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의 반법주의 – 후기
얼마 전에 쓴 (故) 김성수 목사의 반법주의에 관한 글은 많은 분들이 오셔서 읽으셨습니다. 그 글은 졸인이 서둘러 쓴 글이었는데, 그럴 필요를 느낀 것은 김성수 목사가 (1) 개혁주의적인 표현들을 가져다 쓰면서 실내용은 전혀 다른 것 곧 반법주의를 가르치고 있고 (2) 그러면서 본래의 개혁파 신앙고백을 와전하고 (3) 그의 설교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있다는 사실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일단 굵직한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 다 하지 못한 이야기 몇몇을 여기 적습니다.
김성수 목사 설교에 대한 다른 목회자들의 분석 몇몇
무엇보다 먼저 김성수 목사가 반법주의를 가르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장기영 목사의 글이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의 성경적 균형을 잃은 메시지에 대하여” 이분은 웨슬리 신학을 전공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분의 신학적 견지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제가 동의할 수는 없지만, 김성수 목사의 반법주의를 지적하는 많은 부분에서 졸인과 의견이 같습니다.
유튜브에는 김성수 목사의 성경 접근법이 가지는 문제점을 자세히 지적한 진용식 목사(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 회장)의 강연이 올라와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가 말하는 죄
그다음, 김성수 목사가 이해하는 선악과입니다. 이것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죄’에 대한 개념과도 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의 그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하나님 앞에서의 본질적 ‘죄’라는 것이 있어요. 그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피조물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다 ‘죄’라고 그래요. 김성수, 산상수훈 2강 (20:39-20:52)
선과 악이라는 것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행위이기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정의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선이라는 게 뭐였죠, 토브(טוֹב)? 선이라는 것은, 여러번 설명드렸다시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의도하신 것이 그분이 세워놓으신 질서 속에서 잘 실행되어지고 유지되어지는 상태를 선, 토브(טוֹב)라고 한다고 했잖아요?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죠?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을 붙들고 있는 질서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에 완전히 부합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어지는 것이 선이에요.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순종이 악이고.
김성수, 창세기 16강 (39:26-40:09)
그래서 김성수 목사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의 핵심은 자기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상의 말들이 뭐 그리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틀리면 사람들이 잘 안 넘어가지요.) 하지만 제가 이미 쓴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성경에 ‘죄’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항상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생각과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토브(טוֹב)라는 말도 항상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하신 것이 그분의 질서 속에서 잘 실행되어지고 유지되어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뿐만 아니라 세상 어떤 언어를 봐도 단어라는 것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한다는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결국 문맥에서 단어의 뜻은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우리 시조 할아버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지은 죄가 (김성수 목사 말대로) 아담 자신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아담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 하나님의 책망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1) 선악과를 만져도 상관 없고, 갖고 놀아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던지 그것은 전혀 따질 것이 없고 오로지 하나, 먹지 말라는 것 뿐입니다. 먹지만 않으면 죄는 성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의 말처럼 피조물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생각이니 행동이니 하는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는 적어도 이부분에서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죄 가운데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는 특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선악과 금령과 관련해서는 ‘먹지 말라‘ 그뿐이고,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첨가한 하와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3:3 참조). 김성수 목사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이 제시하는 죄의 개념은 하나님의 명령 즉 계명을 중심으로 생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에 쓴 글 §C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 첨언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시조 아담에게 내리셨던 선악과 금령은 당신께서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겠다는 하나의 계약이었습니다,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과 더불어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내가 너의 생명을 취하겠다’는 일종의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 이면에는 ‘선악과를 만일 먹지 않으면 죽지 않고 산다’는 필연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 금령을 놓고 통상 행위의 언약(Covenant of Works)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행위 여하에 따라 생사가 결정 되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아담이 언약을 어겼다’ (호세아 6:7 참조) 할 때 바로 이 언약을 가리킵니다. 아담이 언약을 어긴 즉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약속, 곧 장차 여인의 후손 중에 뱀의 머리를 밟을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15 참조). 이를 통상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행위 여하에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역사 속에서 여러 족장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언약을 더 구체적으로 계시하시고 새롭게 하여 주셨는데, 그 끝에 당신의 친아드님 곧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나타내 보이시고, 성취하시고, 또한 자기 피를 가지고 영원한 보증이 되셨습니다. (“율법과 복음 (4)” 참조)
그랬을 때,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실 것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성경이 ‘구약’ 곧 옛 언약이라고 할 때는 항상 이 시내산 언약을 가리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내산 언약이라고 하는 것도 큰 그림에서는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국가를 대상으로한 현세적인 언약을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한시적으로 추가하셨는데, 그 현세적인 언약은 행위 언약의 형태를 갖추어 주셨습니다. (자세한 것은 “모세 언약은 은혜의 언약인가 행위의 언약인가?” 참조.) 이로써 아담이 행위 언약을 파기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킨 자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큰 원칙이 어디로 사라지고 없어진 것은 아님을 보이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파기한 행위 언약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이루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는 것과 더불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는 사실 곧 하나님의 계명을 평생을 완벽하게 다 지키신 분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보면 죄를 지은 자는 단지 형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회복을 위해 값을 치뤄야 했습니다 (예: 출애굽기 22장 1절). 그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단순히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훼손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셔야 했습니다. 전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순종(passive obedience)이라 하고, 후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active obedience)라고 하는데, 둘 모두 당신의 백성들의 칭의를 위해 행하신 것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의 순종처럼 여기시고 의롭다 하심” 참조) 이런 사실들 앞에서 예수께서 율법을 어기셨다고 주장하는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수 목사는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1 하지만 개혁파 신앙고백은 신자가 계명에 순종하는 것 역시 성신의 열매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공이 되기는 커녕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의 구원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하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이전 글 §E 참조). 김성수 목사의 주장은 죄에 거해도 은혜를 더하는 유익이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그런 것은 가당치 못하다는 바울의 타매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2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전 보다는 “더” 순종할 수 있도록 구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더 빚을 지고 그만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요한1서 5:2-5
김성수, 로마서 73강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진리를 알고 나니까, ‘아니 그게 탐심이었다고? 율법이 하지 말라고 그러는 걸 나는 계속 하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 이야기 하는 거에요.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그 탐심을 어떻게 죄로 알아들었겠어’ 그거에요. 그럼 바울이 그동안에 자기가 열심히 율법 지키면서 한 그게 죄잖아요? 그 죄가 바울에게 해가 된 겁니까? 바울에게 유익한 거였어요, 그게. 그러면 죄가 뭐 이렇게 나빠요? (21:32-22:04)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로마서 6:1–2 ↩
2 Comments
나운
선악과에 대한 김성수 목사님의 견해에 대해.
