스라엘 민족국가에게 하나의 실정법(實定法, positive law) 형식에 담아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영원법(永遠法, lex aeterna)이 있습니다. 어려운 이론을 하기 보다는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께서 제 7계명 “살인하지 말라”를 설명하시는 것을 보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뒤에는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더 큰 하나님의 원칙이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마 5:21-22). 거기서 말씀하신 그 큰 원칙, 언제 어디서고 “사람이라면 이러한 품성을 갖추어야 마땅하다”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법도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실천법으로서의 계명 뒤에는,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영원법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광의로서의 ‘법’ 혹은 ‘계명’이라는 말을 쓸 때는 특히 이러한 영원법을 염두에 두고 쓰는 말입니다.
- 모세법전이 실정법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실정법은 그 특성상 그 법이 실효를 갖는 지역과 시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실정법으로서의 효력을 갖는 것이고, 만일 법이 개정될 경우 개정된 법이 효력을 갖기 시작하는 시기 또한 명시가 됩니다. 성경은, 특히 히브리서는, 모세법전이 실정법으로서 갖는 실효는 시내산에서 시작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종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원법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방금 §C.1에서 예로 든 제 7계명이 실정법으로서는 효력이 없어도, 그 실정법이 반영하고 있던 영원법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법은 자재하는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원법을 반영한 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실정법이라면, 미움 가운데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금하는 것 또한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을 가리켜 (사도 바울 당시에는 아직 신약이 작성 되던 중이었으므로 그가 말하던 성경은 특히 구약인데) 의로 교육하기 유익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딤전 3:16-17). 비록 실정법으로서 모세법전의 효력이 없다하더라도, 그 실정법이 반영하던 영원법은 여전히 유효하며, 하나님께서 내신 모세법전이 그 영원법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대한민국 실정법에도 헌법, 형법, 민사법, 상거래법 등 다양한 법이 있듯이, 모세법전 또한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분류 됩니다:
- 도덕법 (moral law): 말 그대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인 악인지 가르쳐주는 법입니다. 십계명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 의식법 (ceremonial law): 종교적인 의식을 규율하는 법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가지 제사법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 사회법 (civil law): 이것은 당시 사회가 처한 시대적, 지리적, 혹은 문화적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법입니다. 도피성 같은 것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랬을 때, 의식법의 경우 그리스도의 그림자였고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이루셨으므로 다시는 의식법이 이 땅에서 행해지지 않는 것이고, 관습법 역시 시내산 언약과 더불어 온 것이고 그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폐기가 되었기 때문에 관습법에 우리는 묶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가 여기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경이 의로 교육하기 유익하다고 했을 때는 모세법전 전체가 포함 됩니다. 도덕법, 의식법, 관습법 모두를 공부함으로써 거기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법에 대해 배우고 순종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 방금 말씀드린바 모세법전을 통한 영원법의 계시, 이것을 가리켜 소위 ‘율법의 제 3 용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율법의 제 1 용도 (1st use of the Law): 몽학선생으로서의 기능. 율법을 어긴 자들을 정죄하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기능.
- 율법의 제 2 용도 (2nd use of the Law): 사회 교훈적인 기능. 신자 불신자를 떠나서 일반 사회에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기능.
- 율법의 제 3 용도 (3rd use of the Law): 이것은 특별히 신자들 곧 그리스도의 공효로 율법이 선고하는 사망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적용되는 기능인데, 하나님의 영원법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나타나길 원하시는 의로운 생활의 표준, 또 그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르쳐 주는 기능입니다. 율법은 그것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기에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합니다 (롬 7:12; 시 119).
보통 반법주의자들은 율법의 제 1 용도와 제 2 용도는 인정해도 제 3 용도를 부인합니다.
- 율법의 제 3 용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려줍니다. 시편 119:172는 말합니다: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개역성경은 ‘의로우므로’라고 번역했지만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쎄덱'(צֶדֶק)이라는 명사로서 ‘의’ 혹은 ‘의로움’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좀 더 좋은 번역은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의인지 하나님의 법이 그 표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25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무엇이 의로운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곧 의로운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얼마나 잘 지킬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단지 우리가 (만일) 다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서 인정하신다는 하나의 원칙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온진히 지키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못 지키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다 지키면 의로 인정한다’ 하신 원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의로움의 표준이다’ 하신 것은 그것대로 자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준은 100점이다’하시면, 우리가 ‘0점’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기준이 낮춰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표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제 3 용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 율법의 제 3 용도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엇이 의인지 알려준다는 것은 돌려말하자면 무엇이 죄인지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정하신 표준이고, 거기에 반하는 것이 ‘불의’이며 ‘죄’이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요일 5:17),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여기서 ‘불법’이라고 번역된 아노미아(ἀνομία)는 법을 무시하는 것 혹은 법을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일상적으로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 하는 것’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지만 (비록 형식적으로는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마땅히 순종하라고 제시하신 표준인가에 대해 성경은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이 의의 표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곧 죄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여기서 ‘계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실정법으로 주신 모세법전이라기 보다는 모세법전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영원법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C.1-2에서 말씀드렸습니다).
§D. 복음의 약속에 대하여
- §A.5와 §A.9에서 말씀드렸듯이, 광의에서 ‘복음’이라는 말을 쓸 때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시고 이루신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맹세, 그것을 소위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라고 합니다. 그 은혜의 언약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반드시 이뤄지도록 자기 피로서 단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사 언약의 보증으로서 영구히 계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 19문: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덴동산]에서 친히 계시하셨고,16 후에는 족장들과17 선지자들을18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儀式)들로써 예표하셨고,19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20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은혜의 언약’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씁니다:
제 20문: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한 처지에서 멸망하게 버려두셨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오직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어떤 사람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고,21 구속자로 말미암아 그들을 죄와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 내어 구원의 지위에 이르게 하시려고 은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22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그렇다면 그 은혜의 언약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율법과 복음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 글에 자세히 적었으니, 여기서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은혜의 언약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는 하나님의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 시조 할아버지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창 3:15) 말씀하셨을 때는 당신께서 친히 여자의 후손과 (물론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만) 뱀 (사단) 사이를 멀어지게 하시겠다는 구원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그 후로도 이 구원의 약속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여러 선지자들을 거쳐 더 세부적인 내용이 드러나고 새롭게 되었고 (renew), 마침내 하나님의 친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환요하게 그 언약을 나타내 보이시고 자기 피로 보증을 삼으셨습니다. 이 은혜의 언약은 타락 이후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푸신 유일한 언약입니다.
- 은혜의 언약 가운데 있는 세부적 약속을 몇 가지만 보자면 (렘 31:31–34, 겔 36:22–27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맹세가 들어있습니다:
- 은혜의 언약은 깨뜨려지지 아니할 영원한 언약이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시고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의 죄를 씻기신다.
- 하나님의 영(靈) 곧 성신(聖神)을 그들 속에 두신다.
- 그들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하신다.
보시다시피, 은혜의 언약, 혹은 복음의 언약이라고 할 만한 이 약속 가운데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도록 하시겠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신으로 우리 가운데 내주토록 하시겠다는 맹세가 들어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루 아침에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천하만물도 6일이라는 기간 동안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순종토록 하시겠다는 것도 시간 속에서 이뤄가십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우리의 순종은 늘 흠이 있고 그대로는 결코 하나님께서 가납하실만한 것이 아니지마는, 우리가 “더” 하나님께 순종해 가도록 당신의 성신의 능력으로 이끄시고 또한 그리스도는 그 보증이 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신의 능력으로 성도가 장성해 가는 것, 이를 가리켜 소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그랬을 때 성도의 성화는 방금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신의 능력과 더불어 맹세로서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결코 성도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성취 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순종이라는 것은 결코 자신의 의로 인정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공(功)이 되기는 커녕,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뤄진 것이니 하나님께 되려 빚을 지는 것입니다 (§E.3).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성화가 사람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 35문: 거룩하게 하심이 무엇입니까? 답: 거룩하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고,23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온전히 새사람이 되고,24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됩니다.25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그랬을 때 성화라는 것은 아무 표준도 없이, 그저 두루뭉술하게 착한 사람이 된다는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C.5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기준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문단 §C.1에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영원법이 바로 그 기준이고,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잘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사 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까지만이지만 실정법으로 사용토록 하신 것이 모세법전입니다. 그러므로 §C.4에서 본 율법의 제 3 용도를 부인하는 반법주의는 하나님의 법을 훼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D.3에서 본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 또한 훼손하는 심각한 이단 사상입니다.
