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다니엘과 다니엘 국무총리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과 같은 인물이라는 얘기를 하고 돌아다니는 무리가 있다. 정치적 사안이라면 본 블로그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는 아니나, 국무총리 다니엘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에 ‘다니엘과 같은 국무총리’를 운운하는 것에 대해 몇자 끄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다니엘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기원전 6세기 경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이다. 그런데, 다니엘과 더불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위인”들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되거라” 권면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구약 성경은 창세기 3장 15절에 기록된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역사의 기록이다. 혹 이 사람일까 혹 저 사람일까 기다려 보지만 다 “실패자”들이었다. 라멕은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생각하여 자기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으나, 결국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은 뒤 자기 아들을 저주하는 사람이 되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 역시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첩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하는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칭송 받는 왕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하였다. 지혜의 대명사인 솔로몬은 말년에 여색과 우상 숭배에 빠졌다. 이 실패의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약속된 그 아들이 오기까지.
결국 구약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은 ‘우리는 실패하였으니 장차 올 그 아들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과연 그 아들이 와서 성경은 결국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 하였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달리 말하자면, 구약 성경이 기록된 것은 우리 보고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되라고, 모세 같은 사람이 되라고, 혹은 다윗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너희가 받을 수 없는 약속을 받아낼 그 아들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항간에서 “믿음의 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소위 말하는 믿음의 “영웅”들을 모아 놨는데, 그 인물들을 나열한 뒤 내리는 결론은: “이 사람들은 다 […]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 이어지는 결론은 곧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우리가 에스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혹은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성경을 거꾸로 읽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성경은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이나 그 내용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읽는 방식이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우리 주위의 어떤 사람이 다니엘과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스스로 살피기 바란다. 그가 다니엘과 같은 역할을 하기 바란다는 것은 결국 그가 부족한 인생을 삶으로써 우리에게 ‘역시 믿을 것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바란다는 뜻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다니엘이 그 멀리서 바라본 그리스도에게서 우리 눈을 돌리려는 거짓 선지자의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다니엘은 적그리스도의 정신을 경고한 선지자였다.