저의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같은 설교를 본 저는
김성수 목사님의 말을
‘ ‘자기가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기위해서’라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죄의 근본이며,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선악판단의 주체이시기 때문이죠. 그부분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하셨다고 봅니다.
결국 피조물인 우리는 그저 그분께 순종해야할 뿐 이라는 것이죠.
김성수 목사님이 설교중 하신말이 생각나네요.
“하나님 편을 들게 되었다구요.”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으나
그분이 옳으시기에 나의 판단은 더이상 의미가 없으며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이겠죠?
선악과도 마찬가지죠. 따먹지 말라했으면 안따먹어야 하는거죠. 거기서 나의 판단이 개입되는 순간 그게 바로 ‘죄’가됨을 설명하시고자 한 것으로 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을 보여주기에 그리나쁜것이 아니라는 것이 김성수목사님의 주장이라 쓰셨는데,
이부분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입니다.
계명에 순종하는것이 성신에 열매라는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내용을 다소 그 문장만 뚝 떼어내어 곡해하고 계신건 아닌가 생각되네요.
정말 믿음을 가지고 주의 뜻대로 살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점이 바로 나의 무능함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을 내어 주님앞에 온전한 믿음과 열심을 드리며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도 잘 안되니까요. 안되잖아요. 그때 무척 괴롭죠. 저는 그래요.
‘아… 내가 이러고도 하나님 자녀 맞나. 내가 이러고도 그 천국 백성 맞나.’ 부터 시작해서 ‘내가 가진 믿음이 진짜 그믿음 맞나’ 라는 고민까지 가게 되더군요.
그럴때 잊지말라는 의미 아닐까요.
그 풍성하신 사랑과 은혜를 알라는 것 아닐까요.
내가 갈망하는 하나님 나라 그 구원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나에게 거져주셨음을 잊지 말라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그말이 너무나 위로가 되더라고요.
“맞아.. 내가 못하니까 예수께서 친히 이땅에 오셔서 다 이루고 가셨지.”
그러니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더더욱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잖아요.
이와같은 맥락이라면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 는 말은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여 믿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애쓰고 발버둥치는 우리에게 위로하기 위해 하신 말이지
‘그러니까 죄 지어도 됩니다’ 가 결론이 아니란 겁니다.
Hun
귀하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쓰신 것을 직접 인용하자면:
1. “선악과도 마찬가지죠. 따먹지 말라했으면 안따먹어야 하는거죠. 거기서 나의 판단이 개입되는 순간 그게 바로 ‘죄’가됨을 설명하시고자 한 것으로 봅니다.”
2.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말은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여 믿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애쓰고 발버둥치는 우리에게 위로하기 위해 하신 말이지 ‘그러니까 죄 지어도 됩니다’가 결론이 아니란 겁니다.”
순서를 바꾸어 2번 주장을 보자면, 귀하께서는 제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십니다. 저는 김성수 목사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던지 ‘그러니까 죄 지어도 됩니다’라고 가르쳤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보다 더 심각하고 교묘한 가르침을 전하는데, 바로 “죄”를 비성경적으로 재정의합니다.
그런 김성수 목사의 잘못된 가르침을 귀하께서는 1번 주장에서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죄”를 재정의하는 김성수 목사의 오류에 대해서는 저의 글 <반법주의(antinomianism)의 예: 서머나 교회 김성수>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귀하의 2번 주장으로 돌아가면, 귀하께서는 김성수 목사가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려 했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본문에 이렇게 적었지요: “김성수 목사는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 달리 말하자면, 귀하의 주장대로 “김성수 목사가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여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애쓰고 발버둥치는 우리에게 위로”하려 했음을 압니다. 문제는 제가 김성수 목사의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귀하께서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의거하지 않은 위로는 성화의 열매로 이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