- 여러차례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은, 신자가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 곧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 역시 은혜의 언약, 복음의 약속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시작 뿐만 아니라 마침 까지 우리는 복음 사실 곧 하나님의 언약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또 언약의 약속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성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성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더욱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래서도 우리의 순종은 그 본질적 성격에 있어서 ‘이미 구원 받은’ 자들 가운데서 울리는 감사의 송영(doxology)입니다.
§E. 벨직 신앙고백 24조: 사람의 성화와 선행에 관하여
- 우리는 참 믿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신의 사역으로 발생하는 믿음은 (벧전 1:23; 롬 10:17; 요 5:24)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여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함을 믿으며 (살전 1:5; 롬 8:15; 요 6:29; 골 2:12; 빌 1:1, 1:29; 엡 2:8), 또한 죄의 종된 상태에서 해방시킴을 믿는다 (행 15:9; 롬 6:4, 6:22; 딛 2:12; 요 8:36). 그러므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 대해 태만하게 만든다는 말보다 진실에서 먼 것은 없다 (딛 2:12). 오히려 그 반대로 참 믿음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행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사랑함 혹은 멸망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참 믿음이 사람에게서 열매를 맺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곧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종류는 헛된 믿음이 아니라 (딛 3:8; 요 15:5; 히 11:6; 딤전 1:5) 성경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한 그것인데 (딤전 1:5; 갈 5:6; 딛 3:8),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가운데 명령하신 일들에 순종하도록 운동력을 불어넣는다.
- 그러한 순종은 믿음의 선한 뿌리에서 발생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 성결케 된 만큼,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으로 보신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이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는데 조금도 기여를 하지 못하니 (딤후 1:9; 롬 9:32; 딛 3:5),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무런 선행을 하기 전에, 의롭다하심을 받기 때문이다 (롬 4:4; 창 4:4). 의롭다하심을 받기 전에 선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나무가 좋지 않으면 열매가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히 11:6; 롬 14:23; 창 4:4; 마 7:17).
-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에 힘쓰지만 그것을 우리의 공으로 삼으려 함이 아니다 (우리의 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가?). 아니, 우리의 선행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채무가 생기기 보다는 도리어 하나님께 우리가 빚을 지는 것이니 (고전 4:7; 사 26:12; 갈 3:5; 살전 2:13), 이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해, 우리가 의지를 갖고 실천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빌 2:13).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자: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0)
-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에 대해 상을 베푸신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당신이 주신 선물에 영예를 입혀주시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 10:42, 25ㅣ34-35; 계 2:11, 3:12, 3:21; 롬 2:6; 요2 8; 롬 11:6). 더욱이, 비록 우리가 선을 행해도, 우리는 우리 구원의 근거를 거기서 찾지 않는다 (엡 2:9-10) — 왜냐하면 우리의 행실 가운데 육신의 사욕으로 오염 되지 않고 죄책이 없는 것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 64:6). 설령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배격하실 이유는 한 번의 범죄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에 안식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늘 의문 가운데 있을 것이고, 불확실함 속에 흔들릴 것이며, 가련한 우리 양심은 끊임 없는 번뇌에 휩싸일 것이다 (사 28:16; 롬 10:11; 하 2:4).
김성수, 로마서 73강 (17:03-21:15) ↩
마 11:28-30; 엡 5:8 ↩
마 9:12; 요 9:41; 롬 3:9-10; 요일 1:9-10 ↩
눅 24:46-47; 요 17:3; 행 4:12; 행 10:43; 고전 6:11; 딛 3:3-7 ↩
시 50:14-15; 시 116:12-13; 마 5:16; 롬 6:12-13; 엡 5:10; 딤후 2:15; 벧전 2:9,12 ↩
김성수, 산상수훈 6강: “나는 하나님께 자발적 순종을 내어놓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다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런데 “순종하여 긍휼을 입자”라는게 오늘날 개혁주의의 입장 아닙니까?” (33:16) ↩
김성수, 산상수훈 6강 (33:16-33:31) ↩
김성수, 창세기 14강: “너희는 티끌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걸 [선악과] 먹을 수 밖에 없거든” (17:44-17:46),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 계시죠? ‘하나님은 왜 그놈의 선악과는 만들어서 거기다 심어 놔가지고 왜 우리를 이렇게 괴롭게 만드시는가?’ 여러분,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없었으면 우리 인간은 언제 죄를 지을지 모르는 그런 존재에서 머물렀을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걸 요구하시는거에요: ‘화끈하게 선악과 따먹고, 너희들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존재를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는지를 한번 보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 은혜를 절감하면서 나에게 영원히 항복하라.’ 그리고 그렇게 항복하게 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여러분.” (21:49-22:31) ↩
김성수, 로마서 57강: 누군가가 죄를 집어 넣어야 되는데 통로가 없어요. 그래서 아담이 도구로, 통로로 사용된 거에요. 그러니까 ‘아담만 죽일놈’ 그러면 안되는 거에요, 여러분. 아담은 그냥 통로로 사용된 거에요. 그러니까 바꿔 말해서 그들 피조물이 죄를 창조해낸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뭔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준비해 둔 어떤 개념이에요, 죄라는 건. 하나님은 아담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의도적으로 죄를 세상에 풀어버린거에요. 왜요? 바로 다음에 나와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사망의 상태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죄가 들어왔다 그래요, 오늘 본문이. (35:08-36:04) ↩
김성수, 창세기 16강 (40:15-41:02) ↩
김성수, 창세기 16강 (45:17-45:22) ↩
김성수, 창세기 16강 (41:02-41:22) ↩
김성수, 창세기 16강 (40:15-41:02) ↩
창 1:1; 요 5:39; 요 20:31; 롬 10:17; 딤후 3:15 ↩
신 10:12-13; 수 1:8; 시 119:105; 미 6:8; 롬 1:5; 딤후 3:16-17; 약 2:14 ↩
창 3:15 ↩
창 12:3; 22:18; 26:4; 28:14; 49:10 ↩
사 42:1-4; 43:25; 49:6; 52:13-53:12; 렘 23:5-6; 31:32-33; 미 7:18-20; 요 5:46; 행 3:22-24; 10:43; 롬 1:2; 히 1:1 ↩
레 1-7장; 골 2:17; 히 10:1,7 ↩
롬 10:4; 갈 3:24; 4:4-5; 골 2:17; 히 1:1-2 ↩
행 13:48; 엡 1:4-5; 살후 2:13-14; 딤후 1:9 ↩
창 3:15; 창 17:7; 출 19:5-6; 렘 31:31-34; 마 20:28; 롬 3:20-22; 고전 11:25; 갈 3:21-22; 히 9:15 ↩
겔 36:27; 빌 2:13; 살후 2:13 ↩
고후 5:17; 엡 4:23-24; 살전 5:23 ↩
겔 36:25-27; 롬 6:4, 6, 12-14; 롬 8:4; 고후 7:1; 벧전 2:24 ↩
33 Comments
김명미
당신은그리스도안에서
얼만큼순종하고있습니까?
그순종이
당신의의지로부터인지
아님
성령의역사로부터인지
다시한번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의롭다함을얻은것은
온전히그리스도의은혜요
우리의행위로말미암음이아닙니다.
성령으로거듭난자
곧참된그리스도인은
당신이언급하신말씀을
삶으로살아가는사람들이지
지식을논하는자들이아닙니다.
진정하나님앞에서
당신은순종할수있는자라고
고백할수있습니까?
그것을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의역사는
하나님이이루어가십니다.
Hun
Paul Ahn
반 율법주의라고 그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강한 그의 어감상… 또는 때로는 그렇게 들릴 때도 있기 하지만… 전체적인 설교뒤에 느끼는 바… 그의 설교는 은혜위주의 설교라고 평가되어도 된다고 봅니다. 설교의 문맥과 전체를 보고 성향을 본 다음… 또 언어의 한계성이나 …설교도중 약간씩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를 때가 있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이라고 보아도 됨직한 것이 아닐까요?
Hun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Paul Ahn 님의 그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존중합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반법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Paul 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람의 부족에서 나오는 말실수 혹은 표현력의 한계일 가능성이 있다고 저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성수 목사의 설교 가운데서 지엽적인 것들 보다는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제시되는 것에 관심을 두었고, 또 청중들은 그의 설교를 통해 최종적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지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자세히 들어보았고, 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분들의 의견도 유심히 살폈습니다. 특히 김성수 목사의 말을 제가 인용할 때는 어떤 설교의 어떤 부분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제시했습니다.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원하시면 직접 그의 설교를 들어보시고 판단하시길 바래서입니다.
그랬을 때 저의 결론은 그가 ‘율법의 제 3용도’를 부정하고 또한 성도의 성화를 부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김성수 목사가 처음 한 것도 아니고 교회사를 보면 오래전부터 있던 것인데, 그래서 그러한 주장을 가리키는 명칭이 생겼고 그것이 바로 반법주의(antinomianism)입니다.
혹시나 이 댓글을 읽으시는 다른 분들을 위해서 조금만 부연하자면,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또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가리켜 소위 ‘율법의 제 1용도‘라고 합니다. 김성수 목사는 율법의 기능으로서 오로지 이것 하나만 가르칩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개혁파 신앙고백과 그 신학은 율법의 제 3용도 또한 고백하고 가르쳤는데, 즉 그리스도의 공효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신자들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의 열매를 맺으실 뿐만 아니라 그 의의 표준이 무엇인지 가르치시기 위해 당신의 율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자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잘 지켜야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죄인의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를 닮은 새 사람을 창조하시고 길러나가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제 3용도’를 부정하는 것을 가리켜 반법주의라고 부르지요. 김성수 목사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 저의 최종적이면서 조심스러운 결론입니다.
이 댓글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김성수 목사의 지엽적인 문제는 가능하면 건들지 않고 큰 그림만 보고 그의 오류를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빌어 한가지 우려되는 점을 지적하자면, 그가 개척했다고 하는 서울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에 가면 김성수 목사가 북미주개혁장로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의 목사였다고 적어놓고 또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설교하고 있다고 홍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시는 분들은 김성수 목사가 역사적인 개혁파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충실한 목사로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래 쓴 글에서도 지적하려고 했고 또 김성수 목사 자신도 시인하듯이 김성수 목사는 구원과 율법에 대한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김성수 목사의 주장과 가르침은 어떠한 것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랬을 때 그의 주장과 가르침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잘 알려진 반법주의의 그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독자들께 명료하게 제시하고자 합니다.
Paul Ahn 님의 방문과 또 남겨주신 의견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Terry Lee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지만, 김성수목사님의 설교를 감사히, 즐거이 듣고 있습니다. 반법주의. 아직,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김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라면 자연스럽게 격발 되어 나오는 것들 중에 자발적인 율법지킴이 포함 되어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되었다면 즐거운 율법 지킴이이가 되고 다시는 하지 말라는 거 안하는 절대 순종.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Hun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Terry Lee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새사람을 우리 안에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더욱 순종해가도록 만드시는 적극적인 은혜입니다. Terry 님께서 잘 아시는 것을 제가 반복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법은 물론 모세법전에 등장하는 제사법이나 관습법이 아닌 (그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므로)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을 말하지요. 그리고 우리를 더욱 순종해가도록 만드시는 과정도 조금도 후퇴가 없는 직선적인 성장이라기 보다는 때로는 후퇴하기도 하고 제자리에 멤돌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장성의 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효에 근거해 당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것이고, 그 언약은 단지 우리를 의롭다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자발적으로 더 잘 지킬 수 있도록 바꾸어 가시지요. 그래서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공(功)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지는 것이 된다는 것이 역사적인 개혁파 신앙고백입니다.
혹 다른 독자들께서도 오해하실까 말씀드리지만, 제 글은 김성수 목사의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들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조심히 살핀바에 따르면 그에게서는 반법주의의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신자들과 상관이 없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을 어기셨다는 주장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따른다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아도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법주의가 심심찮게 나타납니다.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으시더래도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감안하시고 들으시는 것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한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이야 각자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김성수 목사의 그런 가르침은 역사적인 개혁파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서는 떠난 것임은 아는 것이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김성수 목사 자신도 시인하는 부분입니다.)
방문해주시고 의견 남겨주신 Terry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갬히
글 잘 읽었습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전통적인 개혁신앙에서의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이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는 판단에서 결국 여기에서도 인간이 의와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 또는 ‘자기가’ 선을 이루고 싶고 행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런 생각과 마음조차 “죄”로 김성수 목사님은 간주하는 것인지요?
최근 출석하는 교회에서 목회자가 김성수 목사님의 영향을 받는지 설교내용이
다소 김성수 목사님의 주장과 비슷합니다. 위에 기술한 내용이 솔깃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이 됩니다.
Hun
의견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공(功)으로 삼으려 하거나 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그래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쓴 원문의 §E.3에 인용한 벨직 신앙고백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 역시 “자기”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그것만 놓고 보면 크게 문제될 것 없습니다. 다만, 그가 그것의 이유라고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의롭다하심 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계명을 지키는지 않는지 관심이 없다는 반법주의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개혁파 신앙고백은 어떤가요? 개혁파 신앙고백은 내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선을 이뤄보겠다는 생각을 왜 부당한 것으로 봅니까? 김성수 목사의 주장처럼 율법이 신자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다시 벨직 신앙고백 가운데 나타난 것을 보자면, 첫째, 참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열매는 비록 ‘나’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기는 했으나 성신의 역사로 맺어진 것이기에 “내가 이뤘다”고 말할 수가 없고, 둘째, 비록 성신의 열매이기는 하나 ‘나’라고 하는 불완전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기에 율법의 준엄한 기준에 비춰 보았을 때는 여전히 흠이 있는 것이고, 셋째, 그런 흠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때는 그것이 성신의 역사로 맺어지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성결케 하여 받으시는 것이기에,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인해 신자의 순종은 우리의 공(功)이 되기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은혜의 빚을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뿐만 아니라 그의 완전한 순종으로 인해 신자가 이미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로 인해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신자가 자신의 그 무엇을 가지고 의(義)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재판장 앞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가 그 나라의 의(義)를 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재판장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아버지”로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신의 역사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는 새 심령을 주시고 또 장성함에 따라 “더욱” 순종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재판장”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흠 많은 우리의 순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김대석
율법. 반법. 은혜를 논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군요
율법은 의를 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닌 줄은 다 아실거고 율법은 당대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으로서
율법을 순종하면 자신 속의 모든 죄성을 보게되어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자기 본질을 보게 됨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신을 알고 괴롭게 됩니다 죽은 몸인 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말씀 안 드려도 로마서에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원문이 어떤지..신학적 해석이 뭔지..지식이 좀 있는 자들이 복음을 심히 어지럽게 하는 소위에 불과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식 많은 자나 없는자나 상관 없이 듣고 행하는 자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고 성경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신 목적이 몇이 있는데 로마서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Hun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심도 있게 쓴 이유는 김성수 목사 자신이 교묘한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성수 목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김성수 목사를 비판하면 ‘당신의 얄팍한 지식으로 사람을 판단해?’, ‘당신은 율법 잘 지켜?”, ‘설교 한 두편 듣고 비판하는거잖아?’ 그런 식입니다. 그래서 김성수 목사의 여러 설교 가운데서 그가 한 이야기를 인용해 가며, 그것이 역사적인 신앙고백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어떻게 교묘히 복음의 약속들을 훼손하는지 자세히 쓴 것입니다. 상대방이 그릇된 가르침을 전한다면서 한 두 마디 툭 던지고 끝낼 것이 아니라, 성경에 다 있는데 뭘 설명하냐며 입 꾹 닫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비판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의 근거와 논리를 들어서 입증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태도 아니겠습니까?
그가 개척했다고 하는 서울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에 가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김성수 목사가 북미주개혁장로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의 목사였다고 적어놓고 또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설교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이요 기만입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은 김성수 목사가 역사적인 개혁파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충실한 목사로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글에서도 지적하려고 했고 또 김성수 목사 자신도 시인하듯이 김성수 목사는 구원과 율법에 대한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그 신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김성수 목사의 주장과 가르침은 어떠한 것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번 글이 평소 본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에 비해 조금 딱딱하고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김대석 님께서 오해를 하셨는데, 분명히 하자면:
그와는 반대로 제 글에서 분명히 적은 것은:
김대석 님이 적으신 것을 봐도 율법의 제 1용도까지만 언급하셨습니다. 즉, 죄인으로 하여금 율법 아래 죽은 몸이며 의를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께 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아무도 그러한 율법의 제 1용도를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논의의 대상은 율법의 제 1용도가 아닙니다.
문제는 김성수 목사가 율법의 제 3용도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법주의의 핵심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반법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셨으며,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도록 만드셨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제 글의 주된 논점은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한 것이지, 율법의 제 1용도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조금이라도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고,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미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큰 사실은 기본으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석 님께서 적으신 것 중에 제가 크게 반대할 것은 없으나, 한가지 대목에서는 우려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원문이 어떤지..신학적 해석이 뭔지..지식이 좀 있는 자들이 복음을 심히 어지럽게 하는 소위에 불과한 말입니다”라고 하신 것인데, 물론 신학적 지식을 오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당한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도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만 대개는 단지 “성경대로 살기, 착하게 살기, 혹은 경건하게 살기” 운동에 그쳤던 것에 비해, 독일과 제네바를 주축으로한 종교개혁이 성공하고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성경대로 살기 뿐만 아니라 신학의 개혁이 동반 되었기 때문입니다.
댓글 남겨 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김대석
제 의견에 성의있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짤막한 몇 마디 말로 어찌 율법의 많은 것을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율법은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것이고
율법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주신것은 양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양심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는 어둠. 타락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율법만이 인간의 현 상태를 알 수 있다고 로마서 1장에 밝히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모든 이방과의 전쟁의 뜻은 이것을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듣기만 지키지 않는 자는 자기 죄를 전혀 모른다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양심을 밝혀 모든 사람의 죄를 드러내게 하죠
그러나 이 양심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힘이 없습니다
즉 양심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데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오시게 되었다는 것이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이 선물을 주시는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욕심을 버리는 자들 곧 죽는 자들에게 입니다
그것이 곧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리새인들이 왜곡시킨 성경을 바로 잡으셨고 바리새인들은 양심에 찔리니 스스로 져 버렸던 것입니다
제 소견에는 김성수 목사님은 본질을 벗어나 심히 왜곡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제가 25여년전 김세윤박사님과 목회자 세미나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논쟁을 조금하다가 근본적 이질감을 느끼고 그만 두었는데
그것에 영향을 끼친 것이 사람의 기본 생각이나 양심이 아닌 신학의 벽인 것을 알고 그만 두었습니다
제 의견에 성의있는 답변 거듭 감사드립니다
Hun
의견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블로그가 방문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저는 바랄 뿐입니다.
김세윤 박사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 제가 전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한 번 보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가 가르치는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john lee
제가 처음 김목사님 설교를 들었을때 느낌은 참 충격이였어요 .이런 깨달음을 가진 분도 있구나.요즘 설교가 너무 문제가 많아서. 그런데 조금 더 듣다 보니까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도 생각이 들었어요. 좀더 알기 위해서 사이트를 찾았는데 김목사님 설교 내용을 약간 최종적인 진리 인양 그런 느낌을 받아서 ,,,
결론은 휼용한 목사님입니다 , 그러나 모든 인간은 완전할수는 없읍니다. 누가 그분의 설교 내용을 비판했다고 해서 언짠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분을 맹신하는 것이 그 분에게 해가 될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저도 가끔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데 가장 두려운것이 사람들의 시선입니다.제가 진리를 알고 가르친다고 제가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제가 자주 아내에게 지적을 받읍니다. 당신 성경 가르치면서 왜 그렇게 살지못해. 살지도 못하면서 왜 사람들 오해하게 그런 말을 해. 그래서 저는 성경공부 시작전에 그리고 간간히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라져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이 진리의 길을 같이 걸어가자는 차원에서 말씀을 해석하니까 혹 제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도 실망하지 마시라고.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나 깨달지 못한사람이나 본질상 같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읍니다.좋은 설교를 들으면 그냥 하나님이 그분에게 좋은 은사를 주셔서 나로 말씀을 깨달게 하는구나 하고 말씀을 전한분은 잊었으면 합니다.그러지않고 그 분을 따를때는 따른 자도 존경을 받는자도 해를 받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곳에서 언급한 내용도 타당하다고 느껴집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우리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한단계 놓아지는 것이 아닐련지.
진리를 논하는 기본은 상호 준중이며 또한 사실에 근거한 반론이며 분명한 증거를 성경을 통해서 제시해야지 감정적인 글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박성민
동네 편의점에 신학 대학원생이 한달간 알바를 한적이 있습니다. 나름 기분좋게 여러가지 신학적 대화를 나누었는데 한달을 못채우고 자신은 노동 스타일이 아니라며 이일이 너무 힘들다며 그만 두더군요.. 허허
하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못배우고 병들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보다듬으십니다. 글과 말을 이어서 나름 논리라고 장황하게 논쟁하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습니다. 티끌 같은 인간이 무엇이길래.. 오십보 백보인 유아적 수준인것 같은데 바리세인들에게 혹독한 질타를 하시고 왜 이처럼 처절한 차이를 두시는 것일까 헛웃음이 나온적도 있지만 진화론적이든 창조론적이든 인간은 신과 관계되는 가장 절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존재성이 절대로 가볍지 않다는 것이지요.
저는 현재 대형 축산 생산지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 수만 마리의 생명이 탄생하고 임의로 도태시키고 불필요한 분량은 일주일에 수십만 마리를 죽여서 처분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도시처럼 교양과 문화로 포장되어 있지 않지요.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매초, 매순간 급변하는 행동과 태도.. 잔혹함과 이기적 성품이 당연히 살아가는 방식인 곳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 “생존모드”로만 작동하는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단 몇일이라도 “희생과 배려와 섬김”이라는 여유롭게 포장된 선함(인간 개념의 착한 행실)
으로 다가간다면 결코 오래 견디지 못하고 모두 뜯기고 빼았기고 모함받아서 도태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그렇고 우주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든 이런 험악한 세계에서 과연 자기의가 전혀 없는 성화된 모습으로 희생과 배려로 몇일을 견딜 수 있을까.. 조금씩 성화되어 다가갈 수 있는건가…
쉽고 편안한 성화를 이를 수 있는건가..
책속에 숨어들지 말고 세상을 살아가야지요…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간의 언어로, 복잡한 문장으로 바벨탑을 쌓지 말고 다 뜯기고 살을 발리고 뼈를 갈아가도록 다주고 죽으십시요.
모든 교리를 다 지우고 성경을 성경 그대로 다시 보십시요. 그리스도의 길…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고 겁부터 나기 때문에 성경 그자체를 보지 않고 다른 의미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들고 두렵다면 하나님을 떠나면 됩니다. 저도 떠나려 했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이 저에게 남겨 주신 티끌 같은 영적 양심상 나 자신을 위해 만들어가는 성경은 도저히 역겨워서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더군요.
그리고 제가 느끼는 바는 김성수 목사님의 강해로 의해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추종”이라는 단어를 그처럼 강조하시는 심리가 다소 비판속에 자기 과시를 위한 유치한 노출로 느껴지는 것은 오해이길 바랍니다.
Hun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 제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 “글과 말을 이어서 나름 논리라고 장황하게 논쟁하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습니다.”
글쎄요,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타매하신 이유가 그들의 장황한 논쟁과 비판이었다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 “모든 교리를 다 지우고 성경을 성경 그대로 다시 보십시요.”
성경과 교리는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성경과 교리가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사도들도, 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또 성경은 바른 교리 가르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쓴 글이 있으니 관심 있으시면 한 번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교리의 중요성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성민
성경은 하나님이 시간속에 역사하시는 예수라는 실체성에 대해서만 사인을 보내는 기록이며 교리는 그 예수가 말씀으로 전한 한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만이 실체이시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것입니다. 그 하나의 교리조차 지킬 수 없는 제자신이 인생동안 계속하여 폭로되면서 좌절하며 그 좌절하는 제자신의 에고성에 대해서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 외의 인간들의 논리에서 나온 교리에 관심갖는 또다른 망상을 품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김대석
제가 25여년 전에 성경 지식이 해박하다고 자부하는 교회의 한 강도사 분에게 요즘 목사들이 참으로 게으르고 힘들게 일하는 교인들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헌금을 너무 쉽게 강요하고 허비도 지나치다고 했더니 그분 왈 사실은 다 맞는 말씀인데 그 동안 아무도 자신에게 이런 충고를
해 준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니 다음 날부터 3d 업종 공장으로 일하러 갑디다
내가 저으기 놀란 것은 그 신학 수준이 상당히 높으며 세상에서 험한일을 해 보지도 못한 분이데 .. 나도 못할 일을 하더군요 현 세에 보기 드문 분이고 마음으로 존경되고 사랑이 가더군요
E Kim
김성수 목사의 주장을 10%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비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도 옹호도 가능합니다만 그전에 먼저 비판이나 옹호할 대상의 논지를 정확히 알아야 함이 필수 선행요건입니다. 한 일 년은 매일 공부해 보고 김성수 목사 주장의 기본 개념부터 파악 후에 다시 글을 올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에 기본 용어의 개념조차 김성수 목사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글이라는 인상이 들어 무엇부터 짚어 이야기 하기가 어렵습니다. 설교 몇 편 듣거나 책 몇 권 읽어본 후 쓰지 마시고 한 일년은 책임감있게 공부하시고 올려 주십시오. 김성수 목사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Hun
의견 감사합니다.
제 글이 작성되기 이전에 이미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E.Kim 님과 같은 말을 — 김 목사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든지, 설교 몇편 듣고 비판한다든지, 은혜의 개념도 모른다는 식의 말을 — 하시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글을 쓰게 된 동기라고 글머리(§0.1)에서 밝혔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장황하더라도 김성수 목사의 말을 하나하나 인용해가며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신앙고백은 복음과 율법, 그리고 은혜의 언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관련 부분을 인용하며 설명했습니다. 제가 과연 김 목사의 가르침을 오해했는지는 독자들이 직접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왜 제가 설교 몇 편, 책 몇 권 읽고 섵불리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자료들에서 드러나는 김 목사의 오류만 가지고도 벌써 책을 한 권 낼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오류들이 최종적으로 반법주의라는 이단 사상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에 여기서는 거기에 집중한 것입니다. 성경의 큰 가르침 혹은 대종(大宗)을 논히면 김 목사의 다른 오류들은 독자들이 알아서 파악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정도 길이의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후기에서도 밝혔듯이, 김 목사의 오류들에 대해 다른 분들이 쓰신 글이나 강의도 충분히 있습니다.)
‘성경의 명료성’(perspicuity of the Scripture)을 상기해보시기 바랍니다 — 흑암과 같은 중세 시기에 종교개혁자들이 분명히 밝힌 것이 바로 성경의 그 핵심적 가르침, 그 대종은,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고 명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큰 도리들은 2000년 신약 교회의 역사 속에서 (때로는 그 빛이 희미할 때가 있었을 지언정) 면면히 흘러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루터, 칼빈, 에드워즈 처럼 교회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은 신학자/목회자들은 한결같이 앞선 세대의 가르침을 체받아서 보강할 것은 보강해서 다음 세대에 넘겨주었지, 역사적인 신앙과 동떨어진 엉뚱한 소리를 하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큰 도리들은 어떤 신자라도 쉽게 배워서 그 진리의 능력을 맛볼 수 있는 것이지, 성경 공부 많이했다는 종교적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성경의 명료성을 생각할 때,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을 일 년이나 공부해야 기본 개념이 파악된다는 식의 생각은 굉장한 교만입니다. 지난 200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풍성하고 명료하게 해명하신 그 나라의 도리들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과 김성수 목사의 목회 생활 몇 년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단언하건데 김 목사의 책 혹은 설교를 한 시간 읽거나 들을 때에 역사적인 신앙고백과 그 신학을 아홉 시간 공부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제가 쓴 글의 요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 즉 김성수 목사가 가르치는 반법주의가 역사적인 신앙과 그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서울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는 김성수 목사가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가르친다고 선전합니다. 지금이라도 그러한 거짓말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로 의구점을 포함하여 복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북미개혁 장로교단에 소속된 교회에서 그 교단에 이사로 있는 담임 목사님의 진실없음에 시험이 들어 교회를 옮기게 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첫째가 소위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교단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및 은혜와는 별 상관이 없으며, 둘째는 다른 목사님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신자의 가슴에 날 선 검처럼 선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입니다. 제 이해로는 문제의 출발점이 “신자” 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우선 “신자”로 간주함에 많은 오류가 생긴다는 것을 보며, 같은 오류가 김성수 목사가 전하는 복음의 오류를 지적하는 이 글에서도 발견합니다. 건전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시도가 비판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고 김성수 목사를 반법주의자로 판결하며 그 반법주의를 이단이라 하니, 결국 포인트는 그 분을 이단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인 글로 보입니다. 저는 제 작은 믿음으로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에 아직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 목사님 중에 그 분 수준으로 말씀을 전하는 분들은 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지금껏 김성수 목사님을 통하여 들은 바로는, 예수님으로 증거된 복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의 완성으로 이어지므로 복음은 율법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못 들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 분의 로마서 광해를 다 들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그 분의 설교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세상에 그 분처럼 말씀을 공부하며 양들을 가르치려는 모습을 찾을 수 있는 분들을 더 허락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의 글을 쓰신 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더 임하시길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Hun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서 댓글 남겨주신 분과 비슷한 얘기를 하시는군요 —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니 그의 설교를 더 들어보라고요. 그때 그분께 드린 대답을 반복하지 않겠으니, 거기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비판이 비판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제 글을 보시면 저는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김 목사의 주장이 역사적인 개혁신앙과 신학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임으로써 개혁파 신앙고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김성수 목사 스타일의 설교를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차라리 들으실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가 종종 사용하는 “폭로되어지는” 혹은 “만들어 내시고야 말겠다는” 식의 표현은 모두 박영선 목사님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물론 현대 기독교계에서 순전한 말씀의 해명을 접하기가 어렵다는 것 동감합니다. 그래서 제 가슴이 아픕니다 — 얼마나 말씀의 기근이 심하기에 김성수 목사의 이단 사설을 듣고 사람들이 감명을 받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보전하십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순전한 말씀의 해명은 우리에게서 멀지 않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본 블로그에 종종 방문해 주십시오. 본 블로그에서 소개하는 신학자 혹은 목회자들을 글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복음은 율법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김성수 목사가 그렇게 말한 대목이 있으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Peter paik
이글을 쓰신 분 김 목사님의 설교를 더 들어 보세요. 복음과 율법을 나눌 수 있나요
복음과 율법은 하나가 아닌가요. 당신은 하나님과 예수를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 아니던가요. 그리고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자기와 다르다고 함부로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당신에게 은혜는 무엇인가요?
Hun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 갈라디아서 3:12
복음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고, 율법은 이미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가”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율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쉬운 것을 어렵게 만드는 김성수 목사의 설교에서 빨리 벗어나시기를 촉구합니다.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자세하게 근거를 제시했는데도 “함부로” 정죄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야 말로 함부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요? 게다가 저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신앙고백을 하였는지도 자세히 적었는데, 그런 역사적인 신앙고백을 “알량한” 지식이라고 폄하하시는 것은 교만 아닐까요? 개혁주의 교리를 부정하면서도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김성수 목사가 사역하였다는 서울 서머나 교회의 거짓말은 언제쯤 그치게 될까요?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 이사야 30:9
강물
수고가 많으시네요.
제가 지금까지 본 김성수 목사에 대한 분석 중에 가장 잘 정리된 글 하나라고 보입니다.
감정적이고 비판적인 글들까지 일일이 성실하게 답변하시는 모습에 격려를 보냅니다.
저도 꽤 관심있게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았는데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1. 성화에 대한 부정 또는 율법의 3용도에 대한 부정.
2. 문맥을 떠난 해석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
3.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비판.
아직 성경의 대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본문에 대한 깊은 해석이 없는 설교들을 듣다가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최고의 설교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치, 성경공부를 제대로 안 해 본 사람들이 신천지의 비유풀이와 요한계시록 강의를 들으면
흠뻑 빠져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김성수 목사의 설교가 그 정도라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내용들도 많이 있으며, 그 설교를 통해 충분히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김성수 목사의 오류와 한계는 금방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여기 주인장님께서 쓰신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를 추종하는 분들이 제발 마음을 열고 이 글을 잘 읽었으면 합니다.
여기 쓰여 있는 분석과 비판과 대안은
결코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김성수 목사는 사실상 성화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인에 대한 폄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김성수 목사의 자살은 그가 전한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자기 자신이 성화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성화 자체를 부인하며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을 그토록 비판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이 김성수 목사의 설교에서
해답을 찾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고 변화되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 때에
김성수 목사의 설교는 마치 거기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는 메시지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에 비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은
듣기 싫은 율법주의처럼 들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발견하는 것만을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값 없이 주시는 용서를 통해서요,
또 하나는, 우리를 성화 (더 나아가 영화) 시키시는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Hun
동의합니다. 김성수 목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은혜를 붙든다고 하지만, 우리를 씻기고 거룩하게 길러 나가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부인한다는 면에서 오히려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지요. 의견과 격려 감사합니다.
Sonya Kim
맘에 무척 드는, 깔끔한 3자로서의 객관성과 성의 았는 의견에 동감합니다.
맘을 사로잡는 파워풀한 김목사님의 강해로 얼마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갈수록 갈바를 잃는 삶의 총체적 혼란을 마주하며, Hun 님의 글 같은 근거있고 명료한 이견을 찾게되었습니다.
정성을 기울여 크리스찬의 삶의 자세가 왜곡되지 않길 바라는 술자의 의도만큼, 성의있고 솔직한 공감의 글이 반가워 좀 달아봅니다.
성민
김성수 목사님 설교가 극단적인 부분이 있어서 가려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요, 인용하신 부분들은 논리적으로 잘 분석은 해놓으셨는데요.. 맥락상 김 목사님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주제 넘은 말씀일수도 있습니다만, 신학 공부를 조금 하셨다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아요. 남을 비판하기는 항상 더 쉽거든요.. 그러면서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비판을 다 피해가고요. 님이 그렇다는 말씀은 아니지만 한 분 주님의 일 하는 같은 동역자로서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Hun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께서 좋은 뜻을 가지고 남기신 의견이라는 점에는 의심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귀하께서는 논점일탈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김성수 목사든 글을 쓴 저든 누구도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누가 더 겸손한가 또한 논점이 아닙니다.
글의 논점은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반법주의였다는 것입니다. 돌려 말하자면, 김성수 목사는 틀렸고 제가 맞다는 것이 논점이 아니라, 김성수 목사는 반법주의를 가르쳤고 그것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고백과 거리가 멀다는 것뿐입니다. 그런 제 글에 대해 논리적으로 잘 분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김성수 목사가 반법주의를 가르친다는 제 주장에 어느정도 수긍을 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귀하께서 반법주의를 가르치는 사람을 “한 분 주님의 일 하는 같은 동역자”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반법주의는 이해해줄 수 있는 실수가 아니라 정죄 받아 마땅한 잘못이었습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반법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에이든 토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물론이고 앞선 신앙의 선조들은 반법주의를 가르치는 자들을 “한 분 주님의 일 하는 같은 동역자”라고 봐주지 않았습니다. 반법주의를 열성으로 가르친 김성수 목사를 귀하께서는 “한 분 주님의 일 하는 같은 동역자”라고 생각하시는듯 한데, 그런 귀하의 심정이 참으로 고상하다는 것은 제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참된 겸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고상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또한 저의 목적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steve lee
공부많이하셨네요.
남들과 비슷한말로 님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겠습니다.
각자 자기가 맞다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모든 인간들은요. 물론 님도 자유로울수는 없겠지요.
님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자기가 맞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님이 열심으로 댓글달아주시는 그 정성으로 이해하려 노력해주셔요.
김성수목사도, 님도,저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을 받아야하는 자 일뿐 그 무엇도 아닙니다.
내가 맞고 네가 틀렸네가 아니라 , 쉽게말해 그런가보다 해주세요.
누가맞는지는 절대자의 몫으로 남겨주세요.
님이 가진 진리가 절대이듯이 그들이 가진 진리가 그들에게는 절대 이니까요.
성경에서 무엇을 얻으려하니까 이런 오류가 발생되는겁니다.
교과서가 아닌것은 님도 아시겠죠. 많이 공부하셧ㅆ으니까요..
이단으로 몰고가기에는 너무 억지인것 같네요.
하나님이 아닌이상 더는 심판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도사3장 22절을 (3장 전체)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자기일에 즐거워 하는것이 무엇인가 고민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메일 주셔도 되요.원하시면.
Hun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께서 좋은 뜻을 갖고 의견을 남겨주셨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의견에 논리적인 오류가 많아서 다른 독자들에게 별로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먼저 “각자 자기가 맞다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모든 인간들은요. 물론 님도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중략] 내가 맞고 네가 틀렸네가 아니라, 쉽게말해 그런가보다 해주세요 [중략] 누가 맞는지는 절대자의 몫으로 남겨주세요.”라고 하시는 귀하께서는 논점일탈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제 글의 논점은 “내가 맞고 김성수 목사는 틀렸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의 논점은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은 반법주의 위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김성수 목사는 틀렸고 제가 맞다는 것이 논점이 아니라, “김성수 목사는 반법주의를 가르쳤고 그것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고백과 거리가 멀다는 것뿐입니다.
“이단으로 몰고가기에는 너무 억지인것 같네요.”라고 하셨는데, 이는 애매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에서 밝힌 제 논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반법주의라는 저의 결론이 억지라는 뜻인지, 아니면 반법주의 자체를 이단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억지라는 뜻이지 알 수가 없군요. 어떤 것이 되었던 그리 생각하시는 것은 귀하의 자유입니다. 다만, 김성수 목사가 반법주의를 설파하지 않았다, 혹은 반법주의는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려면, 거기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사 41:21후)
“님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자기가 맞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님이 열심으로 댓글 달아주시는 그 정성으로 이해하려 노력해주셔요.”라고 하셨는데, 이것 역시 논점일탈의 오류입니다. 제가 언제 다른 사람들이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습니다. 제 글 어디서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김성수 목사의 주장을 이해하려고 제가 노력을 해달라는 귀하의 의견은 더 심각한 논점일탈입니다. 제 글 전체가 김성수 목사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분석한 결과의 논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여러 설교들을 들어보고 과연 김성수 목사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고민하였고,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을 분명한 근거들과 함께 제시하였습니다. 김성수 목사를 추종하시는 분들의 의견을 통해 ‘이분들이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것은 무엇인가’ 들어보았고 결론은 추종자들의 상당수 역시 반법주의를 배워서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이 반법주의를 믿고 따를 자유를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그런 신앙이 개혁주의 교리에 바탕한 것이라고 선전하는 거짓과 기만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성수목사도, 님도, 저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을 받아야하는 자 일뿐 그 무엇도 아닙니다. 내가 맞고 네가 틀렸네가 아니라, 쉽게 말해 그런가보다 해주세요”라고 하셨는데, 이런 의견들을 가리켜 피장파장의 오류이자 연민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더는 심판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자 의도확대의 오류입니다. 저는 본 글에서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반법주의인지 아닌지 판단하였을 뿐입니다. 어떤 사안 혹은 주장의 참 거짓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심판자를 자처하는 행위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판단도 꺼려야 할 터이나, 성경은 그리 가르친 적이 없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2-3)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전 5:12-13)
“성경에서 무엇을 얻으려하니까 이런 오류가 발생되는 겁니다.”하셨는데, 지금 귀하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십니까?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얻기 바라시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여 주신 (여러) 목적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딛 1:1–2) 예를 들어 요한1서가 기록된 목적중 하나는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교리를 가르치려 함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1 5:13) 영을 분별하기 위해 교리를 살필 것을 또한 가르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1 4:1–3) 바른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들은 지식을 지켜야 합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말 2:7) 성도들은 믿음에 덕과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 1:5) 교회는 바른 교리로 권면하고 거스르는 자를 책망해야 합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딛 1:9) 교회는 바른 교리에 대해서는 지혜롭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거치게 하는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롬 16:17–19)
끝으로 전도서 3장 22절을 언급하셨는데, 참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반법주의를 사도 바울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누고 싶네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반법주의는 이해해줄 수 있는 실수가 아니라 정죄 받아 마땅한 잘못이었습니다:
다른 신앙의 선조들의 의견도 참고하지요. 사무엘 러더포드는 반법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에이든 토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상에서 보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물론이고 앞선 신앙의 선조들은 반법주의자들을 놓고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란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성경이 바른 교훈(doctrine, 교리)에 대해서도 얼마나 강조하는지 충분히 알려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법주의에 대해 판단을 보류하겠다는 태도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저해하는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참된 겸손이 아니며 오히려 ‘꾸며낸 겸손'(골 2:18)이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추구하지, 고상한 그리스도인을 추구하지 않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DAVID
현재 김성수 목사님의 문제는 님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해석의 문제에 대하여는 고인이 된 상황에서 그 누구도 진의를 알길이 없으니 전체적인 신학적인 주장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헬라어 한가지 가지고 수십가지의 상황에 따른 해석이 가능하고 그 한가지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님의 오류라고 생각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그동안 주장해왔던 성령운동 은사운동 기도운동 부흥운동 등 기타 많은 신학적인 조류가 흘러 갔지만 그들에게도 장점과 단점이 있었고 한 개인의 신학적인 주장과 설교는 님 혼자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더구나 지금 고인이 되었다는 그 분을 폄하하는 것은 그 신학의 논쟁에 대하여는 이해가 가지만 그것을 전체로 부정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완벽한 인간이 없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판단할실 것입니다.
중요한것은 그의 설교내용을 보면 자신도 끊임없는 성화에 대한 도전과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고 치열한 사회인으로서 가정에서는 아버지로 삶도 살았던 목사님 자신도 자신의 신앙에 대한 갈등과 신학적인 해석에 대한 노력을 보면서 큰 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님 역시 이러한 사이트를 열어놓고 그동안 생을 성실히 살아온 한 목사님을 일거에 폄하하고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으로 매도하는 것은 신학을 떠나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율법과 은혜의 신학은 그 한 부분에 치우치는 수많은 이단들을 만들게 되고 아직 신학을 알지 못하는 신앙인들에게 상처를 줄수 있으며 한국교회가 이단들과 영적전쟁을 하는것도 힘든데 이러한 글 몇줄과 현학으로 우리 기독인들을 오도할 수 있는 문제가 생길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즉 모든 결과는 님도 하늘문을 열고 들어갈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지 이러한 두ㅓ 없는 글로 고인이 된 순수한 열정을 가졌던 한 목사의 신앙과 신학에 대하여 더이상 언급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많은 순수한 신앙인들이 신천지와 같은 작은 산도 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교리적인 나약함과 아직도 구원에 대한 해석과 율법의 문제를 논하는 이 상황이 답답할 뿐입니다
님이 논쟁에 논쟁을 거듭하는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군요?
그리고 님의 성화에 대한 노력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면 이 지면에서 당당하게 밝히시고 그냥 신학적인 논지를 주장하시는 것이라면 그걸로 마치시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한 기독교인으로 더구나 지금은 고인이 된 목사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접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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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님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중심있는 신학도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게재하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Hun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의견은 크게 봐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견은 위에서 다른 분들이 많이 하셨습니다. 댓글을 남기실 때는 다른 분들과 중첩되지 않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귀하의 댓글에는 단지 다른 분들의 의견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논리적 오류 역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귀하께서 좋은 뜻에서 댓글을 남기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지만, 논리적으로 오류가 담겨진 댓글은 다른 독자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다음 번에 또 댓글을 남기실 때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귀하의 댓글에 나타난 논리적 오류에 대해 지적함과 동시에 몇 가지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적하는 논리적 오류의 이름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것들이 오류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현재 김성수 목사님의 문제는 님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논점 일탈의 오류, 인신공격의 오류, 및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입니다. 제 글의 논점은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은 반법주의에 서있다입니다. 그러면 제 글에 제시된 근거가 분명하고 논리가 정연한지 독자가 비평하는 것이지, 제가 그런 논술을 할 자격이 있다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논점일탈이고, 제가 논리적 생각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인격모독이며, 전문가들만이 여기에 대해 의미 있는 논술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권위에의 호소입니다.
> 저는 해석의 문제에 대하여는 고인이 된 상황에서 그 누구도 진의를 알길이 없으니 전체적인 신학적인 주장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이자 논점일탈입니다. 김성수 목사가 속으로 어떤 깊은 뜻을 품고 있었는지가 논점이 아닙니다. 그가 남긴 설교와 서책이 어떤 사상을 전달하고 있는가가 지금 논점입니다. 이런 것은 김성수 목사의 진의를 알아야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남긴 설교와 서책을 읽고 거기에 바탕해서 논리적인 비평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 헬라어 한가지 가지고 수십가지의 상황에 따른 해석이 가능하고 그 한가지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님의 오류라고 생각 합니다.
잘못된 균형의 오류이자 논점일탈의 오류입니다. 첫째, 설령 수십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해도 모든 가능한 해석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제 해석이 옳다는 것이 논점이 아니라, 김성수 목사의 반법주의는 역사적인 신앙고백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논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해석하고 싶은대로 해석할 자유가 있지만, 자신의 해석이 역사적인 신앙고백과 일치한다고 멋대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김성수 목사의 추종자들은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개혁주의 교리 위에 바탕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짓이요 기만이라는 것이 제 글의 논점입니다.
> 지금 한국 교회가 그동안 주장해왔던 성령운동 은사운동 기도운동 부흥운동 등 기타 많은 신학적인 조류가 흘러 갔지만 그들에게도 장점과 단점이 있었고 한 개인의 신학적인 주장과 설교는 님 혼자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인신공격의 오류입니다. 제가 “쉽게 판단했다”고 여기시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저는 저의 주장에 대한 근거들을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인용하며 제시하였고, 그에 반해 역사적인 신앙고백은 어떻게 진술하고 있는지도 보였으며, 이러한 근거들 위에서 논리적인 주장을 하였습니다. 귀하께서는 제가 “쉽게 판단했다”는 것을 분명한 근거들을 가지고 와서 보이시던지, 아니면 제 논술에서 논리적 오류를 지적해 주십시오. 그런 노력도 없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오’라고 하는 것은 큰 교만입니다.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사 41:21후)
> 더구나 지금 고인이 되었다는 그 분을 폄하하는 것은 그 신학의 논쟁에 대하여는 이해가 가지만 그것을 전체로 부정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완벽한 인간이 없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판단할실 것입니다.
의도 확대의 오류이자 피장파장의 오류입니다. 김성수 목사를 폄하하는 것이 저의 목적이 아니라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반법주의 위에 서있음을 논술하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게다가 반법주의자들에게는 김성수 목사가 반법주의자라는 것이 폄하가 아니라 칭찬이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가지고 모든 판단을 보류하는 것은 김성수 목사가 자주 범하던 피장파장의 오류인데, 이것은 단지 논리적 오류일 뿐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됨을 모르십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전 5:12-13)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2-3)
> 중요한것은 그의 설교내용을 보면 자신도 끊임없는 성화에 대한 도전과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고 치열한 사회인으로서 가정에서는 아버지로 삶도 살았던 목사님 자신도 자신의 신앙에 대한 갈등과 신학적인 해석에 대한 노력을 보면서 큰 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연민에 호소하는 오류이자 논점일탈입니다. 김성수 목사가 인생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가 논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설교가 반법주의를 가르치고 있느냐가 논점이고, 이 논점의 참 거짓 여부를 밝히는데 있어서는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 님 역시 이러한 사이트를 열어놓고 그동안 생을 성실히 살아온 한 목사님을 일거에 폄하하고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으로 매도하는 것은 신학을 떠나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도 확대의 오류, 인신공격의 오류, 그리고 도덕주의의 오류를 겸한 논점일탈입니다. 김성수 목사를 폄하하거나 매도하는 것이 저의 목적이 아니라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반법주의 위에 서있음을 논술하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제가 김성수 목사를 폄하하거나 매도했다고 여기시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저는 저는 저의 주장에 대한 근거들을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인용하며 제시하였고, 그에 반해 역사적인 신앙고백은 어떻게 진술하고 있는지도 보였으며, 이러한 근거들 위에서 논리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귀하께서는 제가 “폄하하고 매도하였다”는 것을 분명한 근거들을 가지고 와서 보이시던지, 아니면 제 논술에서 논리적 오류를 지적해 주십시오. 그런 노력도 없이 제 논술이 “옳지 않다”고 하시는 것은 도덕주의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저에 대해 무고를 범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사 41:21후)
> 율법과 은혜의 신학은 그 한 부분에 치우치는 수많은 이단들을 만들게 되고 아직 신학을 알지 못하는 신앙인들에게 상처를 줄수 있으며 한국교회가 이단들과 영적전쟁을 하는것도 힘든데 이러한 글 몇줄과 현학으로 우리 기독인들을 오도할 수 있는 문제가 생길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오도는 반법주의를 가르치면서 개혁주의 교리에 바탕한 설교를 행한다고 지금도 선전하는 김성수 목사의 추종자들이 하고 있지, 그런 그들의 기만과 거짓을 밝히는 저의 글은 오도가 아니라 인도에 해당합니다.
>즉 모든 결과는 님도 하늘문을 열고 들어갈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지 이러한 두서 없는 글로 고인이 된 순수한 열정을 가졌던 한 목사의 신앙과 신학에 대하여 더이상 언급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많은 순수한 신앙인들이 신천지와 같은 작은 산도 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교리적인 나약함과 아직도 구원에 대한 해석과 율법의 문제를 논하는 이 상황이 답답할 뿐입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자 의도확대의 오류입니다. 저는 본 글에서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반법주의인지 아닌지 판단하였을 뿐입니다. 어떤 사안 혹은 주장의 참 거짓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심판자를 자처하는 행위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판단도 꺼려야 할 터이나, 성경은 그리 가르친 적이 없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2-3)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전 5:12-13)
> 님이 논쟁에 논쟁을 거듭하는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군요?
귀하의 댓글처럼 다른 분들이 이미 피력한 의견을 반복적으로 게시하고 또 논리적 오류가 많은 댓글을 그냥 삭제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는 하나하나 답변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논쟁을 거듭하는 것같은 인상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댓글을 이제 그만 받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혹시 제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있을까하여 아직은 댓글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귀하께서 앞서 올라온 댓글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김성수 목사의 추종자들의 반론은 크게 “은혜가 뭔지도 모르면서 너는 얼마나 성화를 이루었기에 남을 판단하는가” 식의 인신공격의 오류, “완벽한 사람은 없는데 함부로 판단하는가” 식의 피장파장의 오류, 그리고 “하나님만 심판하실 수 있는데 네가 심판하려 하는가” 식의 의도확대의 오류가 대부분입니다. 저의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분명한 근거, 혹은 제 논술에 존재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시는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새로운 시각 없이 동일한 논리적 오류들만 반복될 것 같다면 조만간 댓글을 닫아도 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님의 성화에 대한 노력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면 이 지면에서 당당하게 밝히시고 그냥 신학적인 논지를 주장하시는 것이라면 그걸로 마치시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논점일탈이자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입니다. 제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학적인 논지를 주장하는 것에서 마쳤습니다—즉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은 반법주의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에 대한 논술을 하는데에 저 개인의 성화의 노력이 무슨 상관입니까? 제 성화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따라 김성수 목사가 반법주의를 가르쳤다는 사실 여부가 달라집니까? 게다가 제 글에 분명히 썼지 않습니까, “성화는 결코 성도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성취 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열매”라고. 그런데 성화에 대한 제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밝히라니, 그런 논점일탈을 저보고 하라고 하시는 것은 지독한 부조리입니다.
> 한 기독교인으로 더구나 지금은 고인이 된 목사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접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의도확대의 오류입니다. 수차례 반복하지만, 제 글의 논지는 김성수 목사가 좋은 목사인지 여부가 아니라, 김성수 목사가 반법주의를 가르쳤는지 여부입니다. 제 주장은 그가 반법주의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런 김성수 목사가 좋은 목사였다고 생각하고 말고는 독자의 자유입니다.
> 부디 님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중심있는 신학도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게재하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Hun
독자들께: 혹시 제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있을까하여 1년이 넘게 본 기사에 대한 댓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위의 여러 댓글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김성수 목사의 추종자들의 반론은 크게 세 가지의 논리적 오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 세가지 논리적 오류들은 논점일탈의 오류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저의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분명한 근거, 혹은 제 논술에 존재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시는 분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위의 논리적 오류들을 담은 주장들만 계속 되풀이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 기사의 댓글란을 닫습니다.
혹시라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실 수 있거나 제 주장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시고 싶으시다면 제게 따로 이메일을 보내주십시오. (본 블로그 맨 위에 있는 ‘연락’ 페이지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다른 독자들께 유익한 내용이라고 판단되면 댓글로 